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자작시 <성적 교환> 外
게시물ID : lovestory_732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꽃눈
추천 : 1
조회수 : 60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17 21:34:27
  성적 교환

눈이 펑펑 왔던 그 때 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죠

삮월세 방을 놓고 부모님은 맞벌이 나가셨고 동생은 눈싸움을 하러 나갔고 집엔 할머니와 내가 있었죠

셋방을 보러 당신이 왔고, 할머니께 물 한 잔을 부탁했고,


그 사이, 우리는 첫 키스를...

어린 나는 놀라서 당신의 혀를 깨물었죠

당신은 태연하게 나를 내려놓고, 당신의 그것을 꺼내서 한 번 만져보라며, 이거 좋은 거라며


십삼사년이 지나 대학생과 교수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었죠

종강 파티에서 나는 과가 안 맞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최소한의 알바만 하며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당신에게 물었고

당신은 이혼한지 오래라며, 돈 쓸 일이 옷 사고 책 사는 거 밖에 없다고

며칠 후, 신년 벽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선배가 견습 공무원 추천 때문에 성적이 필요하다며, 내 성적인 a-와 그 선배의 성적인 b+를 바꿔줄 것을 청했어요

공정하지 못하다는 나의 말에,

나도 20년 전 같았으면 불러서 싸대기를 때렸다고, 그치만 한 번 적선한 셈 치고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고

내가 너희들 성적을 좋게 준 이유가 뭐겠냐고

세 단계씩 높게 줬는데, 원래대로 낮게 바꿀까

그게 공정한 거 아니냐고


나는 알았다고, 바꿔 드리겠다고 대답하고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어요

새벽 두 시에 문자를 보냈죠

'교수님, 성적 교환은 제가 손해였다고 말하면 됐었어요.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위선이었어요.'

괴로워하다 당신에게 전화했더니, 당신은 원래대로 바꿔줄테니,

내 수업도 듣지 말고 사람들하고도 어울리지 말라며 큰 소리를 쳤죠


나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길에 울었고, 꽃이 아파왔어요

당신은 선배와 나에게 말했죠, 귤 먹어라.

근데 귤을 먹었으면 그걸 해야지.


이를 닦아야지.

굳어있는 내 얼굴을 보고, 당신은 얼굴 피라며.




  죄와 벌 : 시베리아에서 귤이나 까라
고등학교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의 일이다. 나는 효목도서관(지금의 수성 도서관) 2층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책을 빌리려고 3층 종합자료실에 올라갔다.
들어가려는 순간, 한 남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배낭을 메고,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하얀 얼굴.
기억은 자세히 안나지만, 깔끔한 옷차림.
도서관 대출증이 지금 없는데, 대신 책을 빌려주실 수 있냐고.
그는 죄와 벌 상권을 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화려한 색상의 유화가 그려져 있는, 페이퍼백이었다.
나는 죄송하지만 못 빌려드리겠다고 하고, 종합 자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 내 책을 골라서 들고 나오는데, 아직도 입구에서 그 남학생이 서 있었다. 죄와 벌 상권을 들고.
도서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던가.
순간 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받아서 내 이름으로 대출해줬다.
그 남학생은 종이 쪽지에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
그의 이름은 김인상이었다.
그는 캔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캔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서 2층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나에게 몇학년이냐고 물었다.
고등학생이라고 알려주니, 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그는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랬다.
학교 이름은 어렴풋이 기억나지 않는데, 경북댄가 계명댄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몇주가 지나도 그 남학생은 책을 반납 안했다.
전화해서 반납 해달라고 해도, 알겠다는 말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반납을 안했다.
계속 전화를 걸어도, 곧 반납하겠다는 대답만 할 뿐 반납을 안하는 거였다.
'먹튀'를 했으면 상식적으로 전화를 안 받아야 되는데, 전화는 꼭꼭 잘 받았다.

연체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렸다.
할 수 없이 학교 공부를 했다.

몇개월 뒤에 도서관에서 우편으로 독촉장이 날아왔다.
엄마가 보시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엄마가 그 남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반납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 남학생은 책을 반납 안했다.

결국엔 오천 얼마를 도서관에 냈다.

이제 몇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죄와 벌을 '못' 읽는다.
왜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읽고 싶은데, 지금은 아직 읽을 수가 없다. 아파서.

그 남학생, 김인상씨의 휴대전화 번호는 아직 엄마가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죄와 벌을 다 읽게 된다면, 꼭 전화해서 묻고 싶다. 내가 빌려준 죄와 벌 상권, 아직 가지고 있냐고.
죄와 벌, 다 읽으셨냐고



  매화

꽃잎을 보며, 너의 손톱 같다며 웃는 그대는 이제 없다



  용천사(湧泉寺)

대웅전 밑
허리께 오는 작은 둘확 두 개
하나에는 물이 차 있고
하나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물 위에는 연보라 빛
부레옥잠 꽃 한 송이 피었다
나는 빈 돌확 안에 들어가
찬 바람을 견디다가
피는 꽃이고 싶다




  벼꽃

씨발!
농부들 욕 들어쳐먹어가며 피워놨더니
나랑 똑같은 유전자 가진 게 몇 억 개

시한부 인생,
무덤 밭에 구슬붕이는 술이라도 쳐먹지!

농약을 들이키며
조금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광기에서 멀어져가





  삼배(三拜)

오라버니 출가하는 부산 범어서 바래다 드리는 길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혼자서 가시겠다는 걸, 극구 같이 가자고 하여 

아버지 49재는 같이 지냈지만 
아직 내 약혼과 결혼이 남아 있는데 
내 뱃 속엔 아가가 있고 

범어사 안까지 함께 들어가 
대웅전에 삼 배 올린다 

애 아빠는 홀어머니에 외아들, 
우리 예비 부부에게 형제라고는 내 오라비 밖에 없건만 

우리 아가에게는 삼촌도 이모도 할아버지도 없겠구나 

그러나 그 때 어머니 뱃속에서 함께 삼 배 올렸던 나는 
외삼촌을 열 한 살 때와 스물 한 살 때 만났었고 

서봉사 뒷뜰 북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서봉사 대웅보전에 삼배할 때마다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어머니께서 나를 잉태하셨던 
삶과 죽음의 순환 
외삼촌이 세속을 떠나시고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셨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다



  언제 아침은 시작되는가

새벽의 명철한 푸르름 마저 퇴색시키는 누런 나트륨등이 꺼지고, 가로등 없이 아침 산책을 할 수 있을 때?
올빼미족이 긴 밤생활을 마치고 비로소 잠자리에 들 때?
조간 신문 배달원과 우유 배달원이 일을 시작할 때?
수평선이 비로소 구분되는, 맑은 날 바다와 하늘이 구분간다는 항해 박명의 시각에 아침은 시작되는가?
아직도 아침 잠 많은 젊은 그대가 일어날 때, 바로 그 때가 아침인가?
아침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모든 사람은 그 한 사람 나름의 아침을 맞는다 
 
봄은 봄이고 여름은 여름이고 가을은 가을이고 겨울은 겨울이지만
모든 사람은 그 한 사람만의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맞는다 
 
올 해 나는 대구에서는 동백이 아니라 춘백이라고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봄을 맞았고
자연 유산 후 내가 예전보다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올 겨울의 추위가 두려워질 때 비로소 여름을 맞았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어떤 가을을 맞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계절과 시간을 맞고 있는가



  장미의 행복

가시가 가위에 잘려나가 아파도
비닐하우스 속 장미는 행복했다
날 사갈 사람이 찔려서 아파하지 않아도 될 거야

다 키워져 봉오리 맺힌 장미가 가위에 꺾어져
키워준 뿌리, 줄기와 이별해도 장미는 행복했다
곧 누군가 날 사가서 예뻐해 줄거야

풍성한 장미 다발이 아닌
가장 값싼 비닐 포장지에 혼자 싸여도 장미는 행복했다
한 송이 밖에 없으니 날 더 예뻐해 줄거야

성년의 날, 그가 장미를 사갔다
공강 시간에 성년의 날을 맞은 그녀에게 장미를 주며 고백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힘 없이 장미를 들고 집에 왔다
그는 장미를 책상 한 구석에 놔두고 오랫동안 봐주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장미는 행복했다
그가 말려진 장미 꽃잎을 소중히 간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을 만큼 아팠던 첫사랑의 증표가 될 수 있어서
그녀가 생각날 때면 그가 책갈피에 살고 있는 장미를 종종 꺼내봐서
장미는 정말로 행복했다




  목솜을 걸어 쓴 시

일요일, 갓바위 올라가는 사람 많은 산길

산길 한 가운데 병든 나비 하나 앉았다

밟힐 세라, 곁에 쪼그려 앉아 지켜보다가

산 속 깊이가 아닌 사람 다니는 길에서

죽음을 맞을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돌아서서 몇 걸음 가다

한 번 뒤돌아 보니

나비는 사라지고 없었다


신발에 밟힐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건 나비가 있기에 이 시를 쓸 수 있었고

모든 엄마는 자식을 낳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



부재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시를 쓰지 않겠다고

아니,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그대의 부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써야만 한다, 그대가 이 글을 읽을 것이므로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글을 쓰는 것이기에

 

그대는 쌍성에 대해 아는가?

어두운 별과 밝은 별이 서로의 주위를 돌며 붙어있는 두개의 별

두 별이 겹쳐지면 지구에서 보는 쌍성의 밝기가 어두워진다

우리가 만났던 때에 우리의 밝기는 어두웠고

우리는 늘 이별을 이야기했다

서로 떨어지는 것이 우리가 밝아질 수 있는 길이었으므로

 

그러나 쌍성의 밝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의 밝기일 뿐

우리 둘 속에 타고 있는 빛은 늘 변하지 않고

늘 우리는 서로의 주위를 돌고 있다

 

관찰자, 지구의 시선에서 생각하지 마시라

인류가 샇아온 관습과 도덕과 지식에서 벗어나서

그대 안에서 타오르는 빛과

나와 그대의 인력만을 느끼시라

 

나에게 그대의 부재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나의 별을 지배하던 인력을 상실하면 그 별의 궤도는 어떻게 되겠는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쌍성 

이 글에서 나오는 쌍성은 '식쌍성'으로, 쌍성간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식 현상이 일어나는 쌍성을 말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쌍성#mediaviewer/File:Eclipsing_binary_star_animation_2.gif 

(식쌍성의 밝기 변화)




무제


혼자 집에 있는데 집 전화벨이 울렸다

“김월임님 댁이십니까?”

이미 십여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성함이다

할머니의 이름을 듣거나 불러본지 오랜만이다

종종 우편물 수신자란에 할머니의 이름이 적혀있곤 한다

 

과자가 먹고 싶어서 사러 밖에 나가는 길,

봄을 주웠다

튼튼한 비닐로 된 아이스팩인데 얼음이 다 녹아서 물이 차 있다

나는 곧 봄을 버리고 집 앞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슈퍼 주인 아저씨는 나이 드신 어머님과 둘이서 가게를 운영했다

아르바이트생이나 직원이 없어서

형편이 그리 좋진 않겠구나, 생각했었다



신천

그래도 오늘도 살았다
신천은 빠져 죽기에는 너무 얕아서.



시어


꽃집을 지나치지 못하고 정신없이 바라보는 너에게
내가 꽃인데 뭐가 더 필요하냐고 질투하고



'너'가 너라는 걸 네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시를 쓰면서 네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절념(竊念)


손 탈까 차마 만지지도 못하는 꽃눈을
쌓이지도 못하는 풋눈이 희롱하네 속절없어

속절없어 봄이 오고 개화한 목련은
그 풋눈 비슷한 색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