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잃은 많은 이들이 기일이 다가오면 온 몸이 아픈 것을 경험한다.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제사가 다가오면 시름시름 하시곤 했다. 정작 기일인 줄은 잊고 계시면서 말이다. 머리는 아픈 기억을 의식 아래로 꽁꽁 눌러놓아도 우리 몸은 귀신같이 기억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너 지금 아프다고, 너 사실 지금 힘들다고, 너 이맘 때쯤 아주 소중한 것을 잃었노라고.
안 그래도 많은 이들이 봄을 타는데, 이제 4월은 우리에게 너무 잔인한 계절이 되어 버렸다.
지천엔 새 생명으로 가득하고 햇살은 찬란해져 가는데 그 찬란한 봄기운에 외려 빈 자리면 선연하고 살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루하기만 하다.
그렇다. 작년 이맘 때, 우린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렇다. 나는 우울하고 속상하고 온 몸이 아프고 쑤신다. 그래, 그게 정상이다. 사람의 마음을 한 이라면 그게 당연하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공감'능력을 가진 이라면 당연한 거다.
무엇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지 한번 곰곰히 돌아봤더니, 참사도 아니요, 그 대응 때문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과 이제 그만 하라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제일 크더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은 인간의 기본인 '공감'이 안되는 불쌍한 장애인들이다. '자식 잃은 고통 이해한다. 그런데 그만 해라'. 이해도 공감도 전혀 못하고 있는 거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해본적 없는 불쌍한 이다. 아니 자기 자신도 어쩌면 스스로 깊은 곳에서는 경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일주기를 맞아 아프고 힘든 당신이 더 건강하다. '우리'의 범위가 넓어서 세상 모두 끌어안고 사는 당신이라서 그렇다. 눈물이 많을진 몰라도 자식 읽은 어미, 아비에게 이제 일년이니 그만 잊으라고 하는 괴물들보다 내 자식 잃은 듯이 슬퍼하고 공감하고 괴로워하는 당신의 삶이 훨씬 풍요롭다. 당신의 눈물이 훨씬 아름답다. 이 사월에 느끼는 당신의 통증이 더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