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글 읽으시기 앞서 이글을 읽으실때 도움을 드리기 위한 몇가지 지침을 해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 제가 쓰는글은 교인이던 비교인이던 사항을 떠나서 성경을 신구약 다떼시고 지식적으로 어느정도 기반들 다져놓은 즉, 학문학적으로 신학을 약간이라도 해보신 분에 한에 이해가 될거라 사료됩니다. 따라서 성경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나 그런 기본적인것이 부족한 교인들도 글의 특성상 내용이 길어지기에 함축적이고 어느 부분은 아실거란 전제로 쓰기에 설사 이해안가고 마음에 와닫지 않는 내용이다 싶으면 그거가지고 지적하시기 전에 본인이 알고있는 성경지식에 관해서 한번 깊이 따져보시고 본인의 지식이 얕아 이해 못하는것을 괜히 어려운말 쓴다고 댓글로 다는 미성숙한 모습의 오유시게인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나타나시는 분이 있다면 ㅡㅡ;; 당신에게는 가만히 있음 중간이나 간다는 속담을 던져드리고 싶군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지금 제가 인용하는 문장들은 댈러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부분에서 제가 필요한 부분을 따온겁니다. 글이 길어지므로 발췌부분 도입과 끝은 따로 달지 않겠습니다.
나 자신의 체험으로 말하자면, 그 시점까지만 해도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시며 본인도 그것을 안다고 경솔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각 신자에게 원하시는 행동을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고 믿었다.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하는 일반적인 진리도 개인적 차원에서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신다고 믿었다.
나중에야 그런 믿음이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젊었을 때 푹 빠져 있었던 일련의 부흥 집회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독특한 유형의 생각 및 충동과 상호 작용하는데 익숙해졌다. 내게는 그것이 내 마음과 심령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것은 분명 내게 특별한 체험이었고, 이론이나 교리는 몰랐어도 나의 행동을 인도해준 체험이었다. 그 후 사역의 길에 드어서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가장 근본적 의미에서 한마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그런 말씀이 나를 통해 다른사람들에게 그저 들려질 것을 기대하는 법도 배웠다. '그저 내가' 말하거나 '그저 내가' 성경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것과, 그보다 더 깊은 일이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경험을 통해배웠다. 존 칼빈과 윌리엄 로같은 과거의 위대한 그리스도 인들은 저작을 통해 내게 소위' 엘리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심상 3:8~9을 참조) 그들은 옛날 거룩한 사라들에게 성경을 전해 주신 그 성령이, 오늘날 양육하고 양육받기 위해 기록된 말씀 앞에 모인 이들의 마음속에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아울러 이런일이 일어날 때에만 글로만 배운 그저 그런 똑똑똑한 서기간이 되지 않게 않을 수 있다고 내게 경고해 주었다. 즉 내 머리속에 채워진 것으로 청중의 영혼을 먹이려 애쓰는 사람, 성경에서든 어디서든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 주려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가장 거룩한 체험이 종종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쉽지 않았다. 앞을 보게 해주는 빛에 눈이 부셔 오히려 실체를정확하게 보지 못할 수 있으며 그림자 속의 물체를 아예 놓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의 역사에 대한 나 자신의 체험에 사로잡혀 그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것을 모든 신자의 삶에 나타나는 이해할 만한 사실로 속단했던 것이다. 분명 배워야할 것이 많았다. 한동안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개념자체가 신실한 교인들 -교회 바깥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고-에게 야기하는 큰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면, 그것을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나 심지어 그들 쪽의 반항 탓으로 일축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고 독실한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소위 '하나님의 인도'가 전혀 무의미할수 있다-환경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해진 경우를 제외하고는-는 인식을 완전히 털어 낼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급기야 모든 인도를 눈먼 힘으로 치부하며 하나님의 뜻을 한낱 운명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았다. 무지막지한 사건마저 하나님의 뜻으로 규정될 때가 비일비재한 것을 보며 나는 괴로웠다. 인간의 결정 탓임이 너무나 분명한 경우에도 말이다. 그런 생각이 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일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발전되었다 그것은 믿음을 말살하며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되는 체험을 이야기하길 꺼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자신이 UFO를 봤다고 생각하거나 최근 많이 거론된 저승 체험을 한 사람들도 곧 입을 다무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아주 조심하지 않는 한 공연히 나서다가 원치 않는 주목-미친놈취급, 광신자, 웃음거리등등..-만 받게 되리란 것을 안다. 그들은 괴상한 사람이나 아예 미친 사람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체험은 정말 이상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기쪽의 실수일 수도 있는 것을 만인 앞에 밝히기를 원치 않는다. 행여 자신이 교만한 사람이나 자시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묘사하는 표현을 빌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크므로 너무 자고한(고후12:7)사라으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회의와 망설임 때문에 당연히 애를 먹는다. 개그맨 릴리 톰린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그것은 기도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것은 정신불열이라고 하니 어찌된일인가?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오늘날 특히 이런 반응이 흔하다. 이런 주제의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과 목회적 지도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교회 지도자가 옛날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친히 말씀하신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막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양떼에게는 말씀하지 않고 자기에게-즉 목회자나 인도자에가만- 말씀하신다는 다는것을 노골적으로 선호하는 지도자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익히 아려진 바처럼 온갖 오류에 빠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벙어리가 아니다. 어쩌다 한번씩 쿡찌르거나, 잠깐 뜨거워졌다 식거나, 눈부심 형상으로 떠오르거나, 온몸을 전율케 하는 존재 정도로 스스로를 제한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대화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확증해 주는 유명 그리스도인들들의 사례는 그런 단순한 논리로 환결 탄력을 받게 된다." 개인적 대화 없이 어떻게 하나님과-인간과도 마찬가지다-의 인격적 관계, 인격적 동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당연한 질문이다.
오늘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우리에 대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갖고 계신 계획이나 생각 정도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격적 관계는, 천국에 각 개인의 전용 구좌가 있어 그 구좌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출해 자신의 죄값을 갚는 정도의 의미로 전락하고만다. 아니면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격적 관계란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힘쎄고 마음씨 좋고 자상할지라도 단순히 호의를 베푸는 자와 친구는 전혀 다르듯이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볼지어다. 내가 세상끝 날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참고 히 13:5-6)
무속인들처럼 뭐 죽은사람만날때 무당을 통해서 그와 이야기 하는것처럼 하나님은 목회자나 인도자에게만 한정하여 말씀하시는것은 아니며, 하나님은 또한 고의 관료처럼 바빠서 그냥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상대가 아니란걸 나타내준 글인데 과연 얼마나 와닫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음성"이글 전체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경적 오류를 인간의 머리로 해석하면서 오는 대부분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르게 잡아주는 책인데, 이런 짤막한 문장으로 여러분들이 이해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설교잘하고 좋은 목사님이라도 그분말씀대로 따르는것은 그뒤 그분을 움직이신 하나님을 바로보질 못하고 그 목사님을 우상화시킨 교인들일뿐입니다. 그들의 모습 역시 그런모습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신약성경에서도 지적합니다.
어떤 종교든지 그 교인들이 저지르는 죄를 지어라!라고 또는 그런걸 게의치 않는 교는 없습니다.- 공이된 종교라면 말이죠- 오히려 좋은 것만 보게 하는 가르침이 많고 많고 많지 그런건 가르치지 않는다는거죠. 학교에서도 명문이라는 학교도 대부분의 학생은 성실하고 착하지만 간혹 학교에서 가르치는것에 반해 사고쳐서 언론에까지 문제되게끔 사고치면 그학교 다니는 다수의 성실한 학생은 그 언론과 사람들의 안좋은 시선같은 된서리에 한순간에 명문학생에서 똥통학교 학생으로 전락합니다. 지금 오유시게 교인들에게 비난의 목소리를 높히는 분들도 그런 의미에서 물흐리는 미꾸라지 때문에 전체를 욕하는것이 세상 대세라고 그게 다수결의 방향이니 나도 그렇게 한다라는 웃지못할 오류를 근거삼아 욕하시는데, 그게 과연 그분들이 원하는 정의 즉 모두를 수호하는 정의에서 나올만한 생각일까요? 그것도 어찌보면 역차별입니다. 뒤집어 우리속담에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냥 보기엔 다 똥통학교같았는데 갑지가 거기서 명문대 수석졸업자가 나왔다고 하면 다들 대단하다고 여길수 있는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그 똥통에 다니던 대다수의 꼴통애들이 그 한순간에 명문학교 학생되는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안에 우리는 죄인이 될수도 또는 선인이 될수도 있는 요인 즉,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것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면, 사람이 사람을 볼때에 그사람이 그 삐딱한시선만큼악하고 악하게 보일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살인자를 보고 생각할때, 아 그도 원래 나쁜사람은 아니지만 욱 하는 성격이 너무 지나쳐서 그만 그런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구나 하는 그사람을 동정하는 또는 불쌍해 하는 마음이 생기듯 말입니다.
그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해주는 마음, 사랑할수 있는 마음이라면, 오유시게의 종교분쟁도 더이상 없을겁니다. 교인과 비교인을 떠나서 서로의 잘못한점이 있다면 조용히 꾸짖고 그러지말아라고 타이른다음에 지난번에는 실수했지만 앞으론 잘할거라 믿는다는 이런 아름다운 풍조가 생기리란 생각은 한낯 제꿈에 불과할까요?
지금까지 제글의 글자하나 안빠뜨리고 본분에게 던집니다. 그런 모습이 과연 꿈일까요?
전 믿습니다. 지금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언젠가는 서로가 손맞잡고 얼싸않으며 서로가 부족해서 서로가 이해하지못해서 서로가 용서하지 못해서 우린 같은 대한국민끼리 싸웠다라고 반성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곧-아님 언젠가는- 오리란걸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저에게 가르쳐준 인간의 본성이자 아름다운 모습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