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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현 시점에 깨지지 않을 MLB 기록들 11.시즌 희생타(비극)
게시물ID : baseball_1179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키와장
추천 : 1
조회수 : 2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9/13 17: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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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기록: 1917 레이 쳄프먼 67 
2000: 2004 로이스 클레이튼 24 

네, 압니다. 희생타는 과거의 유물이죠. Old- School 야구의 대표주자인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기록을 들고 온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실제 경기에 큰 의미가 있던 없던 기록이라면 다루겠다고 했기 때문에, 
두번째는 기록의 보유자가 야구 역사상 최악의 비극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메이저리그 4대 비극으로 '칼 메이스의 저주', '블랙삭스 스캔들', '메이저리그 파업', '약물 파동'을 뽑은 글을 보았습니다. (인종 차별이 빠져있군요.)
이 사건들은 모두 야구의 존망을 위태롭게 했던 사건들이죠. 하지만 그 중 '칼 메이스의 비극'은 그 궤를 달리 합니다. 

1920년 8월 16일 폴로 그라운드. 당시 자이언츠의 홈구장에서 셋집살이를 하던 양키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경기가 열렸습니다. 2위 클리블랜드가 71승으로 1위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2경기 차, 3위 양키스가 70승으로 3경기 차였던 상황에서 열린 3연전의 첫 경기였죠.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인디언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양키스의 언더핸드 에이스 칼 메이스가 4회까지 3점을 내주면서 좋지 못한 모습이었죠. 그리고 시작된 5회. 1번타자 레이 채프먼이 타석에 올랐습니다. 

채프먼은 아직 젊은 선수였지만 3시즌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한 유격수였죠. 시즌 52도루의 빠른 발과 매끄러운 수비, 무엇보다 시즌 희생타 기록을 수립한 작전 수행능력이 빼어났습니다. 그는 몰랐겠지만 이미 통산 희생타에서 6위에 오른 상태였죠. 빌 제임스는 그가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다면 명예의 전당에도 갈 수 있었을거라 평가했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도 밝고 원만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메이스가 던진 스핏볼이 그의 머리로 향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투수 앞까지 굴러가자 메이스는 방망이에 공이 맞은 줄 오해하고 1루로 서둘러 송구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 공이 맞은 곳은 채프먼의 머리. 오른쪽 눈동자가 튀어나오는 등 끔찍한 모습의 그는 1루로 발걸음을 때려는 듯 보였으나 곧바로 쓰러졌습니다. 채프먼이 맞은 줄 인지하지 못했던 메이스, 스트라이크 존 안쪽으로 들어온 체프먼의 잘못이라 주장하고 있던 양키스의 감독을 놀라게 만든 장면이었죠.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된 채프먼은 다음날 새벽 4시, 두개골 골절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사망 원인으로는 몇가지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당시, 헬멧과 같은 보호장비는 자율적으로 착용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겁쟁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멸시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채프먼이 머리에 쓰고 있던 것도 천 모자였죠. 또한 스핏볼이 잘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볼에 씹는 담배의 즙등을 묻혀 던진 스핏볼은 거무튀튀했을 뿐 아니라 움직임이 괴상해서 머리로 날아올 것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공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규칙이 없어서 공은 흙먼지가 묻은 채였죠.

이 사고는 사고의 당사자들인 채프먼과 메이스 뿐 아니라 야구계 전체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 주게됩니다. 

우선 공을 던진 칼 메이스는 살인 용의자로 수사를 받게 됩니다. 중요한 경기에서 3실점하자 분노한 그가 채프먼에게 빈볼을 던졌을 거라는 주장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가 수사 받는 동안 다른 팀들, 특히 그가 일찍이 몸 담았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를 야구계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선수 생활 내내 살인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죠.

다행히 (?) 그는 1920년 26승, 이듬해 27승으로 다승 1위에 오르는 등 통산 3021.1이닝을 던지며 207승 (126패) 2.92의 성적을 올리는 등 이후에도 변함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개의 다른 팀 (보스턴, 뉴욕, 신시네티)에서 20승을 올린 첫 투수가 되었죠. 하지만 타자들의 시대에 훌륭한 성적을 남겼음에도 이 사건의 영향으로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5%에 그쳐 탈락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심심찮게 보이던 언더핸드 선발 투수가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요, 이것이 언더핸드 투구의 한계 때문일지 이 사건의 영향력일지는 이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한편 메이저리그는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한 규정을 신설하게 됩니다. 우선, 공이 더러워질 때마다 새 공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또한 스핏볼은 비합법적인 투구로 규정되어 당시 스핏볼을 사용하던 투수를 제외하고는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헬멧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는데요, 이는 곧바로 시행되지는 않고 후에 또 다른 스타, 미키 코크레인이 머리에 공을 맞은 후유증으로 은퇴하자 논의가 진행되게 됩니다. (그는 7년 후 사고의 휴유증으로 사망합니다) 1950년대에 가서야 헬멧 착용이 의무화 되고 1970년대에 가서야 귀를 덮는 헬멧이 나오게 되죠. 이 사고가 안전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 것입니다.

한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 겸 선수 트리스 스피커는 선수들을 다독이며 채프먼의 꿈이었던 우승을 선물하자 말했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리그 1위에 오르게 됩니다.
채프먼의 사망 이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그를 추모하는 뜻으로 검은색 팔 밴드를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습니다. 채프먼의 빈 자리를 메꾼 유격수는 당시 신인이었던 조 슈얼. 조 슈얼은 훗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됩니다.

"He lives in the Hearts at all who knew him."-클리블랜드 옛 홈구장 리그파크에 걸려있던 팻말


기록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레이 채프먼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이야기여서 적었습니다. 희생타 기록 (67개) 자체는 깨질 수도 없고, 누구도 시도하지 않을겁니다. 현대의 통계, 특히 세이버 매트리션들의 분석은 한 베이스를 진루하는 것보다 '아웃되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한 요소로 두니까요. 또 지명타자의 도입이 세이프티 번트와 같은 희생타를 감소시켰습니다. 도루와 희생타를 중심으로 한 '스몰볼'은 점차 자취를 감출 전망입니다. 올해의 메이저리그가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죠.
30세 이하의 선수 중 '통산' 희생타가 67개를 넘은 선수도 없습니다.


경신 가능성: 전무. 경신할 필요성을 누구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가능한 선수: 올드-스쿨한 구단주가 단장과 감독까지 겸임해 보았습니다!
라면 가능할지도... 그래도 현 시점에서 희생타를 강조할 사람이 팀을 맡지는 못할 것입니다.

참고 자료: 레이 채프먼은 월터 존슨의 그 유명한 '2구 삼진'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언터쳐블한 패스트 볼 두개가 한 가운데로 연속해서 들어오자 그는 타석을 벗어나 벤치로 돌아갔고 의아해 하는 심판에게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라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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