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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을까?
게시물ID : sisa_5886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생생이
추천 : 1
조회수 : 104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4/23 13:41:41

김정훈쌤 책 표지.jpg


흥미로운 책이 있어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해볼까 합니다. 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을까?(김정훈, 2015, 글바당, 14000)라는 책입니다. 노무현과 안철수를 중심주제로 다루는 책은 아닙니다. 노무현과 안철수라는 인물로 상징적으로 보여지는 현 시대의 새로운 조건들과 새로운 주체들과 관련한 정치사회학 대중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약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현실 분석들이 빠지게 되어 흥미가 덜할 수도 있겠습니다. 편의를 위해 아래부터는 존대를 하지 않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스크롤 압박이 심한 점도 유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의견은 들어가 있지 않으며 할 수 있는 한 책의 내용에 충실하여 요약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책을 쓴 김정훈은 기존의 한국사회 분석들이 대체로 비관적인 것에 반하여 현실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며 이를 창조적 진보세대의 탄생이라는 주장을 통해 개진한다. 필자에 따르면 창조적 진보세대는 합리성, 다양성, 창조성을 가진, 또한 보편적 복지와 공정경쟁을 선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개인화되는 조건 속에서 사회적 다양성자기표현과 자기실현의 가치를 중시하며 인터넷 공간을 통해 연결되어 기존과는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으며, (새로운) 상식, (경제적) 정의, (새로운 사회구성원리로서의) 공유라는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들의 이익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창조적 진보정치세력이 나타나면 한국사회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1. 바뀐 세상, 새로운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논다 혹은 즐긴다의 의미는 죽도록 노력하면 성공한다의 다른 버전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의 의미이다.” 하지만 즐기다 보면 노력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말 자체는 현 시대의 중요한 원리와 관련된다. 노력 대 즐김, 금욕 대 쾌락, 자기 절제의 가치 대 자기 실현의 가치의 대립 속에서 시대는 점차 후자로 넘어오게 된다. 서구의 경우 1960년대 이후 욕망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는 자기실현의 가치가 대세가 되었고 현재의 한국 역시 그러하다. 자아실현, 자기결정은 근대성의 중요한 핵심이다. 하지만 즐김과 쾌락이 자기실현이 아니라 자기절제라는 과거의 원리로 포획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기 절제의 현대적 버전이 자리관리’”가 된다.


즐거움 없이 노력하기 힘들고, 노력 없이 성취하기 힘들다. 이것이 노는 것이 힘인 진정한 이유이다.” 이는 창조성과 관련된다. “문화적 다름에서 출발한 새로운 가치가 이제 경제적 다름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어느새 그것을 억압했던 자본주의의 엔진이 되어버렸다. “경제는 점점 더 창조성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생각이 현실이 되는 세계에서는 창조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하게 된다.” 이미 시대의 원리가 된 이러한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들을 치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창조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성권력은 여전히 새로움과 다름을 억압한다.


잉여짓은 높은 실업률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내재적 동기에 의한 즐거움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최초의 놀이, 최초의 발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잉여는 창조적 인강형이고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쓸모없게 여기는 사회구조가 문제이다. 노는 일 혹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들은 개인화와 새로운 네트워크적인 관계와 관련이 있다. 인터넷의 발전에 의해 개인화가 추동되었고 가속화되고 있다. 기존의 친밀한 관계였던 가족과 같은 범주의 친밀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관점도 있지만 실제로는 관계들을 다양화하고 있거나 강화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화 되지만 연결되어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사회자본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기제인 자발적 결사체, 즉 조직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천이었지만, 탈산업사회와 그와 어울리는 자기표현적 가치의 시대에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개인들이 민주주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인터넷 공간의 다양한 커뮤니티들을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창조성은 진보와 관련되어 있다. “창조의 뿌리는 진보이다.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며 기존의 것을 갈아치우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현 시대의 창조는 공유와 개방의 정신과 관련된다. “창조적 인간들이 만들었으며 또한 창조적 인간을 형성시킨 인터넷 문화 역시 기존의 권위에 대한 저항이 그 뿌리이다.”

 

창조적 개인 혹은 천재는 사회가 키우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 두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1]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기 일에 대한 집중이라는 자존감이 없이 창조적 개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2]공평한 기회이다. 이것의 제도적 기반은 복지국가와 공정한 경쟁이다.

 

 

2. 창조적 진보세대의 탄생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전환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의 당선은 시대적 변화의 산물이며 이는 새로운 세대들의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1] 상식. 반칙과 특권이라는 비정상의 상태를 상식과 원칙이라는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소통. 이는 권위주의의 해체를 의미한다. 전자는 민주화시대의 요구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정보화시대의 요구의 표현이다.

 

일단 독재 이후의 정권 변화에 따른 한국사회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영삼은 탈군부화를 이루었고, 김대중은 탈분단화를 이루었고 노무현은 탈권위주의화를 이루었다. 특히 김대중의 탈분단화는 반공주의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우리 의식의 정상화, 즉 상식의 회복을 의미했으며 신성한 것으로 인식되던 권력의 세속화를 의미했다. 노무현은 세속화된 보수의 핵심 지배논리인 권위주의를 해체함으로써 정보화시대의 정상적 논리를 형성했다. ‘이러면 막가자는 겁니까?’라는 노무현의 말은 검찰의 권위를 주어지는 것에서 토론되는 것으로 끌어내렸다. 노무현 이후 적어도 상식선에서 성역은 없는 것이다. 노무현의 막말을 비난했던 보수언론은 막말로 먹고 살며 이는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의 해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상식은 탈반공주의, 탈권위주의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과거에는 보수세력이 보수언론을 통해 정보와 여론 주도 능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인터넷 등장 이후 여론주도력과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공론장의 독과점이 해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참여와 토론에 기반한 공론장의 이상을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2040세대는 인터넷 발전과 함께 상호신뢰, 호혜성, 민주적 토론 같은 민주적 규범을 배웠다. 인터넷공간은 한국 근대에서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나타난 반권위주의적이며, 비연고주의적인 공간이다. 이처럼 인터넷 공간은 상식의 변화를 추동했으며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핵심적인 문화적 변화이다. 나꼼수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재미의 중요성이다. 나꼼수 현상 그리고 정치풍자의 인기의 원인은 풍자라기보다는 직설솔직함에 있다. 체면 차리며 돌려말하는 것 보다는 자기표현에 솔직한 자기실현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청중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표현과 권위의 해체라는 근본적인 가치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자기억제의 시대에서 자기실현의 시대로의 시대전환은 돌이킬 수 없는 문화적 변화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창조세대가 창조적 진보세대가 된 정치적/경제적 조건은 다음과 같다. “문화적 자유주의의 시대는 한편으로 민주정부 10년이라는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와 동시 진행되었다.” 이명박 정부를 겪으면서 창조세대들은 양극화와, 불공정 경쟁이, 갑을 위한 사회가 자기실현을 못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진보화 되었다. 핵심 프레임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정보화로 인해 탄생되었던 창조세대가 경제적 진보의 가치와 결합된 원인은 구조적인 원인인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정치적인 계기인 무상급식 논쟁이다. 젊은세대는 이러한 과정에서 인터넷 공간을 매개로, 자기실현의 가치를 바탕으로 진보화되었다. 젊은세대가 진보를 지향하는 이유는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젊은 세대들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지향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창조적 진보세대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창조적이며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자기실현이 중요하다. 문제는 대중은 정보화사회에 살고 있는데 보수는 독재시대에, 진보는 그 맞은편인 민주화운동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3. 보수는 염치가 없고 진보는 눈치가 없다

 

이명박 정부 때 정권에 대한 비판이 과거의 반민주성에 대한 비판 혹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음혹은 제멋대로임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된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이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면 정권의 개념과 대중들의 개념, 즉 상식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식은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으로서 평등한 능력주의, 공정경쟁과 같은 것이다. 반칙과 특권 속의 보수의 권위주의는 무개념인 것이다.

 

보수 자신들의 성역 방어 논리는 빨갱이’, 현재는 종북으로 표현되는 반공주의이다. 한국식 반공주의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논리가 아니라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논리이다. 이념의 옳고 그름이 판단기준이 아니라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의 기준이 중요하기 때문에 적은 그냥 모두 빨갱이가 된다. 이러한 인식은 이제 비합리적인 무개념으로 인식된다. 보수정권은 참을 수 없을만큼 촌스럽고 무능하다.

 

1990년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자민련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만드는 ‘3당 야합사건이 일어난다. 이들의 정당화 논리가 보수대연합이다. 이들의 논리적 근거는 민주화로 인해 민주/반민주 구도는 해체되었으니 이제는 서구처럼 정책과 이념에 따른 정당경쟁을 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보수/진보의 정당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민주/반민주라는 정상/비정상프레임을 이념프레임으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정상세력으로 격상시키고 상대세력을 보편적인 세력에서 상대적인 세력으로 격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대 친북주의, 체제수호세력 대 체제전복세력이라는 가짜 이념프레임으로의 전환을 추구한 것이다. 이들은 반공주의, 귄위주의, 식민주의, 지역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정의하고 보수주의라 명명했다.

 

반면 김대중 정권은 진보세력에게 민주평화세력이라는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프레임은 귄위주의, 반공주의를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경제정의를 포함하지는 못했다. 정치는 민주화되지만 경제는 자유화되는 민주화의 역설이 발생한다. 경제는 재벌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로 상징된다.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은 재벌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것의 사회적 결과는 양극화였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고정된 보수/진보프레임은 대중들의 삶의 질이라는 문제를 정치의 핵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이 핵심적인 문제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첫 번째로 중도는 없다. 다양한 정체성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의 전제인 자유주의가 없고, 불공정 경쟁이 오히려 태반이며, 지연, 혈연, 학연의 연고주의가 성공의 전제조건이 되는 나라에서 정책적 중도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이나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증오시대에 종언으로 고하자며 갈등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데 이는 반정치적인 것이며 반민주적인 양비론의 관점이자 현상유지의 논리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말자는 논리이며 기존 기득권 구조를 옹호하는 논리이다. 중요한 것은 비전이다.

 

민주화와 정보화로의 변화로 인해 나타난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세력, 혹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새로운 대안정치세력과 만날 때 오래된 구시대의 증상으로서의 증오 정치는 말 그대로 종언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4. 진보정치의 재구성

 

해결의 출발점은 대중들의 요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는 갈등을 잘 드러내야 한다. 대안은 보수/진보를 대체하는 새로운 프레임을 찾거나 혹은 기존의 보수/진보 프레임이 품고 있었던 갈등을 현실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에서 보수/진보 프레임에 더하여 상식/비상식의 프레임이 필요하다.” 후자의 관점에서 진보에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아야 한다. 현 시대에 맞는 진보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는 새로운 대중들의 상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첫째로 다룰 것은 정치적 진보이다. 친북/반북, 종북/반북 프레임은 반공규율사회의 산물로써 한국전쟁과 독재로 인한 반공이 내면화된 사회를 경험한 대중들에게 효과적인 프레임으로써 기득권집단의 정권유지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이를 박근혜로 대표되는 안보보수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경제를 내세우는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시장보수와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박근혜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진 것, 다음 선거에서 안보 프레임이 아니라 경제민주화 프레임으로 당선된 것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계가 노정된 것이다.

 

진보는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보수/진보를 봉쇄=모험/관리=안정프레임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보수세력은 북한 봉쇄정책을 통해 남부충돌의 위험을 만드는 세력이며, 진보세력은 남북관계의 충돌을 반대하며 평화를 정착시키고 안정을 보장하려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 경제의 제2의 도약, 나아가 남북의 공동번영이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박근혜식 흡수통일대박론이 막대한 통일비용지불로 인한 통일쪽박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국정원 댓글사건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총체적인 대선개입과 신문, 지상파, 종편으로 이어지는 일방적인 언론현실은 선거민주주의 자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저항이 폭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중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정치의 문제이다. 개인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민주주의, 즉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새로운 대중들의 바람이다. 진보세력은 집단주의적 민주주의, 재미없는 민주주의를 고수하지 말고 다양성과 개성이 가득 찬 새로운 대중이 원하는 민주주의를 추구할 때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저항이 폭발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두 번째로 다룰 것은 경제적 진보이다. 문제는 경제적 양극화이다. 이에 대한 극복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경제민주화이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논쟁은 두 가지 갈등을 포함한다. 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와 공정/불공정의 갈등이다. 전자의 문제의식은 소위 범진보세력의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재벌로 상징되고 갑질 등으로 표현되는 후자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앞서 간단히 살펴봤듯이 신자유주의는 민주정부시기에 도입되어 받아들여졌다. 이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더욱 밀어붙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보수세력이 더욱 원하던 것이다. 그리고 급진진보세력이 민주정부를 경제적으로 진보적이지 않다고 선을 긋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민주정부시기에 이루어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한 원리로써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과잉경쟁과 과소경쟁이 중첩되어 있는 사회이다. 기득권집단에게 한국사회는 과소경쟁사회이지만, 비기득권집단에게 한국사회는 과잉경쟁사회이다. 따라서 이미 과잉경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쟁, 자율, 선택 같은 단어들은 기득권층의 과소경쟁을 해체시킬 수 있는 개념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별 혜택도 주지 않는 국가관료제나 공기업, 경쟁과는 무관한 독점 재벌들에게 공정한 경쟁을 강요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돈이나 빽이 필요 없이 능력만이 중시되는 사회를 이루는 이념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1997IMF외환위기 시기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효율성과 재벌의 투명성을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과소경쟁이 이루어지는 부분은 학연, 혈연, 지연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를 해소할 원리로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의 열망은 공정한 경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재벌의 무기가 되었고 비기득권집단의 과잉경쟁은 비정규직 문제와 같이 더욱 과잉경쟁상태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한국의 경제구조 문제는 재벌로 대표되는 불공정 경쟁 문제와 신자유주의에 의한 양극화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벌의 불공정경쟁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불공정 거래는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을 넘어 한국 경제의 성장마저 가로 막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이고 불공정한 경제를 지속시키려고 하는 세력이 보수라면, 반신자유주의이고 공정경쟁을 회복하려는 세력이 진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경제, 창조사회의 전제조건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이다.

 

세 번째로 다룰 것은 문화적 진보이다. 이 부분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타파해야 할 대상은 혈연, 학연, 지연으로 구성된 연고주의이다. 이는 근대적 사회구성 원리인 업적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 ‘고소영’, ‘영포회’, 박근혜 정권의 가신 그룹’, ‘7인회’, ‘만만회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사회는 모든 영역들을 관통하는 연고주의 엘리트로 연결된 사회이다. 한국사회는 조폭의 논리로 구성된다.

 

이러한 연고주의적 주체에 대립되는 새로운 주체는 SNS로 무장한 네트워크적 주체이다. 사이버 공간은 평등을 전제하며 관심에 따라 관계를 맺고 논리를 통해 설득한다. SNS에서는 시혜가 아니라 호의가 교환되고 충성이 아니라 신뢰가 제공된다. SNS를 통해 합리성과 호혜성을 교환하는 새로운 대중이 형성된 것이다. “비록 한 개인으로 보면 연고주의적 정체성과 네트워크적 정체성이 혼합되어 있고, 연고주의적 주체가 장악한 조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의 공간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고,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러한 정체성을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대중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연고주의적 주체는 경제적 합리성만 추구하지만 네트워크적 주체는 소통적 합리성도 추구한다. 연고주의적 주체는 외적 규제와 물질적 보상에 민감한 반면, 네트워크적 주체는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을 중시한다.

 

이러한 네트워크적 정체성을 가진 세력이 창조적 진보세대이다. 창조적 진보세대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전근대성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탈현대적인 삶을 추구하는 복합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주체들이다.”(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시간에 존재할 수 없는 역사적인 시간이 같은 시대에 나타난다는 것. 압축적 근대화를 이룬 한국사회에 전근대성과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동시에 복잡하게 얽혀서 존재한다는 지적과 관련됨)

 

새누리당의 지지세력은 주로 연고주의적 주체들이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의 지지세력은 연고주의적 주체와 네트워크적 주체로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정치연합은 연고주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두 세력을 적절히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진보정당 역시 운동권 동창회에 의해 운영되는 연고주의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네트워크적 정체성을 가진 잠재적 지지자들을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점을 가진다.

 

 

5. 희망고문사회를 넘어서

 

노무현과 안철수는 둘 다 상식의 대변자로써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탈권위주의적이며 네트워크적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특히 노무현은 정치에서 진보적이었으며 안철수는 문화에서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안철수는 이명박 정부 이후 나타났고 이미 경제적 진보의 정체성을 획득한 창조적 진보세대들에게 경제적 진보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안철수가 대선에서 제시한 새정치는 의원정수축소, 정치제도개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고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같은 사회경제적인 대안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안철수의 가장 큰 패인은 과거의 문제를 미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안철수는 상식적이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진보적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현실의 진보주의자들은 엘리트적이고 묵시론적이다. 자신들의 실패를 역사의 실패, 도덕의 실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진보는 새로운 것이며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속성상 이해하기 힘들고, 실천하기 힘들고 유지하기 힘들다. 새로운 것은 항상 처음에는 불편한 것이다. “진보가 실천되기 위해서는 불편한 것을 감수할 만큼 신념이 굳어야 된다.” 진보를 실천하더라도 보수가 힘이 세고 제도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사람들에게 생소한 진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마케팅이 필요하며, 불편한 진보를 관습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열정이 필요하며, 불안한 진보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지지가 필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은 이것을 잘 모른다. 문제의 바탕에는 그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철지난 인식론이 놓여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들은 엘리트주의자들이고 보수주의자들이다. “이제 대중들은 설교보다는 설득을 원하고, 홍보보다는 토론을 원한다.”

 

진보는 시대의식을 회득하지 못했고 그것은 보수와의 적대적 의존관계를 통해 기득권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민주화 이후 새정치연합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급진진보계열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분화되었다. 진보세력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민주/반민주, 분단/통일, 자본/노동의 구도를 넘어 상식, 정의, 공유의 가치를 획득해야 한다. “상식이 과거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현재를 극복하는 것이고, 공유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특히 진보는 연고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패거리정치는 정치불신의 핵심이다. 사람은 정책과 이념에 따라, 그리고 능력에 따라 배치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상식의 실현이다.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는 그들만의 리그’, 조폭공화국의 해체를 의미한다. 핵심은 삼성공화국으로 상징되는 재벌체제의 개혁이다.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주주자본주의에 의한 양극화 극복도 중요하지만 불공정경쟁의 관행을 해체하는 것을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안철수는 반칙과 특권에 기대지 않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상식과 정의를 상징했지만,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인 공유를 실천하기도 했다. V3라는 바이러스 백신의 무상 배포는 상징적인 것이다. 청춘콘서트를 통해 젊은이들과 감정을 공유했고 주식나눔, 기부를 통해 재산을 공유하기도 했다. 인터넷 시대의 핵심 원리는 공유이고 이는 새로운 사회구성원리이다.

 

우리는 상식, 정의, 공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새로운 리더십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리더십에는 해라, 하자, 한다의 리더십이 있다. 해라의 리더십은 권위주의 시대의 명령형리더십이다. 하자의 리더십은 설득형리더십이다. 제안하고 토론하고 동의하는 민주주의사회, 산업사회의 기본적인 리더십이다. 한다의 리더십은 디지털 시대의 혁신적리더십이다. 이는 설득 이전에 자기표현을 하는 행동의 리더십이다. 이제 모든 행위는 즉시 발견되고 연결되고 토론된다. 한다의 리더십이 소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행위하는 즉시 발견되고 연결되고, 토론된다는 것은 이 행위가 과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리더십을 노무현 현상, 촛불시위, 안녕하십니까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당을 고민해보면, 새로운 정당모델은 애플형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혁신적 리더십과 수평적 리더십이 결합된 플랫폼 정당이 디지털시대의 정당이다. 이제는 혁신적 리더십이 없이는 참여가 발생하지 않는다.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정책이 있어야 대중의 자발적이며 폭발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정당은 혁신적 리더십의 제공자이며,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플랫폼의 제공자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정당은 어떤 정치를 추구해야 할까? 한국사회의 자살률은 극도로 높고 출산률은 극도로 낮다. 이는 선택이 다양해지는 과정과 경제적 고통이 개인화되는 과정이 동시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개인화, 즉 고립되었기 때문에 공감을 원한다. 다른 경험, 다른 생각과 가치관 속의 외로움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를 위한 정치는 공감의 정치이다. 이를 위해 한국적 생활정치가 필요하다. 이는 [1] 국민들의 실질적 삶의 질 향상, [2]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결정 확대, [3] 자아실현적 가치 혹은 자기표현적 가치 실현의 정치를 내용으로 한다. [1]은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실현과 관련된다. [2]는 주민투표, 주민소환, 주민발안, 참여예산제 등과 관련된다. [1], [2]는 제한적으로나마 인식되고 있지만 [3]은 전혀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 이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창조적 진보세대에게서 배울 일이다. [1], [2], [3]은 앞서의 경제적 진보, 정치적 진보, 문화적 진보에 대한 분석에 조응하는 것이다.

 

 

*게시자의 사족

 

한때 핫했던 안철수 현상은 기존의 제도정치세력으로 대변되지 못하거나 포괄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안철수의 실패는 추상적으로 대변되는 것처럼 보이던 것이 현실적, 구체적 실천을 통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는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이는 책의 필자 또한 유사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입니다. 현재 그 영역은 온전하게는 아니지만 오유의 평균적인 관점에 비춰보면 노무현, 문재인, 정의당 정도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정치세력에서는 제일 가까워 보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은 이전의 현상(노무현 현상이든 잠시였지만 문국현 현상이든, 안철수 현상이든)이 보여주었던 강력한 힘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오유 등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직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청년세대들의 새로운 가치와 열망들을 포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 역시 필자처럼 새로운 가치와 열망, 그리고 새로운 형식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기존의 정치들이 이를 잘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에 대해서는 아직 개인적으로는 정리 중에 있습니다. 김정훈의 분석은 기존의 비관적인 분석들(현대의 청년들은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어 극한경쟁 속에 매몰되어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식의 분석)이 아닌 희망의 가능성을 포착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꼭 참고해야 할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조건과 새로운 주체들과 관련한 정치사회학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관련 기사

 

안철수가 만약 '경제'에 눈을 돌렸다면...

[서평] 김정훈 교수의 <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을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0292

 

보수는 염치가 없고 진보는 눈치가 없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74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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