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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속의 유령
게시물ID : phil_11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널소유하겠어
추천 : 0
조회수 : 138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4/24 19:47:04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운명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표현하자면 부조리 그 자체일 뿐이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 사회는 '자존감 중독'에 걸린 것 같다.
그 누구도 자존감이라는 말을 안 쓰는 사람이 없고,
고민하지 않는 사람도 없으며, 고통받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단지 조용히 마루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런 유쾌한 날을 기다릴 뿐이다.

자존감이라는 말이 사실은 존재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내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그 의미를 다른 것에서 찾아다니며 방황하는 그런.
하지만 아니더라. 그런데 비슷하더라.
자아존중감이라고 하는 이 말에 대하여 할 말이 너무나도 많다.

"저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에요."

도대체 낮고 높음이 무엇인가? 있고 없고가 무슨 기준인지에 대해서 햇갈린다.
나는 안녕한 것인지, 아니면 네가 안녕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을 보자면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보이지 않는 그렇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이 녀석이 나를 조종하는 꼴을 보자니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말이 얼마나 훌륭한 비유였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 박탈당한 자유를 찾아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제한된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망각해야 함을 깨달았다.

늘 어른이 되고 싶어했던 나는 어른이라는 단어를 쉽게
책임이라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을 말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라는 당장 눈에 보이는 등불이 필요하며,
머지않아 나에게 한줄기 빛을 내뿜을 거란 강렬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내 의지가 선택을 만들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나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철저히 성장기반을 통하여 자기학습을 하는 일종의 세뇌효과라고도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판단력을 길러주지만, 이성과 본능 사이에
온전한 내 의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바로 우리의 탄생이 증명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자존감이 낮다고 믿지 말라고 권고하거나, 위로하는 것부터
그 사람에게 자존감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하곤 하지만,
사실 그 자존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진 않는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시기와 질투로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며,
철저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통하여, 세상과의 관계가 점차 비틀어지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고립되어가는 외딴 섬으로 말하자면 편하겠다.

"저는 불순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애초에 순수한 적이 없었 거든요."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을 때, 난감하기 짝이 없다.
위로를 해야 할지, 아니 해야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아무런 말이라도 해서 지금 상황을 벗어나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분명히 '도피'를 위한 욕구가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쾌락을, 즐거움을 통해서 도피를 실현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여 철저히 자기세뇌(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실현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사이에서 방황하며 고통받는다.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들에게 혹은 우연한 영향을 받아 그것을 따르기도 한다.

ex.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일화나 자서전을 보아도 
그들이 영향을 받은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신뢰했으며, 전적으로 그것은 자신의 믿음이라 믿었다.

"너는 왜 그렇게 자존감이 낮니?"

왜 그런 말들을 하곤 한다. 남의 불행을 통하여 자신을 위안삼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뭐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걸 위안 삼으라는 같잖은 위로정도.
도대체 자존감이 뭐길래 나를 상시 긍정의 에너지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것인가?

나는 긍정적인 사람인지, 부정적인 사람인지 모른다.
원래 내가 착했던 것인지, 신이 말하는 것처럼 악마가 나를 유혹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내가 나쁜 것인지.
도대체 내가 믿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일 이러한 생각들에 빠져서 무언가 하나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때가 사실 가장 고역의 순간이다.

그것에 책임지고, 미련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상시 우리의 삶에서 후회와 지금 보다는 나았던 과거의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있을 때 잘할라고, 젊을 때 실컷 즐기라고, 열정이 있을 때 하라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언제나 삶은 자기변호를 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설득시키고, 그렇지 못하면 비겁한 변명으로 남을 뿐.

나는 지금의 5~60대 세대와 2~30대 세대의 차이가 어디서부터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미약하나마 탐구해봤다.
놀랍게도 그 근본적인 이유는 나이와 세대, 문화와 사회를 떠나 믿음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 믿음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니던가?
좋은 믿음과 나쁜 믿음이 있는데, 도대체 그것을 가리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란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성장해온 과정에서 순전히 내 선택으로 문화와 사회에 영향을 받았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믿는 이 믿음들이 온전히 내가 원해서 믿고 있는가?
지금 의심하는 나는 내가 맞는가?

나는 누구인가?

거짓된 세상에서 거짓된 안녕을 말하는 내가 순전히 내가 아니며,
그럼에도 진실된 세상에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내가 안녕을 하는 것이 온전한 나의 행위였다.

"저는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었어요."

살아있는 그 자체로 나는 사람인 것인가, 아니면 남들처럼(노동을 하고, 이성적인) 살아야 사람이 되는 것인가?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니라면 내가 굳이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기권은 왜 없는가? 기권표를 존중하지 않는 야속한 사회에서 그들이 가진 믿음의 탑은 더욱 굳건해진다.

사실 삶에서 인간을 두 가지의 분류로 나누면,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인간과
철저히 이성을 붙잡으며 억제하고 자제하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이 있는데,

사회는 철저히 이성을 붙잡으라고 약속을 지킬 것을 권한다.
하지만 공동체 속의 개인들은 일탈을 바라며, 조금이나마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고,
그 표현은 크고 작고를 떠나 누구나 동일한 바로 이것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살아가기 위해서 약속을 지키는 행위에 대하여 '진리'에 가까운 정도로 말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악을 멀리하면서 동시에 어떤 악은 필요악으로 치부하더라.
그 예가 대표적으로 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실 윤리의 잣대를 따르면 당연해선 안될 범죄자이지만,
그들에게 조금의 아량을 베풀어보면 그들도 사람이기에 살 권리는 있다.
사형수에 대하여 찬반논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특히 안락사에 대해서 그들에게 죽을 자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너무나 아이러니할 뿐이다.

누구도 이 약속을 어기면 법의 심판으로 겨우 힘겹게 누리는 자유를 빼앗길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훈련 받는다.

논외지만 나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이루는 공동체, 사회는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쌓여서 압축됐는지도 체감할 수 있다.
왜 특정 범죄자가 불특정 다수에게 범죄를 저지르는가?
가끔 이런 범죄에 대하여 파고보면 무조건 100% 그가 싸이코며 미친놈이라서라는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다.
(비일반적 = 별난 = 미친, 이 공식이 특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웠다.)
이 사회가 가진 모순과 부조리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음에 대한 필연에 관해서도 설명할 수 있었다.

배려와 이해, 
내가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지는 사람과
철저히 그것을 지키며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무엇은 맞고, 무엇은 틀리기 때문에,
반드시 그 탓을 누구 하나가 짊어지고 가야한다.

내가 세상에 대해 공포를 갖았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짖밟아야하며, 그들의 불행을 눈감고 위안삼아야 했으며,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했다면 나는 그에게 비로소 저항하며, 싸워 이기는 것을 목적삼아 대항했다. 

다시 피해자가 되고, 다시 가해자가 되며, 나는 영원히 하나로써 남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이 억압에 대한, 자유를 갈망하는 이 원초적인 본능은 자제해야 하는 것인가?
과거의 아무 것도 몰랐던 나는 순수했던 걸까?

결국 풀리지 않는 해답과 반복되는 딜레마 속에서 
순수한 미소를 말미암아 작은 위로를 받으며 사투하는 것.

당신의 그 미소가 정말로 순수한 것일까? 나는 의심하자면,
당신의 그 순수한 의도에 악이 덫칠되어 나에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정말로 당신의 말을 믿으면, 전 행복해 질 수 있나요?"

이 물음에 나를 100% 설득할 수 있다면, 
나 기꺼이 그의 말을 따르리라.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믿음의 탑이 얼마나 잘못 쌓여져왔는지 알게됐다.
나라는 유령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갈등할 때,
나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지만, 내 의지가 돼야만 한다.
내가 져야 할 책임의 무게이고, 지기 싫어도 져야만 하는 고통이다.

몇 시간 뒤에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나타난다.
그들에게 나의 보여지는 모습을 믿도록 만들고, 그것이 나라고 어필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나는 잘못된 사람이 되어간다.
남이 시키는 대로만 했더니 더더욱 나는 못된 사람이 되어 그들을 원망했다.

오늘도 팔리는 자기계발서를 보며 나는 한숨을 짓는다.
도대체 내가 왜 그들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가?
도대체 내가 왜 잘못 쌓여서 만들어진 '나'라는 유령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가?

나는 늘 가면을 쓰지만, 한 번도 그 가면이 진짜 나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나라고 믿었던 이것도 순전한 나가 아니기 떄문이었다.

결국 내가 믿는 것이 옳은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정말로 당신이 믿는 그것에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예외란 반드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출처 출처기능이 생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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