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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성격,기개 모든게 완벽하셨던 조선 비운의 왕자 '이우'
게시물ID : bestofbest_1071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365일공복
추천 : 457
조회수 : 40445회
댓글수 : 0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3/04/25 04:44:58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4/23 19:41:33

 

'이우' 왕자님에 대해 알고 계세요?

 

 

 

 

<어릴 적 이우 왕자의 모습>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 강' 의 차남입니다.

 

아버지 의친왕을 닮아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총명했으며 대한제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무척 강하여 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위하셨던 분입니다.

 

 

 

 

 

이우 왕자를 알고 계시는 분들은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잘생긴 왕자' 라는 생각일텐데요,

 

정말 말그대로 요즘 외모에도 전혀 뒤지지 않을정도로 수려하고 멋진 얼굴입니다.

 

 

 

 

짙은 눈썹,쌍커풀이 있는 눈, 오똑한 코와 어느 하나 못났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얼굴이네요.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 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주변 황실 가족들을 틈틈히 잘 챙겨주어 내에서는 '운현궁 오라버니' 라고 불리었다는군요.

 

 

 

 

 

일본 학교 다니실 적.

 

주변 사람들을 모두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요즘으로 치면 원빈과도 같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우 왕자만 눈에 들어옵니다..ㅎㅎ

 

 

 

 

 

양복 입은 모습도 멋지시구요.

 

 

 

 

이우 왕자는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해서 무척이나 힘쓰셨던 분이신데요,

 

그에 따라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와 일본인들을 굉장히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에겐 무서운 호랑이처럼 사납게 대하셨으나, 반대로 우리 조선인에게는 온화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셨다고 합니다.

 

이우 왕자에 대한 평가에 따르면,

 

 

경성유치원의 보모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 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고 평하였다.[67][68]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은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 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셔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인다.”고 평하였다.[68]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타케히코(朝香宮孚彦王)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고 말하였다.[57]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2]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하였다.[57]

조선일보매일신보의 사회부 기자로 활약한 김을한은 “이건 공은 온화한 분이라 문제가 없지만, 이우 공은 측근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라는 이왕직 회계과장 사토의 말을 언급하며, 일본인 사무관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이우가 그만큼 영특하다는 반증이므로 만만찮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평하였다.[69]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는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평하였다.[70]

 

<출처: 위키백과>

 

 

이렇게 평판이 자자할정도로 굉장히 올곧고 신념이 확실하신 분이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에 관한 일화를 말하자면,

 

 

 

일본군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 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챈 후 보상을 해주지 않아

그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 왕자에게 호소했다.


이 호소를 들은 이우 왕자는 그 즉시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 취소를 요구.

이를 들어줄리 없는 일본인. 공사 취소요구를 거절하자 이우 왕자는

그 일본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고.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

이 위협으로 이우 왕자는 결국 목적을 달성.

-

 

 

또, 이우 왕자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또 한번 놀라움을 자아냈는데요,

 

 

일본은 황제의 자손인 이우 왕자에게 '일본여성'과 결혼할 것을 강요.

독립운동가인 유동렬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으나, 황족과 독립투사 가문의 결혼을 일제가 강렬히 반대.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한 이우 왕자는 결국 친일파 대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

 

이 때 친일파 대신의 손녀는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 였습니다.

 

 

 

 

 

 

 



대한 제국의 황복으로서 일제의 요주 감시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굽힘이 없었으며,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사용하고, 술자리에서는 당시 금지곡인 '황성옛터' 노래를 불렀다고.

일제의 장교로 근무한 이우 왕자는 동기인 이형석에게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

조선의 황족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

 

 

이우 왕자에 관련된 일화들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느끼는거지만,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우 왕자는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계셨는데,

 

'이 청' 과 '이 종' 입니다.

 

'이 청' 씨는 현재 살아계시지만, 동생분인 '이 종' 씨는 이미 1960년대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더군요.

 

 

 

 

왼쪽부터 이우 왕자, 아들 이 청, 부인.

 

 

 

 

사진 속에서 아들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네요.

 

 

하지만 비극은 일찍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1945년, 34세의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 원인은,

 

 

1945년 6월 10일중좌로 진급되었으며[53] 본토결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54]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16] 운현궁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윤원선(尹源善), 김을한(金乙漢) 등을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고 걱정하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55]

 

1945년 7월 16일에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고, 며칠 후에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하였다.[55] 8월 6일, 이우는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2]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이우는 그날 오후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相生橋)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되었다. 그날 밤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 섬(似島)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자정이 넘으면서 급속도록 상태가 악화되었고, 8월 7일 새벽에 고열로 신음하다가 사망하였다.[2][


<출처: 위키백과>

 

 

원인은 히로시마에 투여됬었던 그 끔찍한 원자폭탄 사건이였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애통했습니다. 조금만,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광복이 되었을텐데..

 

나라가 해방되는 모습을 미처 보시지 못한 채 떠나가신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결국 이우 왕자는 나라가 해방되던 8월 15일 그날, 조선의 땅에 묻혔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우 왕자가 살아계셨다면,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하네요.

 

그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도 많이 받으셨다고 해요.

 

 

굉장히 작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들 '이 청' 분의 사진입니다.

 

 

 

 

 

역시나 아버지의 외모를 많이 빼닮은게 보이네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으셨던 분.

 

올곧고 높은 긍지를 가졌던 그 모습이 대단히 존경스럽습니다.

 

이우 왕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고 자기 자신을 오로지 나라에만 바쳤던 분들을 생각하니 괜히 찡 해지기도 합니다.

 

 

 

 

 

이우 왕자의 사진으로 끝마무리를 하며...

 

 

그런데 정말 잘 생기셨습니다..10초동안 멍하니 쳐다본듯...^^;;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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