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는 무조건 자유를 찾았다.
나이를 먹고선 무조건 자유를 누렸다.
더 나이를 먹으니 누리는 자유보다 책임이 커졌다.
젊었을 시절, 아니 지금도 젊지만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내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 기준 아래 행동하고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어디하나 머리 조아릴 일 없이 당당했다.
어느순간 시간이 흐르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제까지 지칠 줄 모르던 나는 오늘 너무 지치고
어제까지 눈물 흘릴 줄 모르던 나는 오늘 눈시울이 붉어지고
어제까지 없던 주금이 어머님 얼굴에 자리잡고
어제까지 옅은 주름이 어머님 얼굴에 깊이 패이고
내게 주어진 자유보다
내가 짊어질 책임이 커져감을 실감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어느순간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시나브로 시나브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잘 될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알고 있었지만 별일 있겠냐 생각하고
늘 내가 하던 모습 그대로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인생에 있어 큰 일들과
큰 선택들이 오고갔고, 그 선택에 기로에 다시한번 놓인 나는
10대에 10초 고민 하던 것
20대에 20분 고민하고
30대에 30일을 고민하게 되었다.
용한 무속인이 아닌 이상, 신이라는 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신이 아닌 이상, 내 선택 앞에 무엇이 닥치고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유 뒤에 놓일
책임이 얼마나 클지 알 수는 없다.
10대에 10mg이었던 그 책임이
20대에 20kg가 되었고
30대에 30t이 되어버렸다.
사실 나에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작인 이유 하나는
그저 내가 도망치지 않고 그 앞에 서있다는 것 이다.
당당하게 고개들어 앞을 똑바로 보며 서있지는 못해도
짝다리 짚고 거만히 아래에서 노려보고 있지는 못해도
두다리 후들거리며 굽은 어깨를 할 지언정
내가 내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작은 이유 하나는
도망치지 않고 그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이곳에 왜 글을 쓰고 있는지 목적은 없다.
다른 누구에게 무슨 해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흔들리는 내 시선에 대한 누군가의 관심.
어쩌면, 후들거리는 내 두다리에 대한 격려.
어쩌면, 당연한 몫이지만 무거운 짐에 대한 위로의 시선.
그저 그것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10대에는 누구에게 맞더라도 나 혼자 이겨냈고
20대에는 어디서 상처가 생겨도 약 바르면 나았지만
30대가 되니, 당연한 짐들이 이리도 무거울 줄이야.
산다는 것은 정말 많이 힘들고 괴롭구나.
하지만 그 앞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큰 불안 앞에 그나마 작은 설레임이 있고
큰 무게 위에 그나마 작은 휴식처가 있으며
큰 걱정 안에 그나마 작은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산다는 것은 정말 많이 힘들고 괴롭구나.
산다는 것은 아주 작은 기대와 희망과 함께 하는 구나.
아주 당연한 일을
아주 힘겹게 곱씹으며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는 오늘,
이제는 너무도 약해진 마음 만천하에 털어놓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