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에 대해/
너 거기있지? 나 여기있다.
우리의 존재가 실존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린 스스로가 느끼는 바대로 살아간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며, 그런 느낌을 떠올리게 된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앎에 굶주린 불행은, 앎을 획득한 대상에 대한 느낌이며, 가지지 못한 불행은 보다 많이 가진 대상에 대한 불행이고, 성취하지 못한 불행은 이룬 대상에 대한 불행에 다름아니다.
모든 상대성을 가지고 불행을 느껴야 한다면, 세상을 사는 그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임이 자명하다.
상대성에 대한 위험한 처방.
'내가 힘들땐 나보다 어려운 이를 보라.' 이건 잔학한 처방이다.
불행함을 느낌에 대한 근원적인 방법을 피하고, 임시방편으로 반대방향으로의 상대성을 통해 극복을 하는 훈련에 익숙해지게되면, 그것역시 반대방향으로의 상대성에 자각될때, 어마어마한 반작용을 불러 온다.
상대성으로 인해 불행을 느끼는데 대한 해방은 결코 쉽지 않다. 득도를 하거나 깨우친다는 반열에 오르지 않고서야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에게 햇빛, 달빛, 별빛은 과거다. 그것이 과거라는 것은 나에게 과거임을 일깨우는 해, 달, 별이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내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의 순간은 해와 달과 별에게 있어 미래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우리의 기준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가 그들에게 있어 미래라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를 상대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들에 있어, 우린 '이미 미래'일지도 모른다. 아니. 미래이다.
우린 미래를 바꾸고 있다.
다시 돌아가보자, 돈, 성취, 연애, 꿈, 집, 차, 취미, 사교. 우리에게 있어 이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순 없다.
열거한 모든것들의 목적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잊고 상대성의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게되면, 정작 목적인 나는 없어지고 수단만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어려운 일이지만, 상대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나'를 자각하고 '나'를 인식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 선지자들이 현상에 목을 메지 않고, 현상을 느끼는 자기자신 스스로에 대해 파고들었는지 개미눈꼽보다 작게 이해될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