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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극 '춘향'입니다.
게시물ID : art_284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유네임
추천 : 1
조회수 : 10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1/05 17: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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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춘향

나오는 사람들
춘향  어사  변사또  몽룡  호방  월매  향단  방자  수령들  사령들  역졸들  하인들  기녀들  향반들  상민들

제 1 장

막이 오르면, 동헌. 변사또 생일잔치가 파장될 무렵. 대청마루의 교자상에는 빼곡히 차려졌던 산해진미가 처치 곤란할 듯싶게 남아 있고, 너른 마당을 빙 둘러 놓여 있는 개다리소반들에도 푸짐한 상차림의 흔적인 남은 음식들이 보인다.

교자상 앞에는 변사또를 비롯한 고을 수령들이, 개다리소반들 앞에는 각 마을 대표로 초대된 향반들이 앉아 있다. 향반들 뒤로는 구경꾼으로 참석한 상민들이 겹겹이 둘러서 있다. 모두들 마당 중앙에서 펼쳐지는 기녀들의 흥겨운 가무 구경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허름한 선비 옷차림의 어사가 불쑥 들어선다. 그러자 사령들이 달려들어 어사 앞을 가로막는다.

[어사]  (소리 높여) 원님 생신 감축드리는 시 한 수 지어 올리기 위해서 서울에서 왔습니다.
[호방]  누가 보내서 왔소?
[어사]  시 속에 답이 있는데요.
[호방]  (변사또에게) 시문에 능한 선비인가 본데 감히 나으리들 안전에서 서울을 들먹이며 큰소리치는 걸 보면 든든한 뒷배가 있나 싶기도 해서 한 상 차려주고 시 한 수 읊어보게 하겠습니다.
[변사또]  답 없는 놈이라면 볼기 한 대 쳐서 쫓아내게.
[호방]  알겠습니다. (손짓으로 대청마루 발치를 가리키며, 어사에게) 여기에 와 앉으오.
[어사]  (호방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걸터앉으며, 변사또를 향하여)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상다리뿐만 아니라 허리가 휘어져라 진수성찬을 차리셨네요.
[변사또]  흥을 깨트린 벌칙은 곤장 한 대일세. 단, 자네의 시가 기대 이상이라면 벌칙 대신 상급을 내리겠네. (혼잣말로) 운자를 뭐로 내줄까?
[어사]  운자는 제가 준비해왔는데요, 기름 고(膏) 높을 고(高)로.
[변사또]  고 하겠다 고? 무조건 고?

(어사 앞에 주안상과 지필연이 놓여진다.)

[어사]  (주안상을 밀어 놓으며) 안 먹고 고 하겠습니다.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단숨에 써내려간다. 그러고는 일어나) 전 급한 볼일이 있어서...... (달아나듯 퇴장한다.)
[변사또]  (호방에게) 지레 겁먹고 술 한 잔도 못한 채 줄행랑치는 걸 보니 시 속에 답은 없고 웃음보따리만 들어있나 보다.
[호방]  소인이 웃음보따리를 풀어보겠습니다. (시가 적힌 화선지를 집어들고 읊어나가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
[변사또]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나. 보따리가 잘 안 풀려?
[호방]  (떨리는 목소리로) 해석하여 읊겠습니다. 금동이의 향기로운 술은 천 명의 피요, 옥소반의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변사또와 수령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변사또] (손을 내밀고) 대체 어떻게 해석한 거야?

(변사또가 화선지를 건네받아 꼼꼼히 살펴보는데 수령들이 몰려들어 시구를 응시한다.)

[수령1]  시 속에 답이 있지?
[변사또]  시건방진 넋두리에 과장된 풍자가 방랑 시인 같지 않아?
[수령1]  그런 것도 같은데, 난 이만 가야겠네, 배탈이 나서, 엊그제 우리 고을 잔칫집에서 과식하는 바람에.
[변사또]  요즘 하도 가짜들이 많으니까......
[수령2]  많지. 그런데 나도 가봐야겠는데, 오늘이 장모님 제사라.
[수령3]  나는 여기 올 때부터 오한이 나더니 두통까지......
[수령4]  여보게들, 이유보다 비상구부터 찾아야 돼.
[호방]  뒷문으로 빠져나가버리면 됩니다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열쇠를 찾으려면...... 사령들한테 문짝을 들어올리게 하면 개구녕이 생기는데, 거기로는 열쇠 없이도 바로 통과되는데요.
[수령4]  고맙네. 애물단지 취급했던 개구멍이 이토록 귀하고 고마운 존재일 줄이야.
[수령1]  부사, 혹시 묻거들랑 단지 의례적인 참석이었다고 말해주게.
[수령2]  친하다고도 하지 말고.
[수령3]  우리한테 불똥 튀지 않게 해주기를 꼭 부탁하네.

(수령들, 너도나도 허겁지겁 뒷문 개구멍으로 향한다.)

[변사또]  (쓴웃음 지으며) 한 놈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나버렸네, 변치 않는 평생 우정을 외치며 다짐했던 놈들이. 도처에 널린 게 친구인데, 그 흔한 친구들 중에서도 절친한 친구들만 초대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구나, 맙소사!
[호방]  그것이 세상인심의 한계입니다. 산술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을 듯이 명확합니다.
[변사또]  그래,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파직당할 것 같으니......
[호방]  어떻게든지 봉고파직만은 막으셔야 합니다.
[변사또]  손 쓸 겨를도 없어 속수무책이잖은가.
[호방]  (변사또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소곤거린다.)
[변사또]  (굳었던 표정이 풀어지며) 이제 보니 내 진정한 친구는 자네구만.
[호방]  소인이 말씀드린대로만 된다면 수령님들도 다시 돌아오고 친구분들도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변사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걸세, 내가 그들을 거부할 테니까. 자네도 보았듯이 친구는 결국 한 놈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나버리거든.
[호방]  세상 사람들 누구나 결국엔 혼자가 돼버리더라구요. 진정한 친구보다 더한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고 해도 실질적인 도움은 못되던데요.
[변사또]  그렇긴 하지. 한데 그 선비양반 혹시 이몽룡을 닮지 않았던가?
[호방]  전혀 다른......
[역졸들]  (목소리) 암행어사 출도여! 암행어사 출도하신다!

(육모방망이를 든 역졸들이 마패를 들어 보이며 들이닥치자 잔치는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역졸들 주도로 잔칫상들이 치워지며 장내가 정리된다. 그 와중에 호방은 참석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무언가를 당부한다.
드디어 사모관대에 청색포로 갈아입은 어사가 군관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다. 그는 변사또의 영접을 받으며 대청의자에 올라앉는다.)

[어사]  이번 어명을 받들어 남원 고을을 염찰한 결과, 부사는 직권을 남용하여 조세의 징수와 납부를 불공정하게 집행하고 있으며 그러는 과정에 아전들은 협잡을 부리며 이득을 취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부사는 사적인 식솔들을 지나치게 많이 거느리고 있고 그들은 공무에 관여하며 수뢰를 일삼는 등 폐단이 발생하고 있는 사실도 밝혀졌다. 게다가 부사는 직무는 등한히 하고 주색잡기로 소일하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부정 비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고초를 겪고 있으며 부사에 대한 원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호방]  (변사또에게 속삭이듯) 나으리, 얼른 말씀하세요이.
[변사또]  어사또 나으리, 염찰 결과에 대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사]  말하시오.
[변사또]  나으리께만 자세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어사]  가까이 와서 말하시오.
[변사또]  (어사에게 다가가) 나으리, 제가 얼마나 직권을 남용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혀 왔는지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나으리께서 출두하시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듯 깨달았습니다. 지적된 사항들은 모두 즉각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깊이 반성하며 근신하겠습니다. 그러니 시정 조치 이후에 주상전하께 서계를 올려주시기를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나으리.
[어사]  서계는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소.
[변사또]  그럼 관행을 그대로 따르는 것만이라도 감안해주시면......
[어사]  어떤 관행을 따른다는 겁니까?
[변사또]  제 사적인 문제 주색잡기 외엔 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직무는 육방에 모두 맡기다시피 하고 있거든요, 그들이 전문가이고 지적하신 대로 제가 직무에 등한해서요. 조사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출납 문서를 비롯한 모든 장부의 기록도 전임자들의 선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장부를 가져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어사]  아니오, 잠시 후 내가 관고와 장부를 대조해보겠소.
[변사또]  그러시지요. 나으리,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지적 사항들을 시정하게 하시고 다시 염찰하셔서 시정 결과도 주상전하께 아뢰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나으리의 은혜에 결초보은하겠습니다. 보은할 수 있는 역량도 저에게 충분히 있습니다, 재물로나 인맥으로나.
[어사]  암행어사는 그 어떤 보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변사또]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법과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보은하겠습니다. 나으리께서 이미 염찰하셨을 줄 압니다만, 저희 집안은 청나라와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토대로 당파를 넘나들며 넓고 두터운 인맥을 쌓았습니다. 제가 지방에 나와 있는 건 뒷배가 없어서가 아니라 제 방랑벽 때문입니다. 여기도 제가 자원해서......
[어사]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시오. 그리고 민심을 지켜봅시다. 후속 조치는 민심에 따라 결정하겠소.
[변사또]  알겠습니다, 나으리. (제자리로 돌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어사또 나으리의 지적 사항들은 모두 제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이며 즉각 시정하겠습니다. 지적 사항들 중엔 관행을 그대로 따르는 것들도 있습니다만 더 이상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조세의 징수와 납부는 누가 봐도 수긍할 수 있도록 형평성을 잃지 않고 공정하게 집행하겠으며 아전들을 철저히 관리 감독하겠습니다. 제 혈육 외 식솔들은 모두 내보내겠고 식솔들의 공무 관여와 수뢰도 전면 차단하겠습니다. 아울러 깊이 반성하고 근신하며 직무에만 전념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어사또 나으리!
[좌중]  (응원 구호를 외치듯 일제히) 간청드립니다, 어사또 나으리!
[어사]  암행 염찰의 목적은 징계이기보다는, 주상전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민심을 견실하게 하고 굳게 결속시키기 위함이니,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적극 시정하려는 부사의 진지한 자세와 간곡한 호소 그리고 여기 모인 백성들의 일치된 찬동을 정상 참작하여 부사에게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추후 다시 염찰하겠소. 그리고 이 같은 처결을 전하께 아뢰겠소. 다음번 염찰 후에 올릴 서계는, 어느 어사가 담당할지 모르지만, 부사에 대한 고을 백성들의 원성이 칭송으로 변했다는 내용이 되기를 기대하겠소.
[변사또]  고맙습니다, 어사또 나으리!
[좌중]  (응원 구호를 외치듯 일제히) 고맙습니다, 어사또 나으리!
[어사]  그럼 한 가지 사건만 더 짚고 넘어가겠다. 내가 염찰한 바에 의하면 부사가 춘향이라는 여인에게 수청을 강요했고 여인은 수청을 거부하다가 옥에 갇혀 있으며 오늘이 재판 날짜인데, 그 재판을 내가 맡겠으니 여인을 대령하라.
[호방]  춘향이를 대령하랍신다.
[사령들]  예.
[변사또]  나으리, 그 사건은 사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사]  여인이 나오면 대질해 봅시다.

(사령들, 춘향을 부축하여 들어온다. 몽룡과 월매와 방자와 향단이 그 뒤를 따른다.)

[호방]  춘향이 대령했습니다, 나으리.
[어사]  춘향이는 듣거라. 무엇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지 진술하라.
[춘향]  저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습니다. 그날도 평소대로 예비 시어머니께 드릴 치마와 저고리를 짓고 있는데 난데없이 사령들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로 끌고 가더구만요. 무슨 까닭인지 물어도 그저 사또 나으리의 명이라고만 할 뿐이었습니다.

제 2 장

변사또가 동헌의 대청의자에 앉아 있고, 그 곁에 호방이 관기 명부를 들고 서 있는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해지다가 멈추더니 사령 둘이 춘향을 데리고 들어온다.

[사령1]  춘향이 대령했습니다, 나으리.
[변사또]  이리 오르라 해라.
[사령1]  예. (춘향의 팔을 잡아끌어 대청마루에 오르게 한다.)
[변사또]  (춘향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사내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얼굴이로구나! 소문대로......
[호방]  (목에 힘주고) 소문대로가 아니라 소문만복래가 맞습니다.
[변사또]  이거 봐, 겸손하고 총명한 호방도 갑자기 붕 떠서 잘난 척하며 바보가 돼버리잖아.
[호방]  소인은 나으리께서 춘향이 앞에서 고사성어 실력을 과시하시는 줄 알고 그만...... 소문대로라는 고사성어는 없거든요, 소문만복래는 있어도.
[변사또]  물러가 있거라.
[호방]  예, 나으리.

(호방과 사령들 퇴장하고, 대청마루에 주안상이 놓여진다.)

[변사또]  (주안상 앞으로 옮겨 앉으며) 여기 내 옆에 앉거라.
[춘향]  사또 나으리,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변사또]  앉아 봐, 그럼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춘향]  그냥 서서 알고 싶은데요.
[변사또]  널 좋아해서 불렀다는 말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할 수 있겠느냐, 술 한 잔이라도 걸친다면 모를까?
[춘향]  저 기녀가 아닙니다.
[변사또]  그럼 나도 사또가 아니니까 편히 앉아.
[춘향]  대비정속하여 기생 신분에서 벗어난지 오래 됐는데요.
[변사또]  대비정속은 편법적인 관행일 뿐이다. 법대로 조사하면 다 걸려. 하지만 그 누구도 널 조사 못하게 할게, 남원 고을에서만큼은 내 말이 법이니까. 앉아라, 너를 기생이 아닌 우리 고을 백성 대표로 초대하는 걸로 할 테니까.
[춘향]  저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이런 자리가 너무 부담되고 가위 눌리는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변사또]  곧 적응하게 된다.
[춘향]  제가 혼례 준비 중이기 때문에 적응이 안 되거든요.
[변사또]  혼례 준비에 대한 것까지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우선 앉아.
[춘향]  (변사또 옆에 앉는다.)
[변사또]  너에 대한 소문 많이 들었다.그래서인지 무척이나 친근해 보인다, 너랑 터놓고 방귀 뀌어도 될 것 같을 만큼. 널 본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가슴 벅찼던 첫사랑의 기억이 떠오르더구나. 그런 의미에서 술 한 잔 따라 봐라. (빈 잔을 내민다.)
[춘향]  나으리, 저는 유부녀입니다.
[변사또]  내가 유부남이니까 나랑 터놓고 지내겠다고? (침묵) 사또한텐 유부녀가 아니라 요조숙녀라도 술을 따르는 거다.
[춘향]  (잔에 술을 따른다.)
[변사또]  (잔을 비우고, 술을 채워 춘향에게 돌리며) 내 술도 한 잔 받아라. 이런, 빈 잔을 쥐어주고 술을 따라줘야 하는 건데, 미인 앞이라 당황했다. 네가 기어이 나까지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구나. 잔 받아.
[춘향]  술 못 마십니다.
[변사또]  술잔 받을 줄도 모르느냐?
[춘향]  (잔을 받아 상에 내려놓는다.)
[변사또]  너도 나에 관한 소문 들었지?
[춘향]  무슨 소문요?
[변사또]  여자 문제와 관련된 소문들.
[춘향]  잘 모르겠는데요.
[변사또]  잘 몰라도 듣기는 했지? (침묵) 내가 확언하건대 진작 널 만났더라면 난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내가 여색을 탐한 것은 너를 찾아 헤맨 과정이었다.
[춘향]  저는 구관 사또 나으리의 자제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변사또]  나도 이 전부사와는 막역한 사이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춘향]  아직 정식 혼례는 못 올려서......
[변사또]  그건 백년가약이 아니라 한때의 동거 생활이었다.
[춘향]  혼인각서도 받아놨습니다.
[변사또]  휴지 조각을 받아놨군, 사회 질서에 어긋나는 각서는 아무 효력도 없는데.
[춘향]  각서는 지 어머니가 받았습니다, 저는 반대했는데, 지들의 사랑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변사또]  지엄한 반상 제도 앞에선 그 사랑도 휴지 조각밖엔 안 돼.
[춘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는데, 사랑으로 반상 제도인들 극복 못하겠습니까?
[변사또]  술도 안 마시고 술주정하네. 하긴 미인이라면 그렇게 술주정하며 객기 부릴 만도 하지, 모두들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한때일 뿐......
[춘향]  제가 말하는 사랑은 외모와는 상관없는 사랑입니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랑이나 아내나 남편의 사랑 같은......
[변사또]  그리고 변사또와 춘향이의 사랑 같은......? (춘향을 끌어안는다.)
[춘향]  (재빨리 몸을 일으키면서) 그건 아닙니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으리.
[변사또]  네가 이대로 간다면 거역관장하는 죄를 짓는 거야.
[춘향]  어느나라 법인가요?
[변사또]  우리나라.
[춘향]  고을 백성이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법이 있나요?
[변사또]  사또에겐 대비정속을 취소시킬 권한이 있다. 그게 우리나라 법이야. 그에 따라 내 말 한마디에 넌 곧바로 관기 신분으로 복귀된다. 단, 네가 대비정속 때 납부한 것은 관에서 보상해줄 것이다.
[춘향]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시방 혼례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인데요. 여기도 시어머니께 드릴 치마와 저고리를 짓다가 끌려왔습니다.
[변사또]  몽룡이는 양반집 딸과 혼인 준비하느라 바쁜데......
[춘향]  저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변사또]  몽룡이가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너와 혼인하면 사당 참배도 못하고 벼슬길도 끊기고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지기 때문에 널 버리고 양반집 딸과 혼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
[춘향]  부모님을 설득하여 저랑 혼례 올리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변사또]  그건 빌 空자 공약이다. 공약을 믿어선 안 된다는 건 일반 상식이야. 봐라, 상식대로 널 남겨 놓고 가버렸잖느냐.
[춘향]  혼례를 올리려면 과거급제부터 먼저 해야 하기 때문에......
[변사또]  과거급제하면 몽룡이는 양반 중에서도 사대부가의 규수와 혼인하게 된다. 네 앞에는 반상 제도의 장벽이 한층 더 높아질 뿐이고. 넌 반상 제도의 피해자이지만 몽룡이는 수혜자이고 넌 반상제도를 극복해야 하지만 몽룡이는 수호하고 따라야만 한다. 그만큼이나 처지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떠나버린 거야. (일어서며) 몽룡이도 네가 수청 들기를 바라고 있어.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길 바라고 있단 말이다. 그게 양반 남자의 마음이야. 현실을 직시하고 수청 들어라. 그러면 몽룡이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주고도 남을 금은보화 가득 담긴 패물함을 당장 네 품에 안겨주마. 내가 장안의 부자 변사또다.
[춘향]  그런 귀한 선물을 받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많이 있는데요.
[변사또]  잘 알고 있구나. 아주 길게 줄 서 있지.
[춘향]  한데 저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그이와의 사랑으로 마음의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변사또]  기어이 네가 몽룡이와 혼인하겠다면 신분 상승을 해야겠구나.
[춘향]  그런 문제도 이미 논의했습니다.
[변사또]  큰돈 드는 문제라 몽룡이는 해결할 수 없어. 모든 재산은 몽룡이 아버지 앞으로 되어 있는데 기생 딸과의 혼인을 위해서 기둥뿌리가 흔들릴지도 모를 정도의 큰돈을 쏟아 부을 부모는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나만이 할 수 있다. 혼례 올리기 전까지만 남몰래 수청 들어라, 내가 널 양반으로 신분 상승시켜줄 테니까.
[춘향]  나으리, 지 어머니에게 말해 보면 천하일색 기녀도 구할 수 있을 텐데요.
[변사또]  천하일색? 네 공약도 몽룡이 뺨친다. 너도 급했구나. 몽룡이의 공약이 이해되느냐? (침묵) 기녀 고르는 문제에 관한 한 네 어미보다 내가 더 전문가야. 내가 팔도를 전출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기녀들을 겪어본 줄 아느냐?
[춘향]  나으리께서는 여자들한테 질려버렸겠는데요.
[변사또]  질렸다기보다 허탈감이라고 할까? 사내놈들은 모두 하나같이 날 부러워하는데, 정작 난 허탈감에 빠져들고 있으니 아무래도 네가......
[춘향]  그런 문제는 다른 여자를 멀리하시고 마님만 사랑하시면 되는데요, 제가 의술을 좀 배웠거든요.
[변사또]  조금 배웠으니까 그렇게 어설픈 진단을 하지, 네가 수청 들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을.
[춘향]  그렇다면 그냥 수청 들었다고 치시면 쉽게 해결되겠네요, 의술이나 산학에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 해결됐으니까 (후다닥 동헌을 빠져나가며) 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변사또]  게 섰거라. 여봐라! (침묵) 호방!
[호방]  (목소리) 예. (무대로 들어온다.)
[변사또]  (대청의자에 앉으면서) 당장 춘향이를 잡아 와 형틀에 앉혀라.
[호방]  예. (사령들에게) 당장 춘향이를 잡아 와 형틀에 앉히랍신다.
[사령들]  (목소리) 예

(춘향을 잡아 오는 사령들, 형틀을 갖다 놓고, 그 위에 춘향이를 앉힌다.)

[춘향]  사또 나으리, 이서방이 저를 구해주러 올 것입니다. 험난한 세파를 반드시 극복하고 암행어사 마패를 내보이며 나타나서 공정하게 재판하여 저를 풀어줄 것입니다.
[변사또]  아주 소설을 쓰는구나. 몽룡이의 정확한 집 주소나 말해 봐라.
[춘향]  아직 거처를 수소문하고 있는 중인데요.
[변사또]  너에게 연락처도 안 남겼니?
[춘향]  예, 너무 경황없이 떠나버리는 바람에.
[변사또]  넌 그것이 동거녀를 떼어버릴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것도 모르느냐?
[춘향]  이서방이 오면 사실 여부를 바로 알 수 있을 텐데요.
[변사또]  그런데 출두 통지서를 보내도 오기는커녕 불응할 게 뻔하니, 기다리다 세월 다 가겠고...... 인심이나 쓰자. 오늘 하루만 수청 들어라. 나도 많이 양보했으니 너도 조금만 양보해라?
[춘향]  기왕 인심 쓰시는 거 오늘 하루만 더 쓰시죠.
[변사또]  그래, 오늘 하루 더 인심 쓸 테니까 수청 들어라? 어쨌든지 수청은 들어야 하니까. 수청을 끝내 거부하면 수청 들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모진 고신을 당하게 된다,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수청 들어야 한다. 그럼 수청 드는 걸로 하고......
[춘향]  수청을 거부하는 것이 지어미의 도리입니다.
[변사또]  지어미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너는 지어미의 도리 이전에 지엄한 국법을 어겼다.
[춘향]  국법을 어기다뇨?
[변사또]  반상 제도를 어긴 죄! 거역관장한 죄! 도리보다 국법이 우선한다. 국법을 어기면 엄벌에 처해진다.
[춘향]  이서방이 와서 지들 혼인에 대하여 증언해줄 때까지만 늦춰주십시오.
[변사또]  엿장수 맘대로? 난 엿장수가 아니라서 늦출 수가 없구나. 몽룡이가 와서 널 위해 증언해줄 것 같았으면 내가 너를 부르지도 않았다. (사령들에게) 주리 틀어라.
[사령들]  예.
[춘향]  당사자의 증언을 들어보기도 전에 예단만으로 고신하는 것을 정당한 처사라 할 수 있을까요?
[변사또]  예단이 아니야, 우리 사회 통념이지.

(사령들, 춘향을 형틀에 묶는다. 주릿대를 춘향의 다리 사이에 끼우려는 순간, 공포에 질린 춘향이 비명을 지른다.)

[춘향]  악!
[변사또]  너 날 웃기려고 하니? 아직 주리 틀지도 않았는데 비명부터 지르면 어떡해. 순서가 틀렸잖아. 술도 안 마시고 술주정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너의 본심이 너무 급한 나머지 순서도 못 가리고 외친 거야, 주리 틀기 전에 빨리 수청 들라고.
[춘향]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단지 주리 트는 게 겁나서 외쳐버린 겁니다.
[변사또]  왜 그런 겁나는 고통을 자초하니, 수청만 들면 세상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데?
[춘향]  수청 들지 않는 여인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는 꿈이거든요.
[변사또]  꿈 깨. 그리고 수청 들어.
[춘향]  그러면 고통보다 더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사또 나으리!
[변사또]  수청 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주리 틀어라!
[사령들]  예!

(사령들, 주릿대를 비튼다.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점점 거세게 비틀어대는 주리에 마침내 춘향이 기절하고 만다.)

[사령1]  혼절했는데요, 나으리.
[변사또]  깨어나면 옥에 가둬라.
[사령1]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변사또]  (호방에게) 자네가 요령껏 회유해봐, 겁박도 해가면서, 어떻게든 수청 들도록, 이몽룡에게는 즉각 출두 통지서를 보내고.
[호방]  예, 나으리.

제 3 장

제1장과 같은 무대.

[몽룡]  어사또 나으리, 소인이 춘향이의 남편 이몽룡입니다.
[변사또]  자네가 이몽룡 확실한가?
[몽룡]  예.
[변사또]  출두 요구에 매번 불응하더니 어찌 왔는가?
[월매]  쇤네가 사방팔방 찾아댕기면서 혼인 각서를 보여주며 억울함을 하소연하다가 신문고까지 두드렸다고 하니께 그제서야 겨우 와부렀네요.
[변사또]  어사또 나으리 앞에서 허위 증언하면 엄벌을 받는다네. 누구나 훤히 알고 있는 자네의 혼인에 관하여 허위 증언하여 신세를 망쳐서야 되겠는가, 앞길이 창창한 사대부가의 자제가. 이제라도 이실직고하게.
[몽룡]  (어사에게) 사실은 소인이 춘향이에게 혼인 약속을 했습니다만......
[월매]  혼인 각서도 쇤네가 갖고 있습니다, 어사또 나으리. (품에서 각서을 꺼내 보인다.)
[몽룡]  하지만 소인의 부친께서 극구 반대하시는 바람에...... 부친께서는 춘향이와 저에 관한 모든 걸 이미 속속들이 알고 계셨더라고요. 부친의 갑작스런 서울 전출도 저희를 떼어놓기 위해서였고, 비밀리에 저와 대갓집 규수의 혼인을 추진하셔서 혼례 날짜까지 정해 놓으셨더군요. 결국 어찌할 도리 없이 혼례를 치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춘향이 남편이라 증언한 것은,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이에게, 사적으로 사과했습니다만, 공적으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옥에서 구해주기 위해서였는데, 그럴 생각에만 급급한 나머지 허위 증언을 간과한 점을 어사또 나으리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어사]  춘향이와 이몽룡과의 관계가 해소됐다고 해도 춘향이가 부사에게 수청 들 의무는 없소. 이에 대한 부사의 견해를 들어보겠소.
[변사또]  저는 사또로서 춘향이를 본래의 신분인 관기로 복귀시키려고 합니다.저희 관아에 관기가 부족하고 춘향이는 관기로서의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사또로서 춘향이가 수청 들기를 요구합니다. 그에 따라 춘향이는 반드시 수청을 들어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어사]  내가 염찰한 결과 관기가 크게 부족하진 않던데요.
[변사또]  다른 건 몰라도 관기만은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사정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나으리.
[어사]  춘향이는 정절을 지키는 것이 관기가 아니라 여염집 규수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않았나요? (침묵) 정절은 여인의 지상계율로 나라에서도 적극 장려하며 강제하고 있잖습니까.
[변사또]  자질보다는 신분이 우선하는 우리 사회라...... 저는 지엄한 반상 제도에 따라 춘향이를 관기로 복귀시키려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나으리. 그리고 춘향이가 대비정속하며 납부한 것은 제 사비로 보상해주겠습니다, 관고를 일절 축내지 않고.
[어사]  나라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는 걸 알고 있소?
[춘향과 향단과 방자]  (동시에 놀라며) 그런 법이 있나요?
[변사또]  알고는 있습니다만......
[어사]  기녀로 하여금 관원에게 몸을 바쳐 시중들게 하는 수청은, 원리 원칙대로 따져 보면, 그 법 조항을 어기는 범법 행위이오.
[변사또]  그것은 사실상 사문화된 지 오랜 법 조항이고, 그런 수청은 일반적인 관행이 됐습니다, 나으리.
[어사]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것이 암행어사의 임무입니다.
[변사또]  어사또 나으리의 말씀을 깊이 유념하여 그 법 조항에 따라 춘향이를 관리하겠습니다.
[어사]  관기가 되고 싶어 하는 노비들도 많이 있잖습니까. (침묵) 그녀들 중에서 관기로 선발하여 부족한 관기를 부족하면 되잖습니까. (침묵) 춘향이에게 묻겠다. 너는 이제라도 관기로 복귀하거나 변부사의 수청을 들 의사가 있는가?
[춘향]  전혀 없습니다.
[어사]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춘향]  부디 저를 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사또 나으리!
[어사]  그럼 이 사건에 대한 처결을 내리겠다. 그동안의 염찰 결과를 비롯하여 부사와 춘향이의 주장과 증인 이몽룡의 증언을 종합하여 판단하고, 이를 근거로 처결하건대 춘향이에게 무죄를 결정하고 즉각 방면을 명한다.

(춘향 일행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월매]  (덩실덩실 춤추며) 얼싸 좋네!
[향단과 방자] (월매를 따라 춤추면서) 얼쑤!
[어사]  이것으로 규찰을 마치겠소. 사적으로 확인할 사항이 있는 춘향이 사건 관계자 이외는 모두 나가주시오.

(잔치 참석자들, 퇴장한다.)

[어사]  우선 춘향이는 여기 대청마루로 와 앉거라, 불편할 텐데.
[춘향]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가 편합니다.
[어사]  (대청의자에서 내려와 춘향 곁으로 다가가서) 고난 속에서도 정절을 지키는 너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사적으로 질문 하나 해보겠다. 신랑감을 다시 찾아야 할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남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침묵) 너의 이상형이라든지 혼인 조건이라든지......
[춘향]  어사또 나으리, 저를 풀려나게 해주신 것은 참말로 너무 고맙습니다만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양반은 도시 일반이네요.
[어사]  양반의 무엇이 도시 일반이라는 거니?
[춘향]  하나같이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거든요, 저를 노리갯감으로 여기면서.
[어사]  나는 널 아냇감으로 여기고 말하고 있다.
[몽룡]  저 역시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요, 아냇감으로 여긴다고. 그리고 이 사람은 저랑 동거했던 여자입니다.
[변사또]  사실상 혼인 관계였죠.
[어사]  알아요. 그리고 이해합니다.
[변사또]  지엄한 반상 제도를 나으리 역시 거스를 수 없습니다.
[몽룡]  없다마다요. 반상 제도 하에서는 그 누구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한낱 작은 뗏목일 수밖에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어사]  뗏목을 둘이 함께 노 저어 가는 배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몽룡]  그렇잖아도 제가 그렇게 바꾸려고 합니다. 반상 제도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소실이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을 제 소실로......
[춘향]  (격앙된 어조로) 그건 사랑이 아녜요. 사랑에는 현실적 대안이 없어요!
[몽룡]  우선은 이 사람의 상처난 마음부터 치유해야 하기 때문에 상처가 아물면 소실 얘길 꺼내려고 했는데......
[변사또]  자넨 새파랗게 젊은 데에다 신혼이라 소실 얘길 꺼내려면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어. 하지만 춘향 낭자가 내 소실이 되기만 하면 즉시 입주 가능하고 몸만 들어오면 된다네. 그리고 놀부도 그토록 탐냈던 금은보화 가득 들어 있는 화초장을 비롯한 최신 가구들이 갖춰진 고래들 같은 기와집에서 당장 실질적인 안방마님 자리를 꿰차고서 떵떵거리며 살게 될 걸세. (춘향을 향하여) 낭자, 그동안 가혹하게 대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춘향]  사또 나으리의 사과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사]  소실로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인가?
[춘향]  예. 그 누구의 소실이 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월매]  소실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겄다고 지헌티도 징하고 겁나게 강조했습니다, 어사또 나으리.
[어사]  난 소실이 아니라 정실로 맞이하려 한다네.
[변사또]  그건 빌 空자 공약이라는 것이 이미 입증됐는데요.
[몽룡]  제가 산증인입니다.
[어사]  아, 예. 한데 난 입장이 다른데요. 내 부친께서는 며느릿감의 집안 문벌이나 재산보다는 사람 됨됨이를 먼저 보시는 데에다 벼슬길 따위는 초개같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월매]  그렇다면 우리 춘향이가 어사또 나으리께 꼭 들어맞는디요.
[어사]  나 역시 그리 생각돼서 춘향이에게 물어봤던 거라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공개 청혼을 하고 싶지만 우리 사회의 체면 문화 때문에 형식과 절차를 갖춰서 중매를 세워 정식으로 청혼하려 하는데......
[월매]  중매는 지가 전문잉께 지가 아조 기양 중매까지 서겠습니다.
[어사]  이런 어머니 말에 춘향이는 이의 없는가?
[춘향]  (들릴락말락하게) 예.

제 4 장

고갯마루 오솔길.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너럭바위가 있다.

등짐 진 하인 둘이 길을 따라 들어와 무대를 가로질러 나간다. 뒤이어 춘향이가 어사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다.

[어사]  (걸음을 멈추고) 저기 역참 보인다. (하인들에게) 어이, 잠시 쉬어 가세.
[하인들]  (목소리) 예.

(바위에 걸터앉는 춘향과 어사.)

[어사]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네. 집들이 작은 장난감 같아 보이지?
[춘향]  동헌도 그런데요. 위압감을 주려고 일부러 거대하게 지은 건물 같았는데. 동헌 안의 사람들은 개미만큼이나 작아 보이네요.
[어사]  그렇군. 우리가 저 장난감 집에서 치열한 개미싸움 끝에 사랑을 쟁취하고 나왔네. 그런데 저기에서 청혼할 때 알려줬어야 하는 말이 있는데, 당신이 이몽룡과 변부사를 하도 단호히 거절하기에 주눅 들어 여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는데, 실은 내가......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야. 쪼들리는 살림 속에서도 과거시험을 준비한답시고 허구한 날 책상 앞에만 붙어 앉아 지내니까, 더는 못 견디겠던지 아내가 집을 나가버렸어, 치근덕대던 사내놈과 바람난 것이 더 큰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춘향]  당신 목소리 흉내 내볼게요. (목소리를 굵게 내며) 알겠어요. 그리고 이해합니다.
[어사]  (웃음을 터뜨리며) 고마워, 당신이 버럭 화낼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 가지 더 고마운 건 내 목소리 흉내 낸다는 거 미리 알려준 거. 안 알려줬더라면 누구 목소리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못할 뻔했는데. 당신은 전혀 다른 목소리로도 쉽게 성대모사 할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었군. 우리가 처음 본 순간 기억나? 당신이 옥에서 끌려나왔을 때.
[춘향]  남자는 역시 외모보다는 능력이구나 했죠.
[어사]  내 외모에 실망했다는 말이로군. 난 당신 같은 여자가 내 아내라면 어사 감투도 포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 당신과 함께라면 노루 토끼 같은 초식동물들만 뛰노는 초원이 펼쳐진 시골로 가서 농사지으며 살아도 참 좋을 것 같단 낭만적인 생각이 한참을 맴돌더라니까.
[춘향]  그런데 농사지으면 낭만은 사라지고 바가지들만 보일 거예요, 고생바가지, 아내 바가지. 당신이 어사니까 청혼을 바로 승낙했지......
[어사]  하긴 나도 당신이 미인이니까 청혼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굳이 하나만 콕 집어 말한다면, 당신은 내 직업을 보고, 난 당신의 얼굴을 보고 혼인했네,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혼인이 설명되지는 않지만. 진짜 내가 꼭 집고 싶은 건 당신의 정절이거든. 남원 고을에서 가장 유심히 염찰한 것도 당신의 정절이었고. 그 어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여인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순수한 정절임을 확인한 순간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던지...... 한데 당신의 정절이 그토록 내 심금을 울렸던 이유는 전처가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어. 그렇지 않았더라면 늘 그랬듯이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심코 지나쳐버렸을 텐데. 이런 우리의 인연이야말로 천생연분이지?
[춘향]  (미소 짓는다.)
[어사]  뭐해, 맞장구치지 않고.
[춘향]  장구가 있어야 맞장구치죠. (방백) 맞장구치고 싶지만 혹시라도 우리가 거센 세파를 헤쳐 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에......
[어사]  이럴 때 당신 어머니와 향단이와 방자까지 함께 얼쑤했어야 하는데...... 물 갖고 왔지?
[춘향]  먹을거리도 가져왔어요.
[어사]  가서 함께 요기나 하지.

(어사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춘향,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가는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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