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산다.
이 말은 자신의 눈으로 어떤 것을 보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본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린 눈으로 그저 '보고있다'는 형식적이고 육체적인 표현만 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이고 정신적인 인식작용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무언가를 본다고 할때에는 사물을 중심으로해서 내가 보고 있는것과 나를 중심으로해서 사물을 보는것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존재하는 사물을 눈이라는 시각의 도구로 볼때의 관점이고 '본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 볼수 있는데 그것은 이 문장에서의 '바라 볼수 있는데'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며 수시로 변화하고 한 사람의 특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관점의 '본다'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산다" 라는 말은 명백하다 못해 결백해진다. 누구도 주관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특징이 개인의 존재를 다른것과 구분짓고 있게하는 구성 요건이 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은 두달전에 일어났었던 기이했지만 단순하여 그만 잊어버릴뻔한 사건을 상기하면서 떠오르게됬다. 그 사건은 눈으로 보이는 사물인 열쇠를 분실함으로 시작된다. 그당시 나는 고시텔에서 살고 있었고 그 좁은 방안에서 열쇠를 분실한다는것 자체가 정신적인 병이 있지 않는이상 말이 안되는 상황이였다. 3번의 분실이 있었는데 처음 2번은 군대에서 탄피 찾는 느낌으로 방구석구석을 계속 순환하며 찾아다니다 대게 10분정도가 흐르면 정말 이상하게도 찾을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사물(열쇠)을 의심하지 않았고 나의 인식과 정신을 의심했었다. 이를 뒤바꾼 판국은 고시텔을 나가기 3일전 친구를 방에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방을 열고 들어오면 열쇠를 무의식적으로 책상위에 올려둔다. 이건 나의 무의식적인 습관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무의식을 알고 있었고 그러하기에 열쇠의 위치는 방에 있을땐 전혀 신경쓰지 않았으니 열쇠가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나가려면 열쇠를 찾아야 하고 열쇠의 존재에 신경을 써야한다. 어느때와 다를것 없었고 나가기위해 책상에서 열쇠를 찾아보았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1시간이 넘게 친구와 열쇠가 있을 만한 공간은 모두 찾아보았다. 침대를 다 들춰보기도 하고 옷과 가방, 신발까지 뒤져보았고 심지어 책사이와 에어컨까지 인간이 숨길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살펴보았다. 그땐 그냥 귀찮기도 했고 짜증나기도 해서 단순하게만 여기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당연하다는 듯이 열쇠는 책상에 올려진 잡물건통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더이상 나를 속일 수 없었다. 혼자서 이 열쇠 분실사건을 경험했을 때는 내 관찰력과 인식의 부족, 착각, 망상 등으로 일어난 일에 해명이 되었지만 두명이 동시에 겪은 경험의 공유에서 난 더이상 나에게서 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못된건 확실히 내가 아니라 일어난 현상이였다. 하지만 그때는 다른곳에 몰두해야할 일도 있었지만 도저히 내가 정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의 한도내에서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거나 받아들일 것이 없었기때문에 넘겨 버렸었다.
내가 이 경험을 이제와 상기하며 분석하는 것은 내가 드디어 정신적으로 미친 것이거나 아니면 어떠한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고정관념을 깬 식견을 받아 들인 것일 수 있다. 나는 환각을 가져 본적이 없으며 오히려 느껴보고 싶은 마음만이 있었고, 귀신이나 신 또는 외계인과 UFO까지 이런건 전부 환각이거나 공상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있는 것일까?
또 우리는 어디서 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