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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또 낚싯대 놀이 하자구?
게시물ID : animal_1786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ynousia
추천 : 4
조회수 : 42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26 22: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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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그래도 야옹이가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다름 아닌 낚싯대 놀이였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입니다.
아...
지금껏 이 녀석이랑 낚싯대 가지고 놀아준 시간을 다 되새김질해보자니 가장 먼저는 한숨만 나오는 까닭도, 그 시간이 정녕 짧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옹이가 잠자기, 멍 때리기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낚싯대 놀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낚싯대로 인한 여러 가지 잡념이나 생각 또한 집사의 머릿속에선 끊이질 않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과연 이 녀석이 이 놀이를 놀이로서 (대리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에 얼핏 봤을 때는, 놀이를 놀이로서 온전히 놀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놀이치고는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낚싯대 놀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야옹이란 녀석은 낚싯대에 달린 물고기 등등의 표면적인 피놀이체에만 신경 쓸 뿐, 정작 그것이 매달린 막대기나 또 그것을 움직이는 집사 따위의 이를테면, 그 표상들의 본질적인 몸통 부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집사는 그런 야옹이를 보며, 집사가 놀이로서 놀리어대는 이 낚싯대의 매트릭스를 정작 이 녀석은 놀이로서 보지 못하고, 그것을 현실인 양, 실제인 양, 믿고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속해서 의구심이 들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이 녀석이 이런 구조를 간파해낸다면, 기필코 낚싯대에 매달린 물고기 따위에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바로 막대기나 집사에게 대들어 끝장을 볼 것이라,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생각으로 충만해 있던 집사에게 이 야옹이란 고양이는, 그저 가끔은 허상적인 세계에 갇힌 허수아비 내지 인형으로밖에는 달리 여겨지지도 않았음을 지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집사와 야옹이는 낚싯대라는 허상을 휘두르고, 실상으로 받아먹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세월은 약이던가...
하루 이틀이 멀다 하고, 매일 한두 시간씩 이 녀석과 낚싯대로 놀아주다 보니, 무언가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집사는 채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쩌다가 가끔은, 이 녀석이 정녕 이게 놀이인 줄 아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할 만큼 무언가 수상쩍은 행동을 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꼭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두루뭉수리하게 불투명한 느낌으로만 머무르는 게, 참으로 거시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성적으로 설명해내기에도 무언가가 충분치 못하고, 그래서 발화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험과 시간이 늘어갈수록 지식의 양과 질은 더욱 뚜렷하고 확정적으로 변모해갔고, 그 녀석의 행동이나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녀석은 그게 분명히 놀이인 줄 알고도 그렇게 실제인 것마냥, 현실인 것마냥, 최선을 다해 뛰고 구르고 하였던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그 녀석과 놀아주는 게 힘들었고, 그래서 낚싯대를 흔드는 것조차 힘이 없이, 정녕 집사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골방에서 잠자고, 멍 때리고 하는 그 녀석이 유일하게 에너지를 분출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낚싯대 놀이를, 그래서 웬만하면 최대한 성실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놀아주는 것을 원칙이자 임무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왔던 집사에게도, 그날은 정말 힘에 부치던 날이었던가 봅니다.
자연스레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도 힘이 없이 비실거리고, 멈춰 있기 일쑤니, 야옹이가 뛰어다닐 맛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러고도 집사는 시정할 생각 없이 계속 앉았으니까, 이 녀석이 갑자기 집사에게 덤벼들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서 잠시 주춤한 채 잃었던 정신을 원 상태로 탑재시킨 다음, 집사는 다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이 놀라운 상황을 복기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낚싯대에 달린 물고기가 낚싯대와 모종의 관계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야옹이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은, 집사 또한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낚싯대에 달린 물고기를 쫓다가도, 어쩔 땐 가끔, 이를테면, 진이 빠져 도저히 낚싯대 놀이를 하고 싶지 않을 때라든지, 할 땐, 낚싯대 그 자체 혹은 낚싯대에 달린 줄을 씹어먹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야옹이가 낚싯대와 물고기와의 관계를 알아채고 있다는 직접적 증거는 될 수 없을지언정, 일말의 의혹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이런 경우를 당했으니, 이것은 또다시 확장하여 돌이켜 볼 문제였습니다.
물론, 낚싯대의 물고기와 낚싯대, 그리고 집사와의 관계성을 전혀 파악하지도 못한 채, 순전히 짜증이 나서 집사를 새로운 놀이의 대체물로 파악하고 덤벼들었을 수도 있고, 그냥 고양이답게 아무 생각 없이 지 기분 내키는 대로 덤벼들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순전히 우연의 찌끄러기가 하필 그 상황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역시나, 이것이 명백한 증거는 될 수가 없었고, 실제로 여러 가지 변인들을 설정하여 수백, 수천 번 과학적으로 실험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란 사실 어불성설에 다름 아닐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집사는 인간의 과학적 탐구 자세와 더불어,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일련의 신비주의적 태도 또한 야옹이를 비롯한 고양이들과 함께 지내며 터득해오고 있습니다.    
분명 과학적, 논리적으로 타당성 있는 근거를 대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그 심정적, 신비적 직관, 혹은 지혜의 샘물을 떨쳐내버리기도 힘든 상황을 여러 번 겪어오면서, 집사는 -최소한 아직까진- 이성적 기능만을 중시하는 과학적 사고가 동물과의 진정한 교감과 이해를 위한 유일한 도구라고는 믿지 않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집사가 지닌 과학적 능력의 한계와 피치 못할 부대 사정상 또 다른 도구를 빌릴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옹이는 정녕 그 몸통을 알면서도, 몸통에 달린 곁가지에 충실한 놀이만을 최선을 다해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한때, 매트릭스가 회자된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로도 유명했었고, 그 개념 또한 여러 과학적 성과를 반영하여 학문의 주요한 이론적 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틀은 사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악명 높고 인기 있던 생각의 변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 매트릭스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영감과 사상의 지평을 제공해왔던 것입니다.
매트릭스를 두고 일단의 인간들은 말합니다.
너희는 단지 허상의 세계에 갇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구조 속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그 허상의 세계를 깨서 실상을 향해 일어서라고.
그것이야말로 진리이고, 그래서 그것이야말로,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집사는 야옹이와 낚싯대 놀이를 하면서 자주 이런 매트릭스를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기실 몸통은 안중에도 없이, 그것이 겉으로만 드러나 팔딱거리는 물고기에만 온 신경을 다 집중시켜 뛰어다니는 야옹이가, 그래서, 그때만큼은 참으로 안되고 딱해 보였으며, 또 그런 모습이 집사의 현실 생활과 오버랩되어 피차 간에 불쌍하고, 동정심이 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 생각을 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옹이는 몸통을 알면서도, 그 진리와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매트릭스를 오롯이 즐기고 있으며, 놀아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 거지 같은 매트릭스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그것을 망치로 깨부수는 것이 다인 줄로만 알았던 집사에게, 이 황송할 만한 야옹이는 정말 집사에게 신세계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매트릭스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즐겁게, 최선을 다해 놀아대는 펠리스 루덴스(Felis Ludens)라니!
기꺼이 신의 세계를 포기하고 자기를 쳐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예수처럼, 그렇게 또 다른 신의 세계를 포기하고 우리 집 골방이란 매트릭스에서 뒹굴고 있는 야옹이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예 매트릭스인 줄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삶을 살아내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들은 이것이야말로 순전히 유희의 세계이자 놀이의 세계에 불과한 매트릭스인 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이 야옹이라니!
그러니, 사망 권세에서 부활하여 신의 세계로 돌아간 예수처럼, 그렇게 여유롭게 최선을 다해 놀다가 언젠가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야옹이에게 집사는 아연함과 거리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래가 이 세계 생명이 아니었음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듯 위대한 동물이었다니!


참으로, 야옹이와 놀다 보면 여러 가지로 깨닫는 게 많습니다.
그게 집사만의 정신병적 과대망상으로 비쳐질지, 아니면 오롯이 인생의 지혜로서 비쳐질지는, 정녕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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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양이의 지능을 과소평가한다.  - 루이스 웨인 - > 

<고양이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보여 줄 필요가 없다. 
  그 방면에선 이미 확실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 제임스 메이슨  - >

출처 http://blog.naver.com/ha_eun_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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