“그랬다. 온 순서는 JTBC, 경향신문, 한겨레 순서로 기자들이 찾아왔다. 경향신문 기자는 JTBC 기자보다 30분 정도 늦게 왔다. 한겨레 기자는 오후에 왔다.”
-왜 JTBC만 도왔나?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손석희 사장을 믿은 거다. 두 번째는 신문보다는 방송의 파급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 거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온갖 뉴스를 다 봐왔다. 내가 도와줄 기회가 오니 자연스럽게 나선 것이다.”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도 왜 JTBC를 도와줬는지 집중적으로 묻더라. 내가 뒤로 무슨 대가라도 받고 도와준 것 아니냐고 꼬치꼬치 캐묻더라. 아니라고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협조한 거라고 진술했다. 그랬더니 검찰도 더는 안 묻더라. 나중에 김필준 기자가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제가 식사 같은 걸 바라고 도와준 게 아니다. 기자들이 보도만 정확히 해주시면 그걸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랬죠.”
-하지만 사무실 문을 열어주고, 남의 태블릿 피시를 가져가도록 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내가 그래도 방송통신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그 정도는 안다. 사무실 문을 열어줄 때부터 고민을 했다. 더블루케이하고는 아직 임대차 계약기간이 남아있었다. 2017년 1월13일에야 계약기간이 끝났다. 문을 열어주려면 더블루케이 쪽에 전화로 물어보고 열어줘야 맞다. 그런데 ‘기자가 찾아왔는데 문 좀 열어줘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누가 허락을 하겠느냐. 난 조그만 단서라도 나와서 취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줬다. 태블릿 피시도 그런 마음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처음에는 사실 둘러대려고 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기자가 몰래 보안카드를 가져가고 비밀번호 알아내서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다. 훔쳐간 거다.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검찰 수사관들이 이미 내가 김필준 기자하고 같이 4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장면의 cctv를 확보하고 있더라. 어쩔 수 없이 검찰청사로 가서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더블루케이 쪽에서는 책임 추궁이 없었나?
“더블루케이에 류상영 이사란 분이 있다. 10월24일 저녁 JTBC 보도가 나간 직후에 류상영 이사 한테서 전화가 왔다. ‘문 열어줬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아니, 그런 일 없다’고 부인을 했다. 며칠 뒤 다시 전화가 와서 ‘진짜 안 열어줬냐’고 물어서 다시 부인했다.
12월8일 JTBC가 태블릿 피시 입수 경위를 보도하는 날, 내가 류상영 이사에게 전화해서 사실대로 얘기했다. 내가 문 열어주고 태블릿 피시 가져가도록 했다고. 그랬더니 류 이사가 ‘훔쳐간 걸로 하면 증거능력이 없다. 차라리 끝까지 훔친 걸로 해주지 그랬느냐’고 하더니 ‘이젠 할 수 없죠’고 체념하더라.”
-건물 주인은?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다음날 건물주인 사장님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제가 태블릿 피시 가져가는 데 협조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임차인과의 법적인 문제도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더니 사장님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큰일 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열심히 근무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쯤 되면 노광일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해고를 당하고 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진실을 알리는 데 대단히 적극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이다. 기자 생활을 26~7년 해왔는데, 이런 협조자를 만나 본 적도 없고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궁금하다. 나이는 어떻게 되고 고향은 어디인가?
“1957년 생이다. 올해가 환갑이다. 고향은 전남 함평이다.”
-한겨레 창간 독자였고, 경향신문 배가 운동을 한 걸 보니, 언론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조아세를 기억하시는가.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시민모임’의 준말로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벌이는 단체인데, 내가 초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2003년 2004년에는 지하철역 여기저기를 다니며 조아세 유인물을 뿌렸다. 한겨레 경향신문이 호외를 찍으면 그걸 들고 서울역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데를 돌면서 시민들에게 나눠 주고는 했다. 지금은 그저 몇 군데 후원하는 정도다. 뉴스타파, 민언련, 팩트TV. 국민TV 등등에 한 만 원씩 돈을 내고 있다. 이런 단체에 내는 돈을 다 합치면 한 10만원쯤 된다. 내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걸 모아서 내는 거다. 글을 쓸 재주도 없고, 돈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독립언론을 돕고 싶어서 하는 거다.”
-한 달에 봉급을 얼마나 받는데 10만원씩 내나?
“4대 보험 해주고 한 달에 140만원씩 받는다. 명절이면 조금 더 챙겨주신다.”
-언제부터 언론에 관심이 있었나.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때가 내가 중 2였다. 아버지가 ‘김대중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를 하시길래 이장 집에 가서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찾아가면서 신문을 하루 종일 읽었다. 그때는 신문 들어오는 집이 이장 집밖에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서 신문 배달을 하면서 방송통신고를 다녔다. 그때가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다. 신문을 돌리면서 신문을 열심히 읽었다. 그 뒤 호텔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방송통신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55살이 정년인데 그때까지 27년을 다녔다. 진급은 못했다. 내가 윗사람들한테 아부를 잘 못해서.”
건물 관리인 노광일씨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노무현 재단 달력. 펼쳐진 2월 달력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2년 대통령 취임식 사진이 실려 있다.
그가 출퇴근할 때 매고 다니는 가방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세월호의 그 노란 리본이다. 또 그의 책상에는 노무현재단 달력도 있었다. 펼쳐진 2월 달력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통령 취임식 사진이 실려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노사모 초창기 멤버다. 2002년 대선 때는 참 열심히 뛰었다. 내가 제약회사에서 한 일이 약국의 약사들에게 약을 파는 영업사원이었다. 그런데 그 약사들을 상대로 국민참여경선 신청서를 모으고 후원금을 걷었다. 내가 모은 국민참여경선 신청서가 한 200장 됐다. 그랬더니 회사 전무가 ‘너 그렇게 하면 노무현이 뭐 복지부장관이라도 시켜준다고 하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참 우연이다. 최순실의 사무실이 있는 곳에, 그것도 결정적 증거인 태블릿 피시가 있는 곳에 선생님 같은 분이 근무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을까하고. 아마도 하늘에 계신 우리 노짱님(노무현 대통령)이 이걸 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