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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65.급암.정당시열전(汲黯.鄭當時列傳)
게시물ID : history_204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1
조회수 : 70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23 09:07:45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급암.정당시열전(汲黯.鄭當時列傳)


다시 현명하고 청렴한 관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나라에나 청백리는 있는 법이지만 나라가 어지러울때는 그러한 관리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법이다.

한나라가 창건된지 수십년이 되어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이제 무신들보다 문신들의 현능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불편해 할정도로 강하게 아뢰었고

같은 반열의 공경들도 두려워 할만큼 위엄은 높았다.

 

의관을 바로하고 조정에 서면 뭇 신하들이 감히 경솔하게 말하지 못할정도였다.

급암의 위엄은 그 정도였다.

 

정당시는 인물을 추천하는것을 즐겨 덕있는 사람이라고 칭송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그만한 기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충신들을 사직지신이라 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사직지신에 해당 할것이다.

이제부터 급암과 정당시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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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관립우조정 이군신막감언부설(正衣冠立于朝廷 而群臣莫敢言浮說)


급암(汲黯)의 자 는 장유 라 하며 복양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옛적에 위(衛)나라 군주에게 대대로 총애를 받던 집안이었다.

그로부터 급암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경과 대부의 신분을 유지해온 명문이었다.

 

대신이었던 아버지의 직급을 이어받아 효경제때 태자의 세마가 되었다.

급암의 위엄있는 태도는 항상 주위를 압도했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황태자가 효무제로 즉위하자 급암은 알자가 되었다.

 

그무렵 절강성 방면의 동월족이 동족상잔하여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효무제는 급암을 파견했다.

 

그때 급암은 동월까지 가지 않고 오나라 까지만 갔다가 돌아와 보고했다.

"월나라는 평소에 서로 싸우는것이 습성일 뿐이니 천자의 특사를 번거롭게 할 만한일이 못됩니다."

 

그뒤 하내에 큰 불이 일어나서 1천여 가구가 불탄 사건이 있었다.

이때도 황제가 급암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는 귀환하여 이렇게 보고했다.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에 민가에서 실화되어 불탔을 뿐이므로

우려할만한 일은 아니라 판단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우려할일은 제가 하남을 들렀을때 그들은 수해와 한해를 동시에 겪어

이재민이 1만여 가구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부자간에 서로 양식을 약탈할 정도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이에 저는 황공하오나 긴급명령을 내려 천자의 사자로서

하남의 창고를 열어 곡물을 방출해 빈민을 구제 했습니다.

이제 사자의 부절을 돌려드리고 칙령을 변경한 죄를 받고자 합니다."

 

효무제는 급암의 처사가 현명하다 하여 죄를 용서하고 형양의 현령으로 전출 시켰다.

급암은 현령이 된것을 부끄러워 하여 병이라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효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 중대부로 임명했지만

대신들이 그가 너무 지나치게 황제에게 간한 일이 좋지 않다하여 동해군 태수로 전출 시키도록 했다.

 

급암은 황제.노자의 학설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관민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청결하고 조용한것을 좋아하는 성품대로

속관들과 서기들이 적절한 인재를 골라 일을 할수 있도록 유도했다.

한마디로 그의 통치방법은 커다란 줄거리만 잡아주고

소소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체질이었다.

 

급암은 병이 많았다.

그래서 한해 남짓이나 병상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치적은 크게 알려져 세상에서 칭송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효무제는 그를 불러 구경의 서열인 주작도위에 임명 했다.

 

그의 통치방식은 무위를 위주로 하면서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을뿐 아니라

커다란 줄거리만 파악하면서 법률조문에 구애받으려 하지 않았다.

 

급암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예의를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았다.

면전에서 사정없이 남을 공격해 허물을 관용할줄 몰랐다.

그래서 자기와 의견이 맞는사람은 잘 우대하면서 맞지 않는 사람은 보기조차 싫어했다.

그 때문인지 그를 추종하는 선비들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기절을 중요시했다.

품행이 방정하고 결백하면서 직간하기를 좋아해 천자가 낯빛이 변하든 말든 언제나 태연했다.

 

그는 부백이나 원앙같은 인품을 흠모했다.

그래서인지 관부나 정당시,또 종정인 유기 와는 사이가 좋았는데

어차피 그는 자주 직간하는 버릇때문에 오랫동안 일정한 관위에 머물러 있지를 못했다.

 

당시에 황태후의 동생 무안후 전분이 승상으로 있었다.

그의 직위와 위세는 대단했다.

중이천석의 대신이 와서 배례해도 전분은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했다.

그러한 전분에게 급암은 배례는 커녕 가볍게 읍할 뿐이었고

그런 급암에게 전분역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황제가 급암을 불러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는 인의의 정치를 부활시키기 위해 요순을 본받으려 하는데.."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암이 쏘아붙였다.

"폐하께서는 속으로 욕심이 많으시면서도 겉으로는 인의를 베푸시겠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요순의 정치가 될것 같으십니까?"

 

황제는 대꾸를 못할정도로 무안하고 분노하여 조회를 파해버렸다.

 

궁에서 물러나오면서 주변의 대신들이 급암을 걱정하여 타일렀으나 급암은 굽히지 않고 대답했다.

"황제께서 잘 보필해 달라고 공경대신들을 두었는데

어찌 신하된자가 아첨으로 폐하의 뜻만 받들어 불의에 빠지게 할수 있단 말이오?

무릇 높은 지위에 앉은 신하라면 자신의 몸이 애석하게 될지라도 조정을 욕되게 하지 않는법이오."

주위의 대신들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모두 물러갔다.

 

황제는 매우 노하여 퇴정했으나 오히려 주변 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급암의 우직함이 좀 심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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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은 병이 많았다.

3개월마다 휴가를 얻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면직시키지 않고 언제나 휴가를 주었다.

 

다시 병이난 급암을 위해 장조가 휴가를 대신 주청하려고 효무제를 만났다.

그때 효무제가 장조에게 물었다.

"급암은 어떤 인물인가?"

"급암을 보통 벼슬자리에 앉혀 놓으면 특별히 남보다 나을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어린 군주를 보필할경우

그는 성을 굳게 지키며 어떤 좋은 조건으로 누가 그를 불러도 떠나지 않을것입니다.

옛날 맹분이나 하육같은 용자라도 그의 절조를 뺏을수는 없을것입니다."

 

"옳도다!

그는 그런 사람이오.

사직지신이 있다면 바로 급암같은 인물을 말하는 것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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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위청이 궁중으로 황제를 뵈러 가면 효무제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를 만나는수가 있었다.

승상 공손홍이 사적 용무로 뵈러 갔을 경우에도 효무제는 관을 쓰지 않은채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급암이 알현하러 왔을때의 황제의 태도는 달랐다.

 

언젠가 효무제가 무기진열실 안에 있었는데

급암이 상주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여 얼른 장막뒤로 몸을 숨기고 측근의 시자에게 말했다.

"어서 관을 가져오라."

급암이 존경받는 정도가 이러했다.

 

장탕이 법령을 개정한 공로로 정위가 되자 급암은 면전에서 이렇게 비꼬았다.

"정경의 벼슬에 있는자라면 마땅히 위로는 선제의 공업을 확충하고

아래로는 천하의 사악한 인심을 눌러 국가를 평온케 해야하는 법이거늘

그대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지도 못했고 감옥이 텅비도록 하지도 못했으면서

옛 제도를 파괴하여 공을 이루었으니

그대는 이 일로 인해 멸족의 화를 입을것이오."

 

급암은 장탕과 자주 논쟁했다.

그러나 장탕은 법조문에 밝고 논리 정연했으므로

급암의 이상주의적 변론으로는 장탕을 이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항상 논쟁에 밀린 급암은 분통을 터뜨리며 장탕에게 마구 퍼붓곤 했다.

"자고로 도필리를 공경의 지위에 두면 큰일난다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다.

천하의 백성들이 불안하여 주춤거리고 곁눈질로 눈치를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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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한나라는 흉노를 정벌하고 사방의 이민족을 회유하기에 바빴다.

급암은 한가할 때마다 황제에게 이렇게 간했다.

"흉노와는 가급적 화친하고 병사를 일으키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별로 따르지 않았다.

 

황제는 유학에 마음이 쏠려 있었으므로 공손홍을 존중했다.

법령이 복잡해지면서 관리나 백성들이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일이 많아지자

효무제는 법령을 더욱 세밀히 하여 이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에 공손홍.장탕등은 수많은 판례를 만들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화가치민 급암은 공손홍과 장탕에게 대놓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공손홍 너는 지혜도 없는것이 부질없는 속임수로 군주에게 아첨해 환심이나 사려하고 있다.

더구나 장탕 너같은 도필의 말단관리가 법률 몇개 안다고 해서 백성들에게 교묘하게 적용해

비정하게 죄에 빠뜨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본래의 진실된 마음으로 돌아가려는 길을 막아버리고있으니

그대는 백성들에게 이기는것을 무슨 큰 공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함에도 효무제는 공손홍과 장탕을 우대하였고 급암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손홍과 장탕은 속으로 급암을 몹시 미워했으며

급암을 귀찮게 여긴 황제는 무슨 일만 생기면 그를 제거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공손홍이 승상이 되자 그는 황제에게 이렇게 간했다.

"우내사의 통치구역안에 귀인과 황족들이 많이 살고 있어 웬만한 인물로는 그들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중신이라야 그들을 감당할수 있을듯 하니 급암을 우내사로 전출시키는것이 좋겠습니다."

 

간계에 의해 급암은 우내사가 되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났건만 급암은 용의주도하게 관직에 충실했으므로 아무일도 없었다.

 

위청은 대장군이 되면서 더욱 존귀해 졌고

그의 누님또한 황후가 되었기때문에 그의 위세는 더욱 대단했다.

그러나 급암은 위청에게 대등한 예로 대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급암에게 충고했다.

"대장군은 더욱 귀해졌으며 또 존중되어야 합니다.

황제께서는 모든 신하들이 대장군에게 몸을 굽힐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니 당신도 그에게 배례하십시오."

 

그러나 급암은 딱 잡아뗐다.

"나는 싫소.

대체로 대장군 앞에서도 배례치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대장군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겠소?"

 

대장군 위청이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생각해보니 급암의 태도가 오히려 사려깊고 현명하다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위청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나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급암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더욱 급암을 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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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왕 유안이 모반을 기도했다.

이때 유안은 급암이 가장 거리꼈다.

그래서 이렇게 한탄했다.

"급암을 유혹하기는 어렵다.

승상 공손홍 정도야 새싹을 잘라내고 마른잎을 흔들어 털어내는 일처럼 유혹하기 쉽지만

직간을 즐겨하는 급암은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는 인물이니

그를두고 어떻게 해 본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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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제때는 자주 흉노를 공격해 꽤 많은 재미를 보았다.

그렇게 되자 흉노정벌을 반대해온 급암의 말은 더욱 듣지 않게 되었다.

 

처음 급암이 9경의 서열에 있었을때 공손홍과 장탕은 하급관리였다.

그러나 공손홍과 장탕등은 점차로 승진하여 급암과 동등한 서열까지 올랐다.

그렇지만 급암은 그들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공손홍은 승상 자리에 올라 봉을 받고 후가 되었으며

장탕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다른 하급관리들도 급암과 동급이 되거나 더욱 중용 되었다.

급암에게는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수 없었다.

"폐하께서 신하를 등용하는 방법은 마치 장작을 쌓는것과 같습니다.

나중 온사람을 위에 놓으시니 말입니다."

 

말없이 듣던 황제는 급암이 물러간뒤 이렇게 말했다.

"역시 사람은 학문(유학)이 있어야 한다.

급암의 얘기(도학)를 들어보니 날이 갈수록 억지가 심해지는구나."

 

얼마후 흉노의 혼야왕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겠다는 통지가 왔다.

그런데 그들을 수송해 오자니 수레가 무려 2만대나 필요했다.

한나라는 거마 2만 승을 지방 관아에서 징발하려고 했으나

현청에 예산이 없어 백성들로부터 빌리려고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말을 숨겼으므로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했다.

황제가 노하여 장안령을 참수하려고 했다.

이에 급암이 말했다.

"장안령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차라리 그의 상관인 저의 목을 베십시오.

하물며 자기 군주를 배신하고 투항해오는 흉노따위를 무슨 큰 칙사대접을 해며 맞이한단 말입니까?

현에서 현으로 서서히 호송하여 전하면 될 일임에도 천하에 영을 내려 소동을 일으키고

중국을 피폐하게 하시는것은 옳지 않습니다."

황제는 대꾸가 없었다.

 

혼야왕 일행이 장안에 도착 했다.

장삿군들이 법을 어겨가면서 이들과 물건을 사고 팔았다.

한나라에는 적국과는 거래를 할수 없다는 금령이 있었기 때문에 붙잡힐경우 사형에 해당 되었다.

그로인해 체포된 상인이 5백명이나 되었다.

급암이 이 소식을 듣고 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미앙궁의 고문전으로 올라갔다.

"흉노가 먼저 화친을 끊고 우리 북방의 요새를 공격했기 떄문에 중국도 군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로인해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비용 또한 수백만이 들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폐하께서 얻으신 흉노들은 전쟁에 나가 죽은자의 가족에게 노비로 하사하시고

노획한 재물 역시 그같이 주어 천하의 괴로움에 보답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실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혼야왕이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오자

국고가 텅비도록 오히려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또한 양민을 징발해서 그들에게 봉사하도록 하고 있으니

이를두고 비유하자면 망나니 자식을 섬기는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제 우매한 백성들이 장안의 물자를 흉노에게 팔았다 하는데

이를두고 법관의 눈으로 보면 죄가 될지 모르나 백성들이야 어찌 그런 법을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무지한 백성들을 5백명 씩이나 죽여도 좋다는말씀이십니까?

이는  그 잎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를 상하게 하는 격이니 저는 폐하를 위해 이 일에 찬동할수 없습니다."

 

황제는 묵묵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일수 없다.

한동안 말없이 잠잠하기에 심신이 건강해 진줄 알았는데

오늘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여전히 망령된 소리를 하는구나."

 

그후 수개월후에 급암은 사소한 법에 걸렸다.

벼슬을 내 놓고 시골에 가서 숨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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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가 지났을때 나라에서는 오주전을 새로 발행했다.

그런데 백성들이 멋대로 위조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초나라 지방에서 가짜돈이 가장 많이 나돌았다.

 

황제는 회양이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하여 급암을 불러 회양태수로 제수하였다.

급암이 엎드려 빌며 인장과 인수를 받으려고 하지 않자 여러 번 강제로 조칙을 내려

그때서야 비로소 조칙을 받들었다.

조칙에 따라 황제를 배알하게 된 급암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스스로 시골에서 천하게 살며 폐하를 다시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뜻하지 않게 폐하께서 저를 다시 등용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항상 병이 있어 군현의 일을 보살필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옵건대 중랑이 되어 대궐을 출입하면서 과오를 보충하며 빠진 것을 줍게 하십시오.

이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황제는 급암의 소원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대는 회양의 태수자리가 미미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짐은 머지않아 그대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올리겠다.

다만 지금은 회양군의 관리와 백성이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점이 짐의 마음에 거리끼고 있다.

그래서 짐은 그대의 위엄을 빌어 그대가 자리에 누워서라도 한번 회양을 다스려 달라는것이다."

 

급암은 할수없이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회양으로 떠나기전에 대행 이식을 찾아가 만났다.

"나는 폐하로부터 버림받아 지방으로 가게 되었으니 조정의 회의에서 공을 만날수가 없게 되었소.

그런데 어사대부 장탕의 지혜는 충성스런 말을 가로막기에 족하고

그의 간교한 말솜씨는 그른것을 옳다고 꾸며대기에 충분하오.

그러한 재능으로 천하를 위해 바른말을 하지 않고 오로지 폐하의 비위만 맞추려 하며

주상을 조정하며 잔인한 관리들을 끼고앉아 자신의 권위만 높이려 하는자요.

그대는 지금 마침 구경의 반열에 올라있으니 조속히 그 폐해를 폐하께 말씀드려 주시오.

명심하기 바라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도 반드시 장탕과 함께 처형당하게 될것이오."

 

이식은 명심하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그러나 장탕의 세력이 두려워 감히 급암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급암은 회양태수로 부임했다.

그는 전날 동해군 태수로 있을때처럼백성들을 다스렸다.

회양은 잘 다스려지고 정치는 맑고 깨끗해졌다.

 

후일 장탕은 과연 망했다.

황제는 이식이 급암의 충고를 아뢰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식 역시 처벌해 버렸다.

황제는 또 급암에게 제후의 재상이 받는 녹을 주어 회양군 태수로 살게했다.

그후 7년이 지나서 급암은 사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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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시(鄭當時)의 자 는 장 이며 진(陳)출신이다.

그의 선조 정군은 일찌기 항우의 장수였으나 항우가 죽자 한나라로 귀속해왔다.

그때 고조유방은 항우의 신하였던 사람들에게 항우의 이름을 마구잡이로 부르게 해서

이름을 부른자는 대부벼슬을 주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는자들은 내쫓아 버렸다.

정군은 항우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가 얼마후 죽었다.

 

효문제때 정당시는 협객으로 자처하며 지냈다.

양나라 효왕의 장군이며 초나라 재상의 아우인 장우를 재난에서 구출한 사건으로

정당시는 양.초 두 나라 사이에서 그 명성이 드높았다.

 

정당시는 효경제때 황태자의 사인이 되었는데

뜻한바가 있어 닷새마다 돌아오는 휴가일에는 언제나 역마를 장안의 교외에 배치해두고

옛 친구를 찾아다니든가 빈객들을 초청해 밤을 새워 대접했다.

그러면서도 골고루 찾아보지 못할까 노심초사 했다.

 

정당시는 황제.노자 의 학설을 좋아해 덕있는 사람들을 사모했으며

그런 유덕자들을 못만나면 안절부절 하였다.

그러다보니 비록 그의 나이는 젊고 벼슬은 낮았지만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할아버지뻘의 연배였고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효무제가 즉위하자 정당시는 점차로 승진해 노국의 중위.제남태수.강도국의 재상이 되더니

결국 구경의 반열에 올라 우내사가 되었다.

그러나 무안후 전분과 위기후 두영의 다툼에 끼어들었다가 첨사로 강등되더니

다시 대농령으로 금새 승진했다.

 

정당시는 대신으로 있을때 자기 문하사람들에게 자주 다음과같이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말고 영접하라."

 

그는 존귀하면서도 남에게 겸손했다.

청렴하여 재산을 쌓으려 하지 않았고 봉록이나 하사품을 받게되면 여러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기에 남을 대접할때도 대나무 그릇에 담긴 식사가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그의 대접을 기쁘게 생각했다.

 

그는 조회에 들어가 황제가 한가하다고 생각되면 천하의 덕있는 사람에 대해 반드시 얘기했다.

그가 선비와 관속과 서기관등을 황제에게 추천할 경우에 그의 태도는 볼만한것이 있었다.

그는 사람을 추천할때 자신보다 현명하다는것을 언제나 실례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관리들의 이름을 한번도 함부로 부른 일이 없었다.

그는 남이 누구를 칭찬하면 즉시 황제에게 달려가 그것을 아뢰었고

그러면서도 너무 늦게 오지 않았는가 염려했다.

이러한 그의 사람됨 때문에 산동의 선비들과 유력인사들이 한결같이 정당시를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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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황하의 둑이 무너진 일이 있었다.

황제는 정당시에게 현지를 시찰하도록 명했다.

그때 정당시는 황제에게 "닷새만 말미를 달라."고 청했다.

황제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ㅡ내가 듣기에 '정당시는 천릿길을 가도 먹을것을 준비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무엇때문에 닷새의 여유가 필요할까?ㅡ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하고 사방의 만이를 회유하느라고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는사실을 황제는 모르고 있었다.

 

정당시는 평소에 옳고 그른것을 따지지 않고 항상 온화한 태도로 황제를 대했다.

그래서 나라의 사정이 악화되자 먹을것을 챙겨서 여행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 닷새의 말미를 청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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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시가 대농령으로 있을때 빈객을 위해 빚보증을 서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빈객이 도저히 갚을수 없을만한 빚을 지고 도주하여 수배령이 떨어졌다.

회양태수 사마안이 이 사실을 밝혀내자 정당시는 죄를 입어 속전을 물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황제는 얼마후 정당시를 장사 로 복직 시켰다.

황제는 정당시를 좋은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당시가 노쇠하자 황제는 그를 여남군 태수로 전출 시켰다.

정당시는 몇년후에 재직중에 사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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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시와 급암은 구경의 서열에 올라 있으면서도 항상 청렴 결백했으며

행실도 방정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은 중간에 파면이 되자 집이 가난해 질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니 빈객들도 자연히 흩어질수밖에 없었다.

또한 태수로 있다가 죽은 후에도 남아있는 재산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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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급암이나 정당시같이 현명한 사람도 세력이 있을때는 빈객들이 많다가

세력을 잃자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물며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규의 적공은 이렇게 말했다.

ㅡ내가 처음에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문전에 가득했는데

벼슬이 떨어지니 대문에 작라를 칠정도로 한산해 졌다.

그런데 다시 정위가 되니 빈객들이 다시 몰려오길래 나는 대문에다가 이렇게 써붙였다.

<한번 죽었다가 한번 살아나서 사람의 정을 알게 되었고

한번 가난해 졌다가 한번 부유해져서 사람 사귀는 태도를 알게 되었고

한번 부귀했다가 한번 빈천해지자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급암이나 정당시에게도 이런 말이 해당 될 것인즉 슬픈 일이 아닐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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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급암과 정당시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 보았다.

급암이나 정당시나 조정에 서면 황제에게 바른말로 간언하고

물러나 지방의 관리가 되어서는 백성을 다스림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러한 신하들을 멀리하여 지방으로 발령하고

주변을 말 잘하고 아첨하는자들로 채웠다.

 

급암은 이러한 시기에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강한 어조로 황제를 간하였고

정당시는 조용한 어조로,그러나 바른 행동으로 황제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다.

 

이 두사람은 행동에는 차이가 있으나 진심에서 나오는 충성은 다르지 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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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두사람은 언뜻 보아 비슷한 충신이기는 하나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두사람이 꼭 같은 길을 걸어온것 같지는 않다.

급암이야 원래 명문가에서 나고자라 그 가문의 후광으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러다보니 자연 자신의 기개나 자부심이 높았을것이니

조정의 대신들과 어울림에 있어서도 자신과 비슷한 무리들과 친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묘한 말로 황제에게 아첨하여 출세길에 오른 공손홍이나 장탕등을 미워하였을것이고

자신은 황제에게 아첨하지 못하여 점차 권력에서 멀어지기까지 하는등

스스로의 기질에 기인한 경로를 걸어간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당시는 고조에게 아첨하지 않는 조상의 후손으로 나고자라 자신의 능력으로 출세의 길에 올랐다.

운 좋게 태자의 사인으로 발탁되어 그 태자가 황제가 되고

그에따라 자신도 점차 승진하여 대신의 반열에 올라갔다.

 

그러나 정당시는 일찌기 자신이 뜻한바가 있어 명사들을 찾아다니고 빈객을 우대하였으며

남을 칭찬하는 태도로 명성을 쌓아 올렸으니

이는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나쁜일이라고 폄하 할수는 없겠으나

한편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반드시 덕있는 사람의 행동이라 말할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가 남의 보증을 서 주었다가 삭탈관직이 된 이야기로 미루어 볼진대

그가 정말 아무 사심 없이 그렇게 큰 빚보증을 해주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하나 사마천은 ㅡ그가 죽은 후 남아있는 재산이 없었다ㅡ고 했으니

오로지 요즈음의 썩은 세태와 견주어 그때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필자만의 속된 의심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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