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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의 경험담에 대해서
게시물ID : panic_794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헤브리
추천 : 20
조회수 : 170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5/03 18:55:04
여러분께 이건 진짜 있는 일이야! 라고 강요하지 않는,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만... 공게에 올려지는 대부분의 글들이 '그것'을 귀신이라고 칭하는 걸 보고 혹시나 제 어렸던 과거에 자주 경험하고 보았던 것이 부정적인 의미의 '귀신'일까? 라는 궁금증에 대충 글이나마 올려 봅니다.


제가 그걸 보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전의 일이었습니다. 친가댁에 살았을때 저희 네가족은 작은방에 네식구, 안방에 할머니 할아버지, 더 작은방에는 막내고모, 이렇게 일곱가족이 살았습니다.

낮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집안일 때문에 집에는 있지만 왠지 서로 얼굴보기가 힘든 어머니와 할머님, 한창 일하기 바빴던 고모, 바깥에서 연구원을 재직중이시던 아버지, 그리고 사업때문에 집보다는 외박을 자주 하시던 할아버지...

저의 첫 기억은 4살 때부터 입니다. 그때 우리집에는 숙모님이 사셨습니다. 남자들과 막내 고모가 바깥으로 나가고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마당에 나가 일을 하실때 몸이 약했던 저는 집안에 홀로 누워있던적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숙모'님은 열때문에 정신을 못차리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고, 제가 자다 일어나서 고개를 돌리면 옆자리 작은방에 이불을 개는 모습도 보이기도, 유치원에서 상을 타고 왔을때 어머니는 일하기 바빠 저를 신경 써 주시지 못하지만 그분 만큼은 잘했다며 칭찬해 주시면서 저를 끌어 안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가족들이 너무 바쁜 삶을 살아 그런지는 몰라도 집안에서 저는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과묵했던 친가 식구들과 아버지. 젊은 나이에 결혼을 와 다분히 피폐했던 생활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던 어머니. 너무 어린 제 동생의 사이에서 저는 오갈곳 없는 천덕 꾸러기 신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숙모님의 곁에서는 정말로 너무나도 안심을 느꼈습니다.

너무나도 바빴던 가족들이 저에 대해 큰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터라.라 저는 홀로귀가를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서 신기했던 경험으로는 유치원 차에서 내린후 집으로 걸어가는 그 길은 꽤나 사고가 많고 불량학생이 많은 거리였습니다만, 저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 빠진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머리속에 숙모님의 목소리로 "이쪽은 위험해. 돌아가자." 라고 '느껴'지면 저는 그 자리를 피해갔고, 어떤 때는 숙모님이 거리의 앞까지 기다리시면 저는 그분의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가거나 하는 식이 었습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가던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위험해 보이는 불량학생들의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더라도 아무도 저에게 욕을 하거나 눈치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저란 존재를 신경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숙모님의 든든함에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입니다.

가끔씩 숙모님은 작은방에 있는 작은 창문을 하염 없이 들여다 보곤 했습니다. 그 창문으로는 할아버지가 심으셨던 개나리와 국화, 유채꽃이 활짝 펴 있었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었을때. 즉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마당에나가 화단에 물을 정리하거나 쓰레기룰 태울때 숙모님은 그 모습을 서서 보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숙모님을 가만히 부르거나 옷깃을 당길때 그분은 고개를 돌려 웃으시면서 저를 안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그분의 곁이 너무 좋아 칭얼거리다가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미 숙모님운 제 마음 한편에 가족보다 더욱 가족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6살 때쯤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께서 저를 보고 심각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어디가 아프거나 이상한게 보이지 않냐고요. 저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보내주지 않으셨습니다. 한참을 그리 실랑이 하다가 겨우 저를 놔주시고 이상한게 보이면 바로 이야기하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알고보니 제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가족을 소개하거나 항상 생각나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글쓰기 대회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제가 쓴 숙모님에 대한 글이 그 반에서 1등을 한겁니다. 결국 그 연락이 가족한테까지 가자 가족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숙모님'은 커녕 고용인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저의 증상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의논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날, 유치원 차에서 내리고 그날도 변함 없이 집까지 걸어갈려고 했을때 거리 맞은편에 숙모님이 서 계셨습니다. 저는 숙모님이 저와 같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숙모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저를 단지 쳐다보고는 몸울 돌려 차와 인파속으로 사라지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순간 저는 이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아. 이젠 정말로 끝이구나.'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에 엉엉 울면서 집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후 저희 가족은 할아버지의 60주년 생신 기념으로 가족사진울 찍게 되었습니다. 근처 가장 좋은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고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사진이 찍히고 저희 가족들에게 사진관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쪽에서 처리가 곤란한 사진이 나왔다. 혹시 무슨 사연있는게 아니냐. 사진관의 주인과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동창이셔서 쉽게 연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운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그런 사진관의 연락을 기다리고는 일주일후, 그 사진들을 받았습니다.

 온가족이 모인 상황에서 대형 크기의 가족 사진의 소포를 뜯으니 제게 제일 먼저 보인건 가족들의 모습과 제가 앉아있는 모습 옆에 슬픈듯, 기쁜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숙모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아마도 제가 모르는 와중에 숙모님께서 잠시 들리셔서 이 사진을 찍은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만족하고 가족을 보려 뒤를 돌아본 순간

제게 보이는건 경악한 아버지의 얼굴과 볼을 부들부들 떠시는 할아버지. 갑자기 울기 시작한 동생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할머니와 막내고모. 그리고 한참을 멍하게 보다가 저를 붙잡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날 이후로 가족들 손에 이끌려 참 많은 성당을 다녔습니다. 성령이 강하시다는 신부님께 처음으로 구마경을 받기도 했고, 안수식을 하면서 저를 보고 1:1로 손을 잡고 기도하시던 이상한 할머니들도 만났습니다. 서울에 계시던 외삼촌 신부님께서 급히 내려오셔서 저에게 몇시간을 걸쳐 기도를 하기도 했고 자기전에는 항상 성수를 뿌리거나 다닐때는 항상 묵주를 차고 다니는등. 정말 수많은 푸닥거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7살무렵 어느 주말에 할아버지께서 마당으로 나와 그 숙모님께서 같이 찍혔던 사진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습니다. 숙모님께서 항상 서 계셨던 작은 방의 창문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요. 그걸 지켜보는 마음은 마치 제 마음 같지 않았습니다. 꼭. 마치 '모든 것을 다 끝냈다.' 혹은 아무런 원인울 찾을 수 없는 후련함만이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실 제가 어린시절에 겪은 그것. 아니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끝입니다. 제가 그때 그 시절 모든 상황을 알게된 건 고등학교 시절에 와서야 대충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6살 때 유치원에서 1등상을 받았던 그 때, 저희 가족들이 의논한 것은 그동안 병약하고 가끔씩 허공에다 대고 이상한 대화를 하는 것이 보였던 저가 시설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의견이 원인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말을 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듯 보이고 항상 누워있거나 외부 생활에도 폐쇄적인 태도를 고집하던 저에게 가족들은 알게 모르게 저능아의 꼬리표를 달았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제가 쓴 숙모님에 대한 글이 쐐기를 박았습니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말에대해 반대를 했고 할아버지께서는 그것에 대해 역정을 내시며 저를 사이에 두고 알게모르게 집안에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고집을 꺽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시설을 알아 보는둥 하며 사사건건 가족과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집안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막내고모의 생각에 따라 육십주년 할아버지 생신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그러한 사달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 눈에는 단아하고 따뜻한 인상을 받았고 또 그렇게 보였던 숙모의 모습에 왜 그렇게 가족들이 경악을 하고 그 푸닥거리를 했는지에 물었습니다만 그 대답을 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족사진의 아무것도 없을 배경부분에  거뭇거뭇한 얼룩같이 생긴 손자국이 끝없이 찍혀있었고 가족들의 얼굴은 모두 일그러져 있었다.니 모습만 똑바로 나오긴 했는데 니 옆에 온몸이 기괴하게 비틀어지고, 얼굴의 반쪽이 흘러내리는 듯하며, 눈구멍은 없고, 턱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간듯 한 긴머리의 여자가 니한테 목을 걸고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는 제가 그때까지 이상했던 모든것이 그 마귀가 붙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분명히 제 눈에는 단아하게만 보였던 그분의 모습에 대해 가족들은 그렇게 다룬 모습으로 보였다니요. 게다가 그런 일이 지나고 얼마되지 않아 제 몸이 갑자기 좋아져 다른 아이들처럼 뛰고 노는것에 대해 아무런 애로사항이 없어졌기 때문인지 ㅇ머니는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지시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렸을 적 벌써부터 집이 집같지도 않았다고 느꼈던 저를 이해해 준 사람은 숙모님이 전부였습니다. 단호한듯 하면서도 부드럽게 이끄는 목소리와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시던, 단순계산으로만 해도 1년 넘게 저와 함께 했던 그 시간에 제가 저의 처지에 절망하고 열등의식 따위를 가지지 않게 해주시던 분은 그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걸 모두 저의 환상 아니면 나쁜 뜻을 가지고 들러붙은 악령이었다고요?

그리고 오히려 나쁜일은 그일이 지나고 나서 한꺼번에 봇물터지듯 다가왔습니다. 할아버지 회사의 부도와 매각, 직장에서 있었던 자살사건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다 결국 직장을 나온 고모, 할머니와 어머니간의 불화. 그로 인해 도망치듯 친가를 나오고 그때부터 벌어진 끊임없는 부부싸움... 

저 자신으로도 건강해진 것만 빼고는 어려운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2학년때 부터 도둑질의 누명을 받아 2년 내내 도둑놈과 거짓말쟁이로서 따돌림을 받아야 했고, 중, 고등학생 때도 비슷한 사건에 휘말려 심하게 고생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또한 트러블이 많았고요.

모든것이 정리된 지금 사실 그 시절 숙모님은 시설로 갈뻔한 저를 구해주신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신병동과도 비슷했던 그런 시설에 들어가 저도 모르게 자신을 장애를(장애인을 비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고 살면서 인생을 망칠뻔한 그런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기가 희생 하시면서 마지막 가실때는 제 선천적이라고 여기며 절대 벗어난다고 생각 못했던 허약함까지 같이 가져가 주신 것은 아닐까.

비록 저의 예상뿐이고 저는 그분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가족들 조차 그때 봤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도 누군지에 대해 생각도 못할 정도이니, 그것은 정말로 저의 끝 모를 소외감이 빚어낸 환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저를 도와주기 위해 나타난 어떠한 신적 존재인지는 알 수없습니다.

다만 제가 겪었던 경험이 진실이고 그 진실속에서 저는 추악함이나 두려움, 공포 따위는 겪지 않았고 그 경험 만큼은 아직 짧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상은 진실을 대변해 주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대화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더욱 옳지않나 생각해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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