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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핫피플] 비운의 농구스타 현주엽의 인생 고백
게시물ID : basketball_47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양웬리중장
추천 : 6
조회수 : 391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11/21 11:21:53
[이영미의 핫피플] 비운의 농구스타 현주엽의 인생 고백
기사입력 2014-10-16 15:20 |최종수정 2014-10-1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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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엽이 돌아왔다. 프로농구 해설위원으로. 아직은 부족한 게 많지만, 조금씩 적응 중이라는 그를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났다.(사진=MBC스포츠플러스 제공)

한시대를 풍미했던 농구 스타의 은퇴 후 인생은 시끌벅적했다. 믿었던 친구에게 수십 억 원의 투자 사기를 당해 소송이 불거졌고, 음주운전으로 불구속 입건되면서 사회면이 들썩거렸다. 선수 시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정점에 있다가 은퇴 후 불미스런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농구인들 사이에선 그의 이름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코트가 아닌 마이크 앞으로 돌아왔다.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을 맡아 농구장을 찾게 된 것이다. 이전에도 방송국에서 여러 차례 해설위원 제안을 받았지만, 선뜻 농구계로 발을 돌리기가 어려웠다는 이 사람, 현주엽(39)을 정말 어렵게 만났다.

신기성 하나외환은행 코치와 현주엽은 고려대 동기이다. 현주엽이 농구인들과 거리를 두고 있을 때도 두 사람은 계속 만남을 가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기자는 신 코치에게 현주엽과의 연결을 부탁했었다.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언론에 나타날) 준비가 아직 안 됐다’였다.

그러다 지난 9월 16일 현주엽이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데뷔전(?)은 ‘2015 KBL 신인 드래프트’ 중계였다. 2009년 은퇴 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난 현주엽이었다. 그동안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현주엽. 그를 둘러싼 사건 사고들이 알려졌지만 현주엽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지 않았다. 다시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현주엽을 만날 수 있었다. 단, 인터뷰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가 내세운 조건이었다. 인터뷰는 질문과 대답으로 정리한다.

#1. 해설위원으로 돌아오기 까지

결국에는 해설위원으로 돌아왔다.

“사실 끝까지 고민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 좀 더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김동광 감독님이 계속 밀어붙이시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다. 감독님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어려웠다.”

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나.

“(서)장훈이 형이 전화해선 ‘너, 해설한다는 얘기 진짜야?’하고선 웃음을 터트리더라. 장훈이 형은 내 스타일을 아니까, 내가 해설한다는 기사를 믿지 못했던 거다. 그래도 주위에서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신)기성이는 작년부터 해설 얘기를 꺼냈었다. 당시엔 그 친구도 해설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신이 서질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결국 일을 냈다. 스승인 박한 선생님께서도 전화로 잘 해보라며 반가워 하셨다. 처음이니까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배워나간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중이다.”

직접 중계석에 앉아 보니까 어떠하던가.

“난 경기를 볼 때 그 팀의 좋은 점 보다는 문제점이 더 많이 보인다. 해설하면서 문제점만 들추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 방송국 측에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용기를 주더라.”

은퇴 후 농구 관계자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정말 친한 사람들 하고만 만났다. 그중에서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이 기성이다. 좀 더 담을 쌓고 지냈어야 했는데….^^”

그동안 TV로 농구 경기는 시청했었나.

“은퇴하고 2년 동안 농구는 단 한 게임도 안 봤다.”

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진짜다. 농구인생의 마지막을 너무 아쉽게 마무리했다. 그래도 선수라면 내가 뛰는 이 경기가 선수생활의 마지막 경기라는 걸 알고 뛰었어야 한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면서 그렇지 못했고, 결국엔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를 결정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애써 웃음을 보였지만, 마음은 회한으로 가득했다. 그런 미련과 아쉬움 때문에 농구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떠났나. 2010년 미국에서 스포츠의학을 공부한다며 출국했었는데.

“타이틀은 스포츠의학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실제 미국에서 살려고 떠났었다. LA에 이모님들이 다 거주하고 계셔서 주저 없이 LA로 향했다. 아시다시피 LA에는 프로팀이 전지훈련도 오고, 선수들도 훈련을 위해 시즌 마치고 많이 찾아온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내 전화번호를 모르니까 감독님들이나 선수들도 직접 연락을 하지 못했다. 농구를 떠났고, 당분간 농구를 잊고 살려 했기 때문에 LA에서 농구와 관련 없는 사람들만 만나며 나름 자유를 만끽했다. 정말 좋더라.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부상으로 은퇴한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그런 굴레를 만든 건가.

“뭐랄까. 배신당한 느낌?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 농구였다. 그 농구에, 그리고 농구인들에게 배신 당한 느낌이 컸다. 그로 인해 상처가 꽤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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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같은 팀에서 뛰다가 다른 팀이 되었던 서장훈과 현주엽. SK 시절에는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꽤 치열했었다.(사진=연합뉴스)

#2. 서장훈과의 인연, 그러나…

잠시 프로 입단 첫 해로 돌아가 보자. 1998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당시 청주 SK나이츠에 입단했다. 당시 SK에는 휘문고 1년 선배인 서장훈이 존재했다. SK 안준호 감독이 드래프트 구슬 뽑기에서 1순위 지명권을 받아 들고선 ‘우승이야’를 외친 일화가 유명하다. 왜냐하면 현주엽을 지명하면 서장훈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안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1998년 11월 시즌 도중 경질되고 말았으니까.

“고등학교 때만 해도 장훈이 형이랑 포지션이 겹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대 4년 동안 장훈이 형을 상대하기 위해 센터를 맡게 되었고, 프로 입단 후에는 포지션이 겹치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장훈이 형에게 지면 안 된다는 욕심이 있었다. 결국 시너지 효과보다는 문제점만 노출시켰고, 안준호 감독님 이후에 부임한 최인선 감독님으로선 팀의 발전을 위해 나를 트레이드 카드로 쓸 수밖에 없었다. 1999년 12월 24일, 일명 ‘크리스마스 이브의 빅딜’이 그렇게 해서 성사됐다. 골드뱅크로 조상현에다 현금을 얹어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당시엔 트레이드 자체가 기분 좋을 리 없었지만, 팀을 옮긴 이후에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골드뱅크에서 활약하며 농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패스의 중요성, 게임의 흐름을 읽고 조절하고 진행시키는 부분을 배웠다. SK에 남아 있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중요한 ‘반전’이었다.”

당시 트레이드가 단행되면서 SK 최인선 감독과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었다.

“감독님과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단,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감독님이 장훈이 형한테 약했다. 장훈이 형을 배려하고 존중하려다보니 다른 선수들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내가 최 감독님이었다고 해도 서장훈과 현주엽 중 현주엽을 트레이드 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가고 그 해 SK는 그토록 바라던 우승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남아 있었다면 우승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였다.”

선수 생활하면서 유니폼을 여러 차례 갈아입었다.

“생각해보니 진짜 그렇다. SK-골드뱅크-코리아텐더-KTF-LG. 그런데 트레이드 한 번, FA 한 번이 전부였다. 골드뱅크, 코리아텐더, KTF는 모두 같은 팀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팀을 옮기며 여러 감독님들을 만났다. 덕분에 감독님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감독님들은 팀을 맡으면 대부분 다루기 부담스런 선수나 나이 많은 선수를 내보내려 한다. 고참들과 대화를 통해 그들이 후배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감독님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설명해 나가면 되는데, 일부 감독님들은 자신이 쓰고 싶은 선수, 데려오고 싶은 코치들을 뽑기 위해 고참들에게 거리를 둔다. 그러다보면 나이 먹은 선수들은 트레이드나 은퇴를 해야 하고, 은퇴 후 할 일은 없게 되고…. 스스로 은퇴를 준비하고 결정해야 하지만, 대부분 떠밀리듯이 은퇴를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다시 농구를 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지난해부터였다. 농구 경기 보는 게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고향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농구를 떠나려야 떠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연스레 후배들의 경기를 집중해서 봤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수들도 보이고, 노력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보이는 후배들도 있는데, 우리가 농구할 때처럼 악착같이 달려드는 ‘독종’은 보이지 않더라. 우리 때보다 체격도 좋고 화려한 플레이를 선호하지만, 개인기가 부족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시즌에 가장 눈에 띈 선수가 김민구였다. 지금은 안타까운 사고로 재활 중이지만, 내 눈에는 김민구가 정말 농구를 잘 하는 선수로 보였다.”

2010년 모교인 고려대 농구부 감독으로 추천을 받았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학교측 고위 관계자가 집에 까지 찾아오셨지만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반대를 많이 했다. 아직 때가 아니니 유학을 가는 게 옳은 선택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LA로 떠난 것이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민형이 형이 고려대 감독으로 부임했고, 지금 대학농구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 있다. 내가 만약 그 당시 모교 감독 자리를 수락했었다면? 민형이 형처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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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LG에서 은퇴를 한 현주엽. 당시 기자회견에는 무릎 수술로 인해 목발을 집고 나타났었다.(사진=연합뉴스)

#3. 은퇴 후의 파란만장한 사연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아픈 얘기를 끄집어내야 한다. 괜찮겠나?

“인터뷰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 궁금한 건 다 물어봐도 좋다.”

현주엽 인생에 가장 지우고 싶은 숫자가 ‘2009’라고 들었다. 2009년 은퇴도 했고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생긴다고 하는데, 내가 딱 그런 상황이었다. 2009년 초에 무릎을 다쳤고, 수술을 받기로 돼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농구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3월 시즌이 끝날 즈음에 회사(LG 구단)로부터 1년 정도 쉬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사실상의 은퇴 종용이었다. 그러다 4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임종 전에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명예 회복을 하고 은퇴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 유언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전부였다.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존경했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돌아가시자 세상 모든 일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싶었지만, 구단의 압박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엔 은퇴를 결정한 것이다.

그즈음에 어렸을 때부터 나의 모든 걸 얘기하며 조언도 구하는 등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은퇴가 그 친구를 더 자주 찾게 된 계기가 됐다. 은퇴 후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막상 사회로 나오려다보니 두렵고 겁이 났다. 그 친구에게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학 가기 전인 2009년 그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 S선물에 다니는데, 거기에 돈을 맡기면 그 수익으로 미국에서의 생활비는 충분히 벌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내가 갖고 있는 돈 전부를 맡겼다.”

액수가 상당하더라. 농구하면서 모아둔 돈을 모두 친구에게 맡길 만큼 믿음이 대단했다는 의미인 것도 같다.

“내가 가장 좋아했고 신뢰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120% 믿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소개한 선물 회사의 직원이 처음에는 수익금으로 돈을 보내왔다. 그러다 미국으로 떠난 후 어느 시점부터 돈이 입금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돈이 나도 모르게 그들 마음대로 개인 투자를 하거나 투자자들의 ‘돌려막기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당시 난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심각하다는 판단에 서둘러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것이다. 그때부터 소송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법원까지 올라간 소송에서 S선물로부터 투자금의 절반 정도만 보상 받는 걸로 확정됐지만, 난 돈과 친구를 잃었다. 돈 앞에선 ‘친구’가 얼마나 부질없는 단어인지를 깨달았다. 내가 힘들 때, 어려울 때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를 해준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현실을 마주했다는 게 정말 가슴이 아팠다.”

소송을 결정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게 무엇이었나.

“사람을 잃었다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렇게 잘못한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고 사는 세상이 싫었다. 소송을 하게 되면 언론에 알려지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안줏감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돈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벌 받는 걸 택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인간의 바닥을 봤다. 엄청난 돈이 걸린 소송이다 보니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더라. 그런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 지난해에는 음주 운전으로 여러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반성도 많이 했고, 뼈저리게 후회도 했다.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상황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농구계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그냥 선수도 아니었고, 한때 이름을 날리던 선수였기 때문에 은퇴 후 겪은 일련의 일들이 솔직히 창피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냈는데 주위에서 그 담을 하루라도 빨리 허물어트리라고 조언해줬다. 무엇보다 현주엽이 ‘비운의 스타’로 기억되는 건 막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설위원 제안을 받았고, 고민하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다. 농구 코트는 아니더라도 농구장에 내가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흐뭇해하실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어머니에게 이런 얘길 하셨다고 하더라. 주엽이 덕분에 행복하게 살았다고. 아버지에게 직접 말씀 드리진 못했지만,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라서 행복했다. 은퇴 후 좋지 못한 모습만 보여드려 죄송했는데, 앞으로는 아버지가 좋아하실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다.”

현주엽에게 농구 해설은 어떤 의미인가?

“농구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다리’가 되길 바란다. 나의 전부였던 농구를 아픈 마음이 아닌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처음 하는 해설이라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지만, 조금 시간을 갖고 지켜봐주시면 차차 적응해 가면서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식견이 해설을 통해 나타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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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윤은 지금 어디에?(사진=연합뉴스)

#4. 회자정리 거자필반

2002년 10월 14일 부산 사직체육관. 부산아시안게임 농구 결승전에서 맞붙은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층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4쿼터. 경기 종료 3분17초를 남기고 한국은 중국에 71-84로 지고 있었다. 사실상의 패배가 굳어지는 분위기. 그때 벤치에선 김승현과 현주엽이 교체 투입하면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재치있는 드리블과 빠른 패스로 공격에 활기를 더한 김승현은 현주엽과 호흡을 맞춰 무더기 득점을 엮어내기 시작했고 중국의 포인트가드 류웨이를 철통같이 봉쇄해 공격을 둔화시켰다.

종료 22초 전 현주엽의 과감한 골밑슛이 터지면서 85-90을 만든 한국은 김승현이 또 한 번 가로채기를 해 문경은에게 연결했고, 이때까지 단 하나의 3점포도 성공하지 못했던 문경은은 통렬한 3점포로 화답하면서 격차는 2점으로 좁혀졌다. 17초 전 자유투를 얻은 중국의 슈터 후웨이동이 자유투 2개를 모두 실수한 것은 한국의 승리를 예견하는 일종의 신호였다. 리바운드를 낚아챈 한국은 현주엽이 4.7초 전 골밑을 파고 들어 레이업슛을 성공, 동점을 만들면서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기가 살아난 한국은 연장전에서 서장훈이 이날 2개째 3점포를 터뜨려 첫 역전에 성공한 데 이어 현주엽의 연속 득점과 김승현의 번개 같은 패스에 이은 문경은의 골밑슛으로 종료 1분49초 전 99-94까지 달아났다. 중국은 종료 21초 전 101-100까지 추격하며 저력을 과시했고 다시 승부는 모를 일이 됐다.

시간 끌기 작전에 들어간 한국은 종료 3.1초 전까지 무사히 공을 돌린 뒤 문경은이 중국의 반칙으로 얻어낸 자유투 중 첫 번째를 실패했으나 두 번째를 성공, 102-100을 만들고 중국의 마지막 공격을 앞 선에서 봉쇄해 극적인 승리를 낚았다. 한국 농구가 '만리장성' 중국을 무너뜨리고 20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연합뉴스 2002년 10월 14일자 참조)

현주엽은 농구인생의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을 꼽는다. 후반에 교체 투입돼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한 그로선 장신 중국을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감격과 감동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매직히포’, ‘한국판 바클리’, ‘포인트 파워포워드’. 한국 농구의 전설로 회자되었기 때문에 은퇴 후 그가 보인 모습은 그도 또 팬들도 아픔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회자정리’(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기 마련) 다음에는 ‘거자필반’(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이다. 어렵게 결정해서 돌아온 만큼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위로받기를 바란다. 해설위원이든, 또 다른 형태이든, 그가 농구장에 남아 있다면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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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엽은 농구를 '고향'이라고 말한다. 그 '고향'에서 이젠 위로받기를 바란다.(사진=MBC스포츠플러스 제공)



출처 :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ketball&ctg=news&mod=read&office_id=380&article_id=00000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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