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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부유
게시물ID : art_27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르트르
추천 : 3
조회수 : 64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2/08 15:18:01
모든 공간들이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나무도, 건물도, 심지어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색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내가 입고 있는 옷 뿐.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눈을 몇차례 비빈 뒤 다시 풍경을 바라보지만 짙은 회색빛의 공간은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순간 공포감이 엄습했다.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로 나는 그저 멍하니 주위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길게 뻗어있는 4차선 도로와 색깔을 잃은 신호등, 그리고 느릿느릿 지나는 자동차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곳에서 벗어나야해.'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이곳을 벗어나야 나의 안위가 보장될 것만 같은 그런 공포감 속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달리는 속도에 따라 사람들과 자동차의 속도도 점점 감소했다. 분명 나는 전력질주로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치 물 속에서 걷는 것처럼 나의 모든 감각이 느려졌다. 다리는 무쇠처럼 무거웠고 아무리 달려도 내내 그 자리였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지만 나는 고작 5미터 쯤을 달려온 셈이었다. 

'내 몸이 왜이러지... 여긴 또 어디야... 아니 무엇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거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먼저 이 곳이 어딘지 먼저 파악해야만 내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와 지금 내게 엄습해 오는 공포감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회색 빛으로 물들어 있지만 이곳은 분명 내가 아는 곳이다. 언젠가 한 번 와봤거나, 혹은 지나가 본 적이 있는 곳임에 틀림 없다. 4차선 도로와 길게 늘어진 가로수, 회색 하늘을 향해 높게 들어선 건물들. 모든 것이 눈에 익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는 도저히 생각나질 않았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교통표지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가 꽤 멀어 그곳에 쓰여진 글자를 읽기는 다소 어려웠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저 표지판이라면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꺼야.'

일단 나는 이곳을 벗어나 최대한 교통 표지판 근처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상하게 달릴때와는 달리 걸을 때에는 주변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일치했다. 몰 속에 있었던 것처런 느껴졌던 저항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빠른 속도로 걸어보자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지만 뛰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표지판 근처까지 이동했다.
표지판에 다다르자 큰 허탈감이 몰려왔다. 표지판의 글씨가 습기찬 렌즈처럼 번져 내용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닥 희망이라 생각했던 표지판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자 좀 전에 느꼈던 공포감은 점점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도망가야해.'

그 순간 내게 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 이곳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 어떤 추격도, 나를 알아보는 이도 없었지만 어금니 뒤편에서 찌릿하게 느껴지는 정체모를 공포감은 나를 사지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뛰는 것은 안돼. 빠르게 걸어서라도.......'

나는 무작정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고 근육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숨은 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몇 시간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뒤를 돌아보면 마치 누군가가 따라올 것만 같은 느낌에 앞만 보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올랐을까. 이윽고 나는 오르막길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흰 빛으로 가득한 그곳에는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돌아가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돌아가라는 것일까? 저건 누구지?'

오르막길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천천히 이동하는 자동차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팔짱을 끼고 골목으로 향하는 커플, 모두 어디선가 한 번쯤 봤던 사람들처럼 익숙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는 계속 움직이지 않은 채로 돌아가라는 제스쳐만 취하고 있었다. 

'저 흰 빛으로 가야해. 저곳으로 가야 안전할꺼야. 이곳은 위험해.'

주먹을 불끈 쥐고 흰 빛을 향해 한발을 내딛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내게 외쳤다. 

"돌아가라. 부유하는 자여. 그대가 잃어버린 길은 이곳이 아니다."

검은 그림자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등을 돌려 흰 빛안으로 스며들었다. 

"자...잠깐만요! 여긴 어디죠? 당신은..."

나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한발 내딛었지만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저...잠깐만요! 기다려!"

흰빛으로부터 불어온 강력한 바람에 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바람의 강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바람과 함께 내 손가락 끝이 분자단위로 부서지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바람은 내 손가락부터 시작해 손, 팔, 발끝 순으로 나를 불어냈다. 

'살아야해. 저 흰 빛으로 들어가면 난 살 수 있을거야. 일어나야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몸은 산산히 부서져 흩날렸다. 나는 내 몸이 흩날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보라가 휘날리듯 내몸이 가진 색채들이 회색 풍경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 순간 온 몸이 붕뜨는 듯한 느낌과 함께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한줌 모래처럼 흩날렸다. 내 귓가(귀라는 것은 이미 형체가 사라지고 난 뒤였지만)에 잔잔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스티비원더의 Ribbon in the sky. 평소 내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술에 취한 밤이면 귀가길에 언제나 이 노래를 들어왔다. 가로수 사이를 거닐며 듣는 음악은 언제나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나는 이 노래를 너무나 좋아해 알람소리로도 지정해 둘 정도였다.

'잠깐. 알람소리? 이거 혹시 꿈인가?'

눈을 뜨자 6시 30분을 알리는 휴대폰의 알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차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목했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 나는 알람을 끄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천정에 거뭇거뭇한 얼룩이 지금 이 공간이 내 방임을 증명해주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꿈. 뭔가 신비로운 그 꿈의 공간 속에서 느꼈던 공포감의 여운이 잔잔하게 남았고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마른세수로 잠을 떨쳐버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월간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젯밤 회의 준비를 하느라 새벽까지 일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원래 몸이 피곤하면 요상한 꿈을 꾼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개꿈'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어젯밤 겨우 마무리했던 회의 준비자료를 서류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 

"너무 피곤한데. 꿈도 거지같은 꿈을 꿨더니 잠을 잔 것 같지도 않네."

정신이 돌아오면서 점점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앞에서 파워포인트와 씨름을 하고 있었고 새벽3시에 겨우 작업을 끝낸 나는 씻지도 않은 채 거의 실신하다시피 침대 위로 쓰러졌던 것이다.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으며 지난 밤 꿈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현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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