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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스포] 졸업식 - 아케미 호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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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vangelion
추천 : 0
조회수 : 3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2/15 23:54:42




 방은 현대식으로 기묘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는 현실의 방은 아닌 듯 했다. 어떤 건축가가 꾸민 듯 했고, 일반적 가정집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활하고 있는 방은 아닌지, 일반적인 옷들과 침구류는 보이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사진들이 고전 SF영화처럼 공중에 걸려있다. 그녀는 이따금 공중에 걸린 사진을 걸어내려서 감상하고, 다시 걸어둔다. 다시 걸어두는 위치는 일정치 않다. 그녀 스스로 정리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이, 명백히 혼돈의 움직임이었다. 그 의지는 혼돈의 순수성만큼 질서정연했다. 그건 내팽개쳐 진 것, 혹은 버려진 것이었다.

 바깥의 시간은 알 수 없는 때였다.

 방은 현실 어딘가에서 격리된 공간인양,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녀의 마음 속인 듯 했다. 또는 그녀가 분리한 스스로의 모습인 듯 했다. 어느 쪽에 가까운지는 그녀조차도 모른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방의 주인 그녀는 어린 소녀였다. 오늘은 무슨 행사가 있었던건지, 무수한 세상의 향기가 그녀와 함께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도 존재감을 무수히 뿜어내는 그녀의 안개같은 분위기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만이 모르는 안개 속에서 천천히 수화기로 다가간다. 교복 치마를 한번 쓸어내린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듯이 교복 블라우스도 한번 살핀다. 리본에 붙은 실밥 하나를 찾아서 뜯는다. 길게 흘러내린 왼쪽 머리를 귀 너머로 넘긴다. 도마뱀 하나가 귀에 붙어있었다. 고요히 수화기를 든다. 다이얼 숫자만이 울린다.

 몇 분, 혹은 몇 초의 침묵 후, 그녀는 기쁜 듯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화, 받을 수 있는거야? 괜찮아? 바쁘지 않아? 그래...다행이야. 어쩐 일이냐고? 오늘 졸업식이었는데, 그래도 전화로 마지막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아서. 책상에 올려둔 꽃은 받았어? , 그러게, 미안. 너를 찾을수가 없어서, 그냥 어쩔 수 없이 교실 책상에 둔거야. , 꽃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받은건지 모르겠다고? ...아마 맨 아래 있던 붉은 꽃일거야. , 그래 그거. 잎사귀 없는 그 꽃. 토모에 마미도 왔었지. 인사는 했는데,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거든. 그게 나는 부모님과 사진 몇장 찍고 빨리 돌아오느라, 응응.(왼손으로 수화기를 바꿔들며,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잠시 만진다.) 별 이유는 없어. 그냥, 나는 친한 친구도 없으니까. ? 뭐라고? 아냐, 그럴 리가. , 미안해. 그래......마도카 네가 있었는데 미안해..., 그래, 그러게말야.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리고 미키 사야카? 미키 사야카가 친구였을까...결국 남은 중학교 동안 미키 사야카와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잖아. , 미키 사야카가 나를 신경쓰긴 해줬지만...솔직히 미키 사야카의 친절은 결과가 나쁜 편이었지.(소리죽여 웃는다.) 맞아...뜬금없이 토모에 마미가 열었던 다과회 파티에 나를 끌고 와버렸지. 응응, 모모에 나기사가 나를 보고 무서워했었지. 그래서 다들 당황했고. 왜 그랬는지 알아? ...모르겠지. 근데 나는 잘 알거 같았어...왜냐구? ...그러게. 비밀로 둘까 싶은데.(조금 더 웃는다.) 그래, 그렇네. 이제는 더 함께 하기 힘든 일들이네. 맞아, 어쩔 수 없지. 이젠 졸업인걸...끝이니까. 다시 볼수는 있을까, 서로도 확신할 수 없는거지...슬퍼도. 슬픈걸까, 나도. , 아마도 그럴거 같아. 생각지도 못했지만, 졸업이라는 건 나에겐 처음이니까, . 초등학생일때는 병원 뿐이었지...그 새하얗게 표백된 세계에서 졸업은 했지만, 그건 행복한 이별이었으니까...분명히. 나는 소독약 냄새를...엄청 싫어했거든. 어린애 같지?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음...? , 맞아...며칠 전에 죽어가는 고양이를 묻어줬었어. 검은 고양이였거든..., 검은 고양이. 눈이 감겨있어서 눈 색은 보지 못했어...어째서 구해줬을까? ...그게 구해준걸까? 이미 죽은 시체인걸...맞아, 그 시체가 안쓰러웠어. 그 시체에 꼬이는 파리들과, 시체를 다시금 밟으며 지나가는 차들이 미웠어.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도...그냥...싫었어. 누군가가 떠올라서 그런걸지도 몰라. 대답없는 것을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 그런, 버려진 시체말야. 파리만이 들끓는 그것을....그것을...두고 볼 수 없었거든...미안...졸업식 이야기인데. 너무 우울한가...? 그냥, 떠올라서...최근에 있었던 일은 그런 것 밖에 없었으니까...듣기 싫었다면 미안해.

 (그녀는 표정을 지우고, 잠시 전화기 옆 소파를 바라본다. 시선을 준다. 앉을까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고민은 몇초였으나, 짧진 않았다.)

 아, 미안,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지...? 잠시 딴 생각을 했어...마지막 인사인데, 그러게...미안. 이야기를 계속 했어야하는데. , 이제 고등학생이지. , 그래? 아닐거야, 아마. 나는 생각만큼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고등학교...가서도 조용히 혼자 지내지 않을까?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미키 사야카처럼 겉이나마 밝은 사람이었으면 하기도 했거든...그러니까 말이지...미키 사야카 같은 사람은 스스로의 모습과 행운에 대해 오히려 엄격하잖아...아마도? 타인과도 스스럼 없이 지내고, 동시에 거짓되지도 않지. 속이 사려 깊은 것이...이중적인 건 아니니까. 맞아, 그래. 내가 미키 사야카를 이렇게 칭찬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졸업일이니까 그런거라고 생각해줘. , 그래.(잠시 피로한 듯이 눈을 문지른다.) , 미안. 잠시 눈이 아파서...방 조명이 너무 밝은걸까...조명을 낮춰야겠다 싶으면서도 늘상 잊어버리는 것 같아. , 그래. 나답지 않으려나. 그래도 바꿀 마음이 들지 않더라...왜일까. 이 분위기를 잃는 게 싫은걸까. 어떻게 바꾸건 상관 없는 방이었는데도...막상 바꿔야하지 않을까는 생각은 이어지지 않는 거 같아. 그런 것 있잖아...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 사실은 나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그러니까...힘겹거든. , 힘겨워.(다시 피로한 듯이 눈을 문지른다.) 눈이 계속, 계속 건조하네. ...가끔은 마음대로 뭐든지 휙휙 바꿀 수 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않아? 맞아, 응응...그렇게, 성별이나, 키나, 외모나, 성격도. 방의 모습을 바꾸듯이...원하는대로 마음껏...그런데 말하고 보니 그렇네? 방조차 의지대로 바꾸지 못하면서 나 자신이 바뀌길 원하다니...맞아...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이대로일거야. 변하지 못하고, 변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고, 변할 수 있는 지식만을 가진체 썩어가는 물. 거대한 변화를 하고서도 그 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체된 고인 물 말이야.

 그렇게, 차라리 네가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할 때가 있어. 서로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없는 나의 몸뚱아리는 차라리 절망이라면 절망일테니까. 그러니 이제 졸업해버린거야. 모든 게 끝나버린거야. 그 고인 물은 이제 썩어들어갈거야, 더더욱. 확신할 수 있어. 여지껏 해왔던 것처럼...이를테면 지금처럼. (수화기를 던진다. 선이 연결되지 않은 전화기는 함께 떨어진다. 충돌 소리는 고요하다. 울리지조차 않는다. 송신음은 없다.) 그래, 고통과 증오를 에너지로 삼는 나는 나를 증오하는 걸로 충분할 줄 알았어. 너는 고등학생인 너로 이젠 너의 삶을 향해 찾아가는데, 그것만을 바라온 악마인 나는, 어째서 행복하지 않은걸까. 나는 죽어버리고 싶어져. 그리고 죽여버리고 싶어져! 걸지도 않은 전화에 중얼거리는 미친년이 내가 될줄 누가 알았겠어! (거의 비명에 가깝다. 목소리는 갈라진다.) 악마인 내가 있고, 남은 나는 여신의 조각만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야. 그걸로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그래서 미쳐버린 난 이제 그걸 알아. 미쳐서야 진실된거야. 이제 세상에 인간의 너라는 건 없지. 너는 여신님의 아이니까, 우린 애초에 친구도 아니니까. 이제 졸업인거야. 축하해, 마도카. 네 흔적도 이걸로 끝나버렸어. 그래도, 이래선 안되는거야. 그래, 이제 나는 너를 해체하고 나만의 너를 다시 조각하는거야.(수화기를 짓밟는다.) 피그말리온처럼, 조각에서 졸업해서 인간이 된 너를 바라는거야. 이제 너는 내 바깥에 존재하지 않아

나는 다시금 너를 조각할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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