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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먹힌 돈과 100m 연애, 그리고 은혜갚은 회사원 이야기
게시물ID : wedlock_99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억개의별
추천 : 23
조회수 : 1427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7/08/25 20:30:53
 
그간 넷 상의 글을 보면서 이런 류의 글은 음슴체로 쓰는 것이 정도라는 느낌을 받았음
이에 스스로도 어색하지만 생전 첨으로 음슴체로 글을 써봄
보기에 어색해도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 주의: 이 글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져 매우 길고 난삽함
 

[1. 돈 떼먹힌 이야기]
 
IMF를 조금 지나 어수선한 시절에 대학을 졸업함
원래 목표는 공기업이었는데, 공기업은 물론이고 공공기관도 대부분 채용 자체를 안함
원서 낼 일, 시험을 볼 일도 거의 없었음 
그나마 어찌어찌 해서 공공기관 한군데 합격  
 
2주간의 신입직원 합숙교육이 끝나고 금요일날 발령을 받았는데,
다음날인 토요일까지 대전지사로 가라는 거였음
난 내가 입사시험 내지는 신입직원 교육에서 꼴등을 한 줄 알았음
해당 공채기수 30명 중 비연고지 배치는 4명 뿐이었기에.
 
나중에 보니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태어나서 그때까지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던 나로서는 황망했음
심지어 나는 유치원 이후 결혼 전까지 대학교와 군대까지
모조리 한 집에서 버스 타고 왔다갔다 하며 마친 인간임
(군대는 전설의 마지막 방위, 2대 독자 18개월 방위)
 
하여간 아버지 차를 얻어타고 트렁크에 이불 한 채만 달랑 싣고서 생전 첨으로 대전에 입성
대전에 도착하여 처음 보게 된 것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수많은 예쁜 누나들
지금은 아마 없어졌을지 싶은데 당시만 하더라도 대전 시내에는
다방커피 배달 누나들이 소형오토바이를 타고 끊임없이 달렸음
 
안그래도 아들이 집 떠나 발령받은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대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시골이구나. 쿨럭~"
 
하여간 사무실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당시만해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공공기관은 한가하던 시절
월급은 조금 마음에 안들었지만, 야근에 시들어가던 친구들을 생각해 보니
업무강도 대비 보수는 괜찮은 것으로 판단되어 일단 일년은 다녀보기로 맘을 먹음
 
문제는 관사 생활이었는데~
애초에 트렁크에 이불 한 채만 가져오라는 것은 관사가 제공되었기 때문임
다만 문제는 관사는 낡을대로 낡은 아파트인데 당시 대전지사가 타연고지 직원이 넘쳐서
미혼남자 5명이 살고 있었다는 것
저녁식사는 없고 오직 저녁 술만이 존재했으며,
먹다보면 멀쩡히 대전에 집 있는 유부남도 합류하고 청주지사 직원인데 대전이 집인 직원 등도 합류해서
마지막 차는 관사에 남자 7~8명이 득시글거렸음
 
이 관사의 보스는 당시 고참 대리, 나이로는 차장급인 분이었는데 카리스마가 대단했음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해서 꼰대질이나 예의없고 거친 편은 아니었지만,
조용한 여자 부장님을 대신해서 부장이 해야할 일부 역할을 대신할만큼 그런 양반이었음
 
이런 분이 돈을 빌려달라하니 나이어린 신입직원은 암 생각없이 별 생각없이 빌려드림
이런 분이, 더구나 공공기관 근무하는데 돈을 떼먹을거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음(어렸던 시절~)
100만원이라 그리 큰 돈이라고 생각도 안되어 별고민도 안했음
그리고 나중에 70만원 더 빌려달라고 해서 그도 더 빌려드림
 
아주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분은 주변에 사람이란 사람에게는 돈을 죄다 빌려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결국은 이게 문제가 되어 사내에서 징계도 당함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용처가 주로 유흥비였던 모양인데
그래서 직원들의 돈 갚으라는 개인적 압박도 심했다고 함
 
하지만 나야 첨에 직장 들어와 일 가르쳐주고 밥하고 술 사주고,
일상생활도 같이 했던 선배한테 돈 갚으라고 하기가 쉽지 않았음
꿈질꿈질하다가 결국 어렵게 이야기해서 100만원은 받고 70만원은 결국 못받음
왜 친한 사이일수록 돈을 빌려주면 안되는지, 서서 빌려준 돈을 왜 엎드려 받게 된다는 건지 배우게 됨
여기까지 돈 떼먹히고 사회생활을 겪어보고서야 배운 고구마 이야기
 

[2. 100m 연애이야기]
 
이후 순환보직에 따라 3년 조금 안되는 대전생활을 마치고 본사로 발령받음
독거노인 생활은 대전이나 서울이나 변함이 없었지만 크게 결혼할 생각도 없었던 터라
나름 잘 살고 있었음
 
그러다가 소개팅을 하게 되었는데, 친여동생의 친구의 친구였음
쉽게 말해서 평소에 나와 알던 동생의 친구 하나가
나와 내 여동생은 모르는 자기 친구를 소개팅해주겠다고 한거임
큰 생각없이 나감
근데 맘에 듬
그래서 사귐

내가 36살 소개팅에 슬램덩크 캐릭터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간 날임
이걸 입은 나랑 사귀기로 한 거보면 나를 사랑하는게 틀림없음
 
하여간 이런 나의 (당시) 여친은 큰 장점이 있었음
그것은 바로 나와 100m 거리에 (부분적으로) 혼자 사는 여자라는 것임
하나만 있어도 개꿀인 장점이 두 개나 있었음
 
내가 그 아파트에서 유치원 때부터 살기 시작했던 것처럼
여친도 그 아파트에서 초등, 아니 국민학생 시절부터 살아온 것임

나는 그 초등학교의 1회 졸업생이고, 내 여동생, 소개팅 동생, 여친은 모두 2회 졸업생인 것이며,
나는 2차 단지 15동에 살았고, 와이프는 1차 단지 11동에 살았는데,
내 방과 와이프 방을 직선으로 그으면 100m가 안됨
 
그러니 지난 30년 동안 이 동네 치킨집, 비디오 대여점, 카페, 술집 등 곳곳에서
최소한 십 수번은 만나거나 지나쳤을 것임
아마도 난 국민학교 6학년 때 국민학교 5학년인 우리 와이프와 짧은 대화를 해본 적이 있을지도 모름
그렇게 30년 동안 못보더니 어느 날 여친이 되고, 어느 날 와이프가 되었음
참 세상 좁음
 
가까이 사는 여자랑 연애하는 장점도 썰을 풀고 싶은 점이 많지만
지금까지도 글이 길어지고 있으므로 100m 연애 얘기는 일단 여기까지 끝
 

[3. 은혜갚은 회사원 이야기]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여친이 와이프로 진화하는 시점이 옴
이 진화를 위해서는 상견례 이전에 여친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과정을 보통 거치게 됨
여친을 태우고 여친의 부모님이 계시는 춘천으로 출발함
 
그런데 여름철이란 점,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춘천이란 점을 간과했음
가평까지의 주차장과 다름없는 코스를 비롯해서 서울부터 5시간반 걸림!
점심 약속은 점저 약속이 되고, 배고픈 여친 아버님은 1 컵라면 하고 기다리심
사람이 1시간 늦고, 2시간 늦을 때나 조바심이 나는거지
4시간쯤 되면 급X을 이미 쏟아놓은 사람처럼 초연해짐
 
하여간 늦게 찾아뵌 여친 아버님은 젠틀하게 대해주심
처음 소개팅 때부터 알던 거긴 했는데 여친 아버님은 춘천에 있는 학교 교수님이셨음
그래서 서울에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가끔 왔다갔다 하시는 정도기에
여친이 부분적으로 혼자 사는 여자였던 것임
 
교수님이셨던 아버님은 내가 다녀간 바로 다음날 제자를 하나 부르셨다 함
그 제자는 바로 두둥~
내게 돈 170만원을 빌렸다가 100만원만 갚은 그 분이었음!
세상 좁지요?
 
이 분은 당시 우리 회사를 퇴사 후 관련된 분야의 다른 민간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강원도지부 사무국장을 하고 있었음
또한 아버님의 교수되신 후 1회 졸업생이었음
그러니 같은 회사에 다녔다는 나에 대해 물어보시고자 이 분을 부른거임
같은 관사까지 썼는지는 알고 부르신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어쨌든 이 분은 나에 대해 '볼수록 쓸만한 진국일 것'이라고 해주셨고,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이후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됨
가끔 내가 그 돈 70만원 더 받겠다고 얼굴 붉힐 일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음
 
언제나 젠틀하고 배울 점 많은 진정 어른이셨던 장인어른은 안타깝게도 2015년 암으로 돌아가셨고,
전 회사직원분은 1회 졸업생을 대표해 제자들 연락도 취해주고,
장지까지 이동하는 차편을 제공해주는 등 각종 편의를 알아봐주셨음
이후에도 장모님 적적하실까봐 가끔 찾아뵙고 식사도 모셨다 함
이상 은혜갚은 전 회사선배 이야기 끝.
 

1줄 정리: 연애는 가까이 사는 여자랑!
출처 내 지난 30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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