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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중성화에 대한 짧은 소견.
게시물ID : animal_809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똘똘이군
추천 : 17
조회수 : 3881회
댓글수 : 32개
등록시간 : 2014/03/09 13:22:30







중성화.
고양이 커뮤니티 내에서의 식지 않는 떡밥이죠.

베오베에 오른 동게 글  댓글 중 고양이 중성화는 인간이 자행하는 악마의 짓거리다라는 내용이 있어
생각나는 것이 있어 몇 자 적어 볼까 합니다.




제가 가는 동물 병원 수의사님이 
우리집 마마님 중성화를 시키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하며 
수술 당일 눈물 콧물 펑펑 쏟다 운전도 못할 지경에 이른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도 고양이와 함께 살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죠.
 중성화가 그런거예요. 고양이가 사람과 함께 살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마음이 이내 진정이 되었었죠.
반대론자들이 듣기에는 합리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반대론자도, 찬성론자도 아닌 제가 받아 들이기에는 
굉장히 진정성있는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회비용'이라는 뜻인데요.

사람도 고양이의 평생을 같이 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죠.
이를테면 경제적인 희생은 물론이요 
작게는 집안 인테리어부터 시작해 크게는 결혼, 출산, 이사, 가족과의 동거 정도 될까 싶습니다.
고양이로 인해 우리는 카펫을 포기하고 
고양이 알러지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포기하거나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고,
출산시기를 늦추거나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도 종종 있긴 하죠.
고양이를 싫어하는 가족들과의 동거를 포기하고 고양이를 위해 독립을 하곤하죠.
장기간의 여행도 고양이를 탁묘할 수 없으면 포기하기도 하지요.
고양이를 싫어하는 집주인을 피해 집 선택에 있어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도 해요.
제 지인 중 한 부부는 고양이를 키우는데 있어 너무나 좋은 환경의 집을 포기하지 못해 
매년 월세와 보증금을 쑥쑥 올려 내는 웃지 못할 상황의 애묘인들도 있기도 해요.

고양이도 마찬가지예요.
영역동물이긴 하지만 적어도 집보다는 넓고 다양한 환경들,
다른 고양이들과의 교류, 
본능에 따른 발정기와 본능에 따른 출산과 육아 등등
이 모든 것을 사람과 함께 살아감으로서 포기를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사람은 고양이가 주는 정서적 교류를 얻게 되고,
고양이는 안락한 보금자리와 질좋은 먹이를 얻게 되죠.
고양이가 정서적인 만족감을 갖는 것이다라는 것은 제가 고양이가 아니라서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집 마마님을 보자면 다른 고양이와 정서적 교류를 못해 시름시름 앓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본능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그들의 주장은 본능을 사람의 필요에 의해 인공적으로 억누르는 것은 비윤리적 행위다라는 것인데요.
사람과 함께 사는 고양이들, 암컷 경우 교배를 하지 않으면 거의 한달에 한번씩 발정을 한다고 볼 수 있어요.
(고양이들은 봄, 가을에 발정하며 교배를 하지 않았을 경우 2,3주 마다 다시 발정을 합니다)
평균 5마리를 낳는 다고 생각했을 때 봄,가을 발정기에 한번씩만 교배를 해서 새끼를 낳고,
고양이 평균 수명 12년을 고려해 2살부터 교배를 한다고 계산해 보면 고양이 한마리당 총 50마리의 새끼를 낳게 되죠.
50마리의 새끼를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50마리의 새끼가 또 새끼를 일년에 10마리씩 낳을 텐데요.
키우는 것은 물론이고, 적당한 곳에 모두 입양보내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물론 감당하실 수 있는 능력자분들이 분명 존재하시겠죠.
하지만 단 두어마리의 고양이만 감당할 수 있는 중간 능력자분들이 아마 대부분이실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상태의 들고양이들이 수명이 짧은 이유가 아닐까요
상위 포식자의 개체수가 늘어나면 상대적으로 먹이가 부족해지며
그것은 곧바로 기아와 죽음, 결국에는 멸종에도 이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연상태에서는 별 일이 없으면 총 개체수가 일정하게 유지 됩니다.

그렇다고 반대론자들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분명 모든 생명은 인공적인 처치로 본능을 억누르며 사는 것 보다는 
본연의 환경과 본능에 따른 생활이 가장 적합한 것이겠죠.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세상은 원시수렵사냥 사회에서 이미 벗어나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게 되었고,
인간이 차지한 영역에 들고양이들은 이미 집고양이라는 새로운 생활형태를 가지게 되어버렸죠. 
해서 그들은 들고양이가 아닌 집고양이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개체수를 조절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저는 그 방법이 비록 사람 손으로 인공적인 수술을 하지만
그것 또한 집고양이가 환경에 적응해가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까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진화의 한 방법인 거죠.
다른 생명들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 진화해하는 것처럼요.



그럼 이쯤에서 고양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 가둬놓고 -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이지 고양이가 원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집고양이로서 사는 것을 택한 것이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그 주인의 선택이었다라고 하는 주장은 
제 생각에 조금 편협한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이미 고양이는 들고양이와 집고양이로 분류된 상황이고
집고양이도 언제든지 들고양이가 될 수 있고
들고양이도 언제든지 집고양이가 될 수 있죠.
어떠한 상황적 조건만 충족한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고양이들이 들고양이나 집고양이 중 어느 한쪽만을 추구하는 동물이었다면
애초에 그들은 들고양이거나 집고양이 한쪽으로의 생활만이 가능했을 겁니다.
들고양이로만 살 수 있는 동물을 집에서 키운다고 해서 생활이 가능할까요?
무려 고양이인데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프리덤을 외치며 뛰쳐나갔겠죠.
물론 정말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들도 있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고양이들의 선택일 수도 있다는 말인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성화는 같이 사는 사람과 그 환경의 상황에 따른 필요악이 될 수 도 있는 문제라는 것이죠.

저의 예를 들자면
저는 서울 한복판 오피스텔에서 약 3년간 마마님을 모셔왔으나
약 1년전 유학을 결심하고 중성화를 자행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방음도 잘되는 집에 동물을 사랑해주는 친절한 이웃들을 만나 
한달에 많게는 두번씩이나 찾아오는 발정기의 곡소리를 혼자 견뎌내며 무탈하게 잘 살아왔으나,
유학을 결심하고 나서는 상황이 바뀌더군요.
내 집에서 나 혼자 발정기 울음소리를 견디는 것은 문제가 안되나
말도 제대로 안통하는 타국에서 
집주인이나 이웃과의 문제상황, 수의사와의 의사소통등을 고려해보니
중성화는 우리 마마님과 제가 함께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되더란 말입니다.
저는 집 밖으로 나가면 바들바들 떨며 0.1초도 안되는 찰나에 바로 집으로 들어와버리는 마마님을
남의 집에 보내버리거나 장기간 탁묘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이미 마음을 나눈 반려인과 떨어지는 것이 고양이에게 있어 얼마나 큰 공포고 상처라는 것을
저는 일련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만약 제가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중성화를 생각도 안했을 것이예요.
그렇지만 유학을 포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저와 마마님은 같이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던 거죠.
사실 유학건으로 중성화 수술을 한 것은 마마님께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마취약으로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미 함께 살게 된 운명에 놓인 이상 
마마님이 저를 위해 해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무슨일이 있더라도 마마님의 평생을 떨어지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겠다고 결심했구요.

결론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중성화는 '기회비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환경에 따라오는 '필요악'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이죠.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며,
반드시 해서는 안되는 일도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읽으실지는 모르겠으나 
중성화는 악마적 행위다라고 까지 생각하시는 분들이
조금 유연하게 생각하시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한번 길게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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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저는 고양이 한마리가 제 능력의 한계라
원래 중성화를 하지 않고 키우면서 몇년에 한번씩 교배를 해주고
아기고양이들은 입양을 보내려고 했었습니다.

다행히 제 묘연은 품종묘라 입양보내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실정은 품종묘라고 해도 워낙 고양이키우는 분들이 많아져 그것도 쉬운일은 아니게 되었지만요.

게다가 발정나 일주일을 목이 쉴 때까지 울고 안나오는 목소리로 울어대며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헥헥대는데
그것 또한 할 짓은 못되더이다.

그럴려면 아얘 고양이를 키우지 말거나
키우려면 매 발정마다 교배를 해서 그 아기들을 전부 확인된 좋은 집에 입양보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가장 큰 결론적 생각은 절벽의 꽃은 꺾지 말고 두고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것인데
또 저한테 올 수 밖에 없게 된 인연을 내치는 것도 딱히 도리가 아니더군요.
(지인이 도저히 보낼 곳이 없다 하여 모시게 된 마마님입니다.)
해서 어느정도 현실적인 타협이 필요한 경우였습니다.
 


 
스크린샷 2014-03-09 오후 1.27.27.png
이미지 출처 naver.com
오귀스트 르느와르/소년과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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