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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룬의 아이들 : 데모닉 - 막스 카르디의 등단 上
게시물ID : animation_324462짧은주소 복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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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 1
조회수 : 43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4/20 18:00:59
하이아칸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조슈아는 눈을 감은 채 입 안에 든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사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쓰디쓴
맛이었지만 중독성도 변하지 않아 틈틈이 입 속으로 가져가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간 이빨이 다 썩어 버릴지도 몰라]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조슈아 한명이 전부였지만 분명 이 목소리는 조슈아의 성대에선 나올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애초에 조슈아는 사탕을
빠는데 집중하고 있어 입을 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이제 별로 안 남았으니까"
 
조슈아는 사탕이 담긴 통을 들어 반대편 자리에 올려 놓았다. 통에 담긴 사탕은 세개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 동안 먹은 게 있을텐데 괜찮을까?]
 
또다른 목소리가 다시 한번 허공을 울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되려 짜증을 부리며 올려 놓았던 통을 제자리에 두고 투덜거렸다.
 
"그럴 거면 진작에 말했어야죠. 그리고 이 안에서 제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곤 이게 전부였다고요. 이젠 그마저도 없어질 지경이지만"
 
조슈아의 아버지 프란츠 공작은 하이아칸으로 가는 동안 조슈아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여러 권의 책들과 각 종 놀이기구들을 마차 안에 실어주었지만
데모닉인 조슈아에겐 그 어느 것도 흥미를 붙일 거리가 되지 못했다. 수십 권의 책들은 한번 읽으면 그 내용을 전부 기억해버려 다시 읽는 의미가
없었으며 놀이기구들은 조금 만지작 거리다 보면 어느새 완벽하게 숙달 되어 있었다. 불과 나흘도 채 되지 않아 조슈아는 마차에 실은 모든 책들과
놀이구들을 팔아 쓴 맛을 내는 사탕을 대량으로 구매해 한동안의 여행길에 입친구를 두기로 했었다.
 
[나와 대화하는 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야? 조금 서운한 걸]
 
"처음에는 좋았죠. 하지만 켈스, 당신은 잔소리가 너무 많아"
 
조슈아가 수도사 차림을 한 유령인 켈스니티 미드와 알고 지낸지 벌써 몇달이 지났다. 조슈아도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 당분간은 예를 갖추며 지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잔소리에 넌덜머리가 나 언행을 함부로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켈스니티는 조슈아의 그런 태도를 더 맘에 들어 했고 그 후로
조슈아가 켈스니티를 대하는 태도는 자못 친구를 대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졌다.
 
[너한테 쓴소리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어]
 
"나한테 그런 사람은 한명이면 충분해요"
 
조슈아의 말은 막시민을 두고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조슈아는 켈스니티의 말을 빈정대는 의미로 사탕을 파삭 깨물었다. 
 
[그나저나 나와 대화밖에 하지 않는다는 건 여러모로 아쉬운 선택이야]
 
"그게 무슨 말이죠?"
켈스니티는 마차 안을 휘 둘러보았다. 왠만한 물건들은 조슈아가 전부 팔아치웠던지라 크게 눈에 들어오는 물건은 없었다.
 
[여기 체스판은 없는 모양인가 봐?]
 
조슈아는 켈스니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바닥을 치며 깨달았다. 유령이 산 자와 다른 게 있다면 실체가 없다는 것 뿐,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한다는 건 산 자와 똑같았다. 조슈아는 유령인 켈스니티를 산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좀 처럼 깨닫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분명히 마차 안의 물건을 전부 매각했고 그 안에는 분명히 체스판도 포함 되어 있었다.
 
"좀 더 일찍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나도 방금 생각나서 말이야]
 
조슈아는 밖을 슬쩍 내다 보았다. 아직도 사람의 손길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허허벌판이 계속 되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닿으려면 하루가 지날 때 까지 마차 안에 있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시선을 위로 향하니 어스름한 황혼이 물러나고 있었다.
 
"다음 마을에 들렀을 때에는 체스든 뭐든 둘이서 할 수 있는 걸 꼭 사야 겠어요"
 
동시에 조슈아는 농담을 덧붙였다.
 
"아, 너무 진다고 해서 어디로 가거나 하면 안돼요"
 
켈스니티 또한 적당한 재치로 조슈아의 농담을 유쾌하게 받아쳤다.
 
[데모닉이라 할지라도 수백년의 관록을 우습게 보면 곤란해]
 
조슈아는 그제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진심 섞인 웃음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차를 이끄는 마부는 가뜩이나
밤길이 힘든데 무엇이 웃기냐고 투덜거리며 말고삐를 세게 잡았다. 조슈아가 탄 마차가 더욱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
 
하이아칸에 온지 벌써 석달 째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딱히 심신이 안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장은 하이아칸의 기후를 본딴 따뜻한 계열의 색을 주로 쓰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비취반지성과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머무는 장소가 이 정도인 건 아무런 것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별장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비취반지성의 하인들과 달라서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비취반지성의 하인들은 조슈아가 데모닉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소
일탈적인 행동을 해도 무슨 생각이 있으려니 하고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곳의 하인들은 조슈아의 아버지인 프란츠 공작이 별다른 설명
없이 마음이 유약해져 있는 소공작을 잘 돌보란 말만 했기에 조슈아가 어떤 행동을 취할라 하면 일거수일투족을 도와주거나 제재하려 들었다.
어떤 때엔 답답함을 못 이겨 바깥으로 외출하겠다고 하자 별장 책임자인 브와주 부인 부터 시작해 모든 하인들이 외출을 삼가기를 바랬고 겨우 겨우
뜻을 피력해 바깥에 나가도 곁에 십수명의 호위 인력들을 두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조슈아는 사실 이들의 진의를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책임은 이들이 져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만에 하나 자신에게 위해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정확히는 책임을 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나마 말상대가 되어 주던 켈스니티도 몇일 전 자취를 감추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켈스니티가 원래 신출귀몰 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유일한 말상대 마저 사라지니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조슈아로선 도저히 무료함을 견딜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끝끝내 조슈아는 별장을 탈출했다. 제아무리 삼엄한 별장의 경비도 데모닉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조슈아는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새장과도 같은 생활을 계속 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내달렸다. 당장의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편지를 남겨 놓았으니 일주일이 지나도록 자신을 찾는 낌새가 보이지 않으면 조슈아는 하인들이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인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조슈아는 진정한 의미의 하이아칸 생활을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앉긴 했어도 과거 막시민과 함께 코츠볼트의 구석구석을 쏘다녔던 경험이
있었고 더군다나 이 곳은 시골인 코츠볼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속적인 하이아칸이었다. 조슈아가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앞으로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슈아는 우선 별장에서 가져온 약간의 귀금속을 팔아 목돈을 마련한 뒤 하이아칸에서 누릴 수 있는 왠만한
것 들을 경험했다. 개중엔 적잖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많았지만 조슈아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돈은 조슈아의 헤픈 씀씀이를 견디지 못 해  거의 탕진된 상태에 이르렀다. 조슈아는 남은 돈을 짤랑거리며 적당히 돈 쓸 장소를 찾아
번화가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조심해!"
 
본래 사람이 들끓는 번화가였지만 오늘은 더욱 사람이 많았다. 앞으로 나아갈려고 하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이리저리 뒤섞여야 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일이 조금 더 험해지면 몸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조슈아는 그 사이에서도 나름 유연한 대처로 앞으로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인파를 지나가던 도중 조슈아는 모두들 한 쪽으로 시선이 쏠려 있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일까 싶어 그들과 같은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겹겹이 쌓인
인파 때문에 그들이 도통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호기심이 생긴 즉시 인파로 형성된 지층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원래
지층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불거진 녀석을 견제했지만 조슈아는 그에 굴하지 않는 집념을 십분 발휘해 가까스로 인파의 시작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고급스런 게시판에 고급스런 전단지가 가지런한 순서로 붙어 있었다. 눈을 위에서 아래로 굴려 좌악 훑어보니 전단지의 내용은 죄다 어느 극장에서
무슨 작품을 상연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조슈아는 김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연극같은 것들은 어렸을 적 캘티카에서 숱하게 봐왔었고 직접 참여도 해봤던 것들이었다. 굳이 하이아칸에서까지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조슈아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조슈아를
향해 화살 달린 시선을 쏘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거' 라니, 당신은 무슨 자신감으로 하이아칸의 자랑거릴 욕보이는 거죠?"
 
조슈아의 말에 의문을 제시한 건 흰색 바탕에 금테를 두른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었다. 이제 보니 게시판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인을 대동한 귀족들 같아 보였다. 조슈아는 자신이 무언가 귀찮은 걸 건드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귀족들은 대개 자존심이 높은지라 어지간해선
한번 세운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건 지금 상황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귀족들은 조슈아를 설전으로 유도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조슈아에게도 꺾을 수 없는 자존심이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아닌 데모닉으로서의 자존심이, 데모닉인 조슈아는 자신의 눈에 들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치켜세울 필요를 조슈아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글쎄요. 당신들에게 이야기 해줘도 이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전 여기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이 그저 시시한 눈요깃거리로 밖에 보이지가 않아요"
 
이유 조차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건 조슈아에게 의문을 제시했던 귀부인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들에게 상당한 굴욕을 안겨 주었다.
"
이해할 수 있을지 말지는 들어봐야 아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지껄인 말을 주워담는 게 두려운 건가요?"
 
귀부인도 조슈아의 건방진 언행에 굴하지 않은 채 제법 매서운 반격을 선사했다. 조슈아는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절레절레 휘저었다.
 
"그럴리가요. 지금 제가 이유를 말하지 않는 건 방금 말했다시피 당신들은 제가 그 이유를 말해줘도 이애하지 못 할게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그럴 바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제 쪽에서 수고를 더는 일이겠죠"
 
"기만이군요. 당신은 지금 이 곳에 있는 모두를 기만하고 있어요"
 
조슈아의 논리 조차 없는 일방적인 거만함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 갔다. 술렁거림이 파도와 같이 퍼져갔고 조슈아에게 폭언을 퍼붓는 사람까지
생겼다. 하이아칸에서 태어난 자부심 높은 젊은이들 중 일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자루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조슈아는 이 곳에 있는 전원을
적으로 돌린 것이나 다름 없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잠시만"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의 목소리가 소란을 잠재웠다.
 
과하게 화려한 차림을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 수수한 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이 걸어 나왔다. 그를 본 다른 사람들을 놀라거나 다시 수런거리기를
반복했다. 주변 인물의 반응을 보아 예사스런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조슈아도 그가 자신의 앞에 서자 주변의 분위기를 고려해 한껏 상기 되었던
기분을 가라앉혀 차분한 표정을 내세웠다.
 
"극장 콜제타를 경영하고 있는 파냐나라고한다"
 
중년의 남성은 조슈아에게 선뜻 손을 내밀었다. 조슈아는 파냐나가 내민 손을 잠시 내려보다가 똑같이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맞잡았다.
 
한편 조슈아와 파냐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거대한 극장 콜제타를 운영함과 동시에 흥행을 놓치지 않은, 하이아칸 극장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흥행사 파냐나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모자라 하이아칸 극장가 전체를 모욕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조슈아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대강 읽어 자신에게 악수를 청한 이 사람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란 걸 눈치챘다.
 
"아까 부터 네가 한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와선 조금은 궁금해지는군. 우리 하이아칸에서
상연되는 연극들의 대부분은 높은 수준을 갖고 있는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각 분야의 정상들을 국가를 막론하고 섭외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금과 같은 말을 한 건가? 혹시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말을 철회할 기회를 주지" 
 
이십대 후반에 극장 콜제타를 인수해 연이은 흥행을 기록하면서 그 명성을 널리 알린 파냐나는 이따금씩 큰 작품의 상연을 앞둘 때 마다 직접 거리로
나와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작품에 관한 평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평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족하며 극장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조슈아의 말을 들은 파냐나는 극장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조슈아가 깔본 게시판에 붙어 있던 전단지들 중엔 콜제타에서 상연될 작품의 전단지도 붙어 있있기 때문이다.
 
"가르쳐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아요. 높은 수준의 관객들이니, 각 분야의 정상들이니, 그런 말들은 하나 같이 제게 와닿지 않는 말들이에요. 입으로는 무엇인들 얘기하지 못 할까요?"
 
이제 조슈아의 말은 이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 일으키지 못 했다. 조슈아와 파냐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저 조슈아의 무례한 언행을 파냐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신경 쓰고 있었다. 파냐나는 조슈아의 말을 듣더니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가장 명쾌한 답을 떠올린 듯 옷 소매에서 길다란 종이를 꺼내 조슈아에게 건네주었다.
 
"직접 본다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지"
 
조슈아는 파냐나가 건넨 종이를 보았다. 파냐나가 조슈아에게 건넨 건 바로 내일 상연될 공연의 좌석 표, 그것도 없어서 구하지 못 한다는
최고급 좌석이었다. 조슈아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파냐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파냐나는 은근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는 일부
귀빈들에게 선물할 예정인 표 였으나 이런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동안의 풍파가 형성시킨 여유이기도 하면서 남자로서의 호승심이 이유인 듯 싶었다. 파냐나는 가끔씩은 이런 변덕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조슈아에게 표를 주었다. 어차피 자리야 하나 더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친절.. 고마워요. 꼭 보도록 하죠. 부디 제 마음이 바뀌었으면 하네요" 
 
조슈아는 샐쭉 웃으며 파냐나가 준 표를 재빠르게 옷소매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고선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파냐나는 장난을 저지르고 뒷수습을 하지 않은 채 도망가는, 아이 같은 조슈아의 뒷모습을 흥미가 있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오늘 저녁 극장 콜제타에서 상연될 연극을 보기 위해 콜제타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직 상연되기 까지 두시간이나 남은 시각인 걸 감안하면
이번에도 극장주인 파냐나의 안목이 제대로 대중을 꿰뚫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본래 이 정도의 최고급 인력을 투입하는 건 본격적으로
관광객이 몰려드는 '소드-라-샤펠' 축제 때에나 해볼 법한 일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파냐나는 나름의 모험을 한 셈이었지만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른 극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준비를 갖춘 콜제타의 작품들을 보기를 원했고 현재로선 가히 독점과도 같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파도 너머로 보이는 이웃 극장에는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차선책으로 이웃 극장의 작품의 표를 사는 사람들
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저기, 여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조슈아는 그 와중에도 사람들에게 표에 적힌 자리를 물어물어 자신이 앉아야 될 자리에 찾아올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일부가 어제의 일로
조슈아를 알아보았으나 다들 연극을 봐야 한다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그저 조슈아에 관해 몇마디씩 떠들고 가는 게 전부였다.
 
조슈아는 자리에 배치된 소형 망원경으로 무대를 살펴보았다. 무대 장치들은 여태껏 봐왔던 것들 중에 가장 사실적이었다. 조슈아는 파냐나가 말했던 말의 일부를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꺾어 1층에 앉은 관객들을 보니 귀족에서 부터 일반 시민까지 아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이 연극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연극을 본다는 사실 하나 만큼은 캘티카 보다 좋은 것 같다고 조슈아는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그 순간 붉은색의 거대한 커튼이 무대를 가리더니 위에서 부터 조명이 하나둘 켜졌다. 수런거리던 소리가 일순간에 멈추었고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고조되는 현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조슈아도 약간은 흥분하고 있었다.
 
이윽고 연극의 막이 올랐다. 연극의 내용은 대략 서사시적인 내용에 주인공의 성장사가 얽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극적인 장면 마다 상당히 화려한 연출에 관객들을 압도 당하거나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연극을 즐기고 있는 다른 관객들과 다르게 모든 장면의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관람 보다는 관찰에 가까웠다.
 
장장 세시간을 넘은 연극의 상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우수수 극장 밖을 빠져나갔다. 관객들은 빠져나갈 순서를 기다리면서 저마다 인상 깊었던 장면과 배우의 열연,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슈아는 여전히 자리에 남아 무대 쪽을 보고 있었다. 왠만해서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시간 뒤 무대를 정리하기 위해 청소부들이 올라오자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쪽으로 향했다. 청소부들은 무대로 다가오는
조슈아를 극장 관계자로 여겨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파냐나씨가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조슈아는 어째서 이들이 자신에게 싹싹하게 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청소부들은 어디까지나 말단 직원이었기 때문에 극장주인 파냐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조슈아는 청소부들을 뒤로 한 채 직접 파냐나를 찾기 위해 무대의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안은 아직까지도 뒷정리를 하느라 다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규모가 어지간히 컸던 공연인지라 아직까지 절반도 정리를 하지 못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틈바구니 안에서 조슈아는 계속 파냐나를 찾아 다녔다.
극장의 직원들은 조슈아를 가까이서 보면서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 했는데 조슈아의 생김새가 워낙 곱상한 데다가 옷차림도 어느 정도 세련
되어서 어느 누구든지 조슈아가 이 곳에 있어도 될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조슈아는 그런 사실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에라도 파냐나를 만나고 싶었다. 직원들 여러 명을 붙잡고 물어봐서야 겨우 파냐나의 사무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슈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을텐데"
 
오늘 상연으로 얻은 수익을 계산하고 있던 파냐나는 갑작스런 노크에 짜증을 내며 오늘의 수익을 필기해둔 종이를 책상 안에 집어넣었다.
 
"어제의 친절은 고마웠어요"
 
"....?"
 
문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익숙치는 않아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나는 목소리였다. 파냐나는 기억을 더듬어 이 목소리가 어제 만났던 자신감
넘치는 소년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다들 무대 정리로 여간 바쁜 게 아니더라구요. 그 덕분에 편하게 오긴 했지만요"
 
"...잘 알겠군. 헌데 무슨 이유로 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조슈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베풀었었던 친절을 갚아 드릴려고 해요.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으신가요"
 
이 소년은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있다. 피냐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이아칸의 수많은 시민들을 상대로 그런 언행을 보일 수도 없었고 지금 이 문 앞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이 소년에게선 근원을 모르는, 하지만 감히 무시하기 힘든 자신감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파냐나는 긴 고민 끝에 소년을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앞으로의 하이아칸 극장가의 판도를 뒤집어 놓는 결정적인 한 수가 되었다.
 
여직원이 갓 우린 차를 놓고 파냐나의 사무실 밖으로 조심스레 나갔다. 조슈아는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고선 천천히 차를 들이켜 맛을 음미했다.
본래 썩 좋아하지는 않는 예절이었으나 현재 상황에서 분위기의 주도권을 휘어잡기 위해선 어느 정도 필요한 수순이라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파냐나는 조슈아의 여유로운 기색을 보면서 과연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재차 실감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내 친절을 갚아 주겠다는 거지?"
 
이럴 땐 당장 본론으로 치고 들어가는 게 중요했다. 조슈아는 차를 조금 더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극장을 빌려 주시죠"
 
조슈아는 곧장 제 본심을 털어 놓았다. 파냐나는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소년은 태연하게 터무니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 설명히 부족했나요. 오늘 당신의 극장에서 상연된 작품을 보면서 제가 조금은 건방진 말을 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인정하죠.
적어도 오늘 상연된 작품 만큼은 제 눈에 들 정도로훌륭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어요"
 
왠일로 조슈아가 한 수 접어주는가 싶었지만 이내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장담하죠. 제 손에서 만들어질 작품들은 지금까지의 상연된 수많은 작품들을 대중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게 할 수 있어요"
 
"그, 그게 대체 무슨..."
 
"방금 말했다시피 이 극장을 잠시만 제게 빌려 주세요. 이 극장은 제가 만들 작품이 상연되기에 적합한 장소 같아요"
 
파냐나는 그제서야 조슈아가 한 말의 뜻을 알았다. 이 소년은 지금 자신과 일종의 거래를 하려는 셈이었다. 이 경우 거래를 제안하는 쪽은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으나 이 소년이 가진 것이라곤 끝이 없는 자신감 뿐이었다. 제아무리 소년이 범인들과 다른 기세를 가졌다 해도
받아드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방금 한 말, 진심인가?"
 
"이런 상황에서 제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조슈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양손을 들며 항복한단 자세를 취했다.
 
"저도 맨 입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조슈아는 종이와 펜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파냐나는 책상에 있던 펜과 종이를 집어 접대용 탁자에 올려두었다. 조슈아는 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다 종이에 한 문장을 재빠르게 휘갈겨 썼다.
 
'깊은 신뢰를 새겨 드리도록 하죠'
 
조슈아는 다시 한번 웃으며 파냐나를 보았다. 이후 조슈아의 손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엔 유려한 필체만이 남아 있었다.
내용을 조금 읽어 보니 조슈아가 쓰고 있는 건 희극 대본이었다. 파냐나는 조슈아가 대본을 다 쓰면 볼 심산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이후의 상황에
어떻게 대비해야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조슈아의 대본 작성 속도가 너무 빨라 그다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받으세요. 가지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읽어볼 수준은 될 것 같네요"
 
조슈아는 순식간에 종이를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파냐나는 이다지도 짧은 시간에 희극의 대본을 한 페이지나 썼다는데 놀랐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조슈아가 건넨 종이를 받았다. 대본을 외워서 쓴 거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슈아가 쓴 대본을 다 읽은
파냐나는 감탄을 금치 않았다. 조슈아가 파냐나에게 보여준 대본은 당장 작품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 누구의 눈도 아닌 이십년이 넘게 하이아칸의 극장가에서 흥행을 놓치지 않은 파냐나의 눈이었다. 그만큼 조슈아의 대본은 훌륭했다. 그것도 모자라 파냐나는 이 대본이
오늘 상연했던 작품의 대본 보다도 대단한 곳이 있음에 감히 부정을 할 수 없었다. 파냐나는 이제서야 조슈아의 자만을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본, 언제부터 구상해 왔던 거지?"
 
파냐나는 탁자를 짚고 조슈아를 가까이 보았다. 조슈아는 돌연 태도를 바꾼 파냐나를 보며 분위기의 주도권이 드디어 자신에게 왔음을 느꼈다.
 
"방금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거예요"
 
파냐나는 기가 찬 나머지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선 조슈아를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눈덩이 굴리듯 커지는 소년의 거짓말에 짓눌려 버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인정하지. 네가 쓴 대본은 확실히 대중의 매력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강하게 서려 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재능을 강조하고
싶나"
 
조슈아는 산뜻한 코웃음을 흘렸다. 딱히 상대방을 비웃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아까 말했잖아요. 전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
 
"정 못 믿겠다면 한 페이지 더 써드리도록 하죠. 아, 작품에 쓰일 노래를 작곡하는 것도 괜찮으시겠죠?"
 
조슈아는 다시 한번 펜을 잡았다. 이후 조슈아의 손이 펜을 놓은 건 파냐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물론 자신이 만족할 수준의 대본과 작곡을 완성하고
나서 였다.
 
그 날 밤, 극장 콜제타의 사무실에선 하이아칸 역대 최고의 배우가 등단할 작품의 기틀이 천천히 잡혀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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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팬픽을 수정해 봤습니다. 저번에 썼던 건 극장주 파냐나를 여성으로 오인하는 바람에 창피해 하면서 순식간에 글을 내렸는데
이번엔 문제되는 게 없었으면 하네요.
 
나머진 시험 끝나고 써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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