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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한국 경제를 망친 원흉
게시물ID : bestofbest_1667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라마
추천 : 347
조회수 : 30314회
댓글수 : 0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4/06/23 16:05:25
원본글 작성시간 : 2014/06/21 14:11:00
본문에선 만주 독립군 토벌 장교 활동, 남로당 간부 활동,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선갑도 사건, 실미도 사건, 북파 공작원 1만명 파견, 대공분실, 서빙고분실, 남영호 사건, 미니스커트 단속, 주입식 반공세뇌 교육, 학교 군사화 등 박정희가 자행한 수도 없이 많은 인권 유린은 싣지도 않았다.
 
 
"경제 개발 전략도 없던 박정희"
 
 
1961년 6월 13일, 워싱턴에서는 이 날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 한국 문제 태스크 포스팀>이 작성한 종합 보고서는 미국이 한국을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로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
둘째, 미국의 국가적 위신이 걸려 있다.
셋째, 특히 일본을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
 
결국,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이 위험해지고 미국의 태평양 방어 라인은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결국, 북한이 없었으면 오늘날 남한도 없었다는 말은 미국의 이러한 남한 원조 동기와 박정희의 수탈에서 나온 말이다. 북한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1961년 6월 13일, 미국의 엘리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한국의 경제 개발 계획과 근대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1961년 11월 3일, 케네디는 USAID(국제개발처) 조직을 탄생시켰다.
 
이 기구의 임무는 친미 국가 계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1961년 11월 14일, 박정희는 워싱턴에 있는 케네디를 방문했다. 특별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회담 도중 박정희는 특별 원조를 요청했다.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서를 작성중이다. 특별 안정 기금으로 2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해달라."
 
그러나 케네디는 꺼려했다.
 
석달 전, '버거' 주한 미대사는 박정희에게 직접 경고를 보냈었다.
 
"당신들이 만든 경제 개발 계획서는 현실성이 없다."
 
버거의 말은 정확했다. 박정희의 경제 참모조차 허술하게 작성했다고 시인할 정도였다.
 
 "사실 1차 계획안은 통계의 미비와 작성 기술도 문제가 있었다."
 
 -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 -
 
그러한 경제 계획에 케네디가 특별 원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무 회담에서 미국의 '해밀턴' AID 처장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밝혔다.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어떤가?"
 
미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냉정하게 비판했다.
 
 "현실을 무시하고 설정한 7.1%의 성장률은 지나치게 높다."
 
 "수출 전략도 없다."
 
 사실 박정희에게도 수출 전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토끼털을 깎아 팔고, 생선을 많이 잡고, 돼지를 키워서 외화를 벌자.'
 
 즉, 수출 기업을 집중적으로 양성해서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수출 확대 전략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 전문가들은 종합 제철소 같은 투자비가 많이 드는 시설을 짓겠다는 박정희의 계획은 시기상조라며 비판했다.
 
<프레이져 보고서> 中
 
 
"화폐 개혁 실패"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군사쿠데타로 침체된 경제활동 때문에 정권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실제로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1961년도 한국의 GDP 순위는 92위로서 1960년 장면정부 시절보다 21위나 떨어졌다.)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위험 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6월 9일 저녁 밤 10시에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한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하루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와 화교의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부정축재자들은 검은돈을 몰래 숨겨 놨을 것이고, 화교는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있어 현금을 다발로 집에다 모아 놨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6월10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2차 통화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962년 6월10일부터 구 ‘환’화의 유통을 금하고 신 화폐인 ‘원’화를 발행한다.
- 신화폐 ‘원’과 구화폐 ‘환’의 환가비율은 원 1에 대하여 환 10으로 한다.
- 구권과 지불어음은 6월10일부터 17일까지 신고 또는 예입해야 한다.
- 17일까지의 생활비로 세대별로 1인당 500원 한도내에서 신권으로 지불한다.

등 이었다. 이 중 "기존 화폐 ‘10환’을 신 화폐 ‘1원’으로 바꿔준다는 것"은(이후 대한민국 화폐는 지금까지 ‘원’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원화가치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는 통화량을 줄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박정권은 화폐개혁을 통해 지하자금 활성화와 인플레이션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막상 화폐개혁이 시행되자 지하 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았다.

  '긴급통화조치'의 결과로 1962년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데, 이중에서 1,582억환은 환화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의 지급수단이었다. 6월 9일 당시 남한의 화폐발행액은 1,653억환이었으므로 71억원만이 회수되지 않은 것이다.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12억)에 불과하였다.
 
 즉, 박정희는 화폐개혁만 하면 이런 지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박정희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을 현금으로 거액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금과 같은 현물을 보유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자금의 흐름이 막힌 관계로 가장 빨리 타격을 받은 것은 중소기업이었다. 약1만7,000개의 업체를 거느린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집계한 가동률에 따르면 통화개혁이 실시된 직후인 6월10일의 가동률을 100으로 했을 때 6월20일의 그것은 42.5% 에 불과했다. 무려 절반 이상의 공장이 가동을 멈춘 것이다. 통화개혁 후 한달이 지난 후인 7월9일의 중소기업 가동률 역시  57.7%로서, 이로써 한국 기업들은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통시장 역시 사금융 두절로 인해 극단적인 자금고갈 현상을 빚었으며, 유휴자금 활용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경제적 부작용만 양산했다는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미국 정부의 압력은 물론 국민적 비난이 고조되자 군사정부로서도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긴급금융조치법'을 통해 예금동결을 일부 완화한데 이어 7월13일에는 아예 봉쇄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를 발표, 예금동결을 사실상 전면 해제해 버렸다. 통화개혁을 왜 단행했는지 그 목적 자체를 의심케 하는 전면후퇴 선언이었다. 이로써 화폐단위만 10분의 1로 절하되어 인플레이션만 가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잃게 된 것이다.
 
 박정권이 화폐개혁을 통해 거둔 효과는 이렇게 경제 활성 둔화와 인플레이션이었고, GDP 순위가 102권까지 추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애초에 화폐 개혁은 박정희가 지하자금을 정치 자금화 하기 위해 시도한 것인데, 의도한대로 정치 자금도 얻지 못하고 서민 경제만 파탄시켰으니 박정희는 이기적이면서도 머리가 나쁜, 한마디로 '우악스러운'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백해무익한 우악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하며 국사를 운영하니 앞으로 펼쳐질 남한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투기로인한 집값 상승"
 
1960년대 중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도 수출기업에 제공할 차관을 빌리기 위해 보내졌다. 정부는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봉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얻어왔다.
 
 그렇게 빌려온 차관은 일부는 박정희의 뒷 주머니로 들어가고, 일부는 공장을 지어 서민들을 17시간 노동시키고 무역적자를 가속화시키는데 사용되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6년간 도입된 상업차관은 약 8억달러로서, 5%가 박정희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는데, 계산하면 4000만달러(100억원)이다. 참고로 그 당시 한국의 한 해 예산 규모는 1500억원(66년도 기준)에 불과했다. 국가 예산의 1/15을 자기 돈으로 만든 셈이니 이는 오늘날 규모로 환산해보면 수십 조원에 이른다. (6년간 축적한 부정 재산이 이 정도이니 나머지 임기 동안 축적한 돈까지 합하면 상상을 초월할듯..) 이렇게 박정희의 대국민 수탈 정책은 기상천외하고도 엽기적이었는데, 이명박은 박정희에 비하면 좀도둑 수준이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2/10/200712100500015/200712100500015_1.html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수출경쟁력 확보의 원천이었지만, 수출 증대의 명분 아래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한 건 ‘물가 폭등’에서도 한눈에 나타난다. 물건을 나라 밖으로 보내고 그 대신 돈을 들여오는 수출 중심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통화량 증대로 이어져 물가가 계속 오른 것이다. 이는 내수가 뒷받침되지 않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큰 독이 되었다.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서 김재규의 총탄으로 사망할 1979년까지 연평균 9.1%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이 보다 약 두 배 정도 높은 16.5%를 기록하였다. 이를 물가상승률 대비 경제성장률이라는 절댓값으로 계산해보면 0.55로 역대 정권 중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전두환 1.42, 노태우 1.13, 김영삼 1.42, 김대중 1.25, 노무현 1.51)
 
 
 '17시간 노동'과 '통일벼 재배'로 대표되는 '저임금·저곡가'에 기초한 ‘내수 억압적 불균형 산업전략’에서는 내부 소비구조가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그 뒤 대외여건이 어려워져 수출 증가율이 둔화됐을 때 내수를 확대해 불황을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 지급보증 등 각종 지원·특혜로 자금을 풀면서 총통화 관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당시 국내 기업들이 해외로 부터 도입한 차관자금의 연평균 이자율은 5~6%에 불과한 반면, 국내 시중은행의 이자율은 25~30%에 이르러 기업들이 차관자금을 도입하여 국내 은행에만 예치해도 막대한 이자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체금리는 이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차관자금으로 이자놀이만 하여도 막대한 이익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물가 폭등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그때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대출받은 돈으로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여 앉아서 떼돈을 버는 등 투기를 부추겼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연평균 지가 상승률은 33.1%로서 역대 정권 중 가장 땅값이 많이 올랐다. 이는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와 서민들의 판자촌 내몰림 현상을 반영해주는 수치이다. (참고. 연평균 지가 상승률 - 이승만 21.6%,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
 
 
 
박정희 정권하의 저임금 정책은 양극화를 극대화시켰으며, 내수경제가 침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1977년에 총 취업인구의 59.2%인 770만명이 노동자였는데, 이 중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과 최저 생계비는 1977년 당시 4인 가족 최저 생계비가 9만 7천원이었고,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6만 9천원이었다.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4인 가족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1978년 최저 생계비는 11만 9천원, 노동자의 평균 임근은 9만 2천원으로 실질임금은 더욱 낮아진다. 1979년 최저생계비는 15만 3천원, 노동자 평균 임금은 11만 4천원으로 이를 통해 노동자 서민들이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하루 16시간을 일해야 했지만, 돌아오는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5분의 1이었다. 당시 평화시장 피복노동자들의 77퍼센트가 폐결핵 등 기관지염을, 81퍼센트가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217p -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수록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박정희 정권 당시 노동운동을 하다 잡혀갔던 동일방직, 원풍모방의 여성 노동자들은 재판 중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저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서 옷걱정, 먹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노동자로 일해서 먹었던 음식과 입었던 옷보다 범죄자들에게 제공되는 음식과 옷이 더 좋더군요. 우리 노동자들은 그동안 범죄자들에게 주는 처우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저임금 구조는 박정희 정권을 유지시키는데 가장 큰 정책 중 하나였다.
 
 
  물가가 폭등함에 따라 돈의 가치가 떨어져 환율도 엄청나게 상승하였는데, 19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1961년에는 130원으로 두 배 상승, 박정희 사망 당시의 환율은 485원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한국의 경제 구조가 중화학공업 위주였던 만큼 서민들 실생활에 필요한 경공업 분야의 물품들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출이 아무리 늘어나도 수입 또한 함께 증가를 하게되었고, 또한 기술력이 부족한 한국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리 만무했고, 물건이 팔려나갈 수록 무역적자가 계속되어 박정희 임기 말에 이르면 총 250억달러(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3000조 이상)의 무역적자가 나게 된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박정희 재임 기간(18년 동안) 연평균 166조의 무역적자가 난 것인다. 이러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다시 정부와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 정책을 펼치게 되고 정부는 화폐를 더 발행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가속회되는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사회'가 된 것이다.  
 
 
"농촌 경제 붕괴"
 
 
새마을운동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농촌의 역사, 전통문화, 공동체를 파괴해버렸다. 그 결과물이 대대적인 이촌향도 현상. 저물가 기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었던 통일벼로 인해 수확량이 급증하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가격이 낮아질수밖에 없었고 결국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대지주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농촌의 젊은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배진한(고려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60년 부터 1975년까지 약 68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했고, 그 중 가구유출이 68.2%인 468만명, 단신유출이 31.8%인 218만명으로, 연간 5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했고 이렇게 도시로 유입된 농촌의 과잉인구는 다시 저임금 노동자들을 양산하게 된다.(참고로 1968년 남한 인구 약 3000만명, 남한 인구의 23%가 도시로 대이동을 한 것이니 노년과 유년 인구를 제외한 청장년층의 절반이 도시로 이동한 셈이다. 이 좁은 반도 안에서 '민족대이동'을 능가하는 규모의 인구 대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농촌붕괴는 정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한국 경제를 저임금 노동 구조로 고착화 시킨 셈이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낮은 소득과 도시의 부족한 주택사정 때문에 도시 주변에 판잣집을 짓고 생활해야 했고, 서울의 경우 판잣집은 1961년 8만 4440호에서 매년 10-15%씩 증가하여 1966년에는 13만66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에 이르렀고 도시 주민의 약 1/3이 판자촌에 살았다. 장상환(경상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명이 판자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일본을 너무 좋아한 박정희 - 리베이트의 화신"
 
 
1) 한국 알루미늄회사 사건 : 박정권은 일본에서 현지가격으로 7백만 달러인 공장을 1천 3백만 달러에 사도록 허용. 여기서 차액인 6백만 달러는 정치자금으로 분배됨.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의 기업체들은 히다치, 도멘, 쇼와전기 등의 큰 기업체.
 
2) 서울지하철 차량 매입사건 : 일본 회사는 한국에 엔진 하나당 6,400엔에 판매. 그러나 그 엔진의 일본 현지 가격은 3천 엔. 박정희는 일본 제품을 정가의 2~3배로 구입해주는 댓가로 일본 기업으로 부터 개인 돈을 제공 받음. 이때 한국정부는 186개의 엔진을 매입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기업체들은 마루베니, 미쯔비시 상사, 이와이, 고큐 등.
 
3) 대한항공 리베이트 사건 : 일본 항공기 구매시 일정비율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키로 일본 우익인물들과 배후 약정.
 
 
4) 미쓰비시 상사 리베이트 : 미쓰비시의 한국측 대리인으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가까웠던 박제욱 씨는 "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백만달러(현재가로 1조 이상)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 고 주장했다. 그가 '빌렸다' 고 하는 것은 '몇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 이다.
 
 
5) 이토추 상사 리베이트 : 일본 이토추 상사 서울 사무소장이었던 '고바야시 유이치'는 95년, 일본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7년 총공사비 2천6백만달러인 영동화력발전소 프로젝트를 따면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공사비의 7%인 1백80만달러를 커미션으로 주었다" 고 밝혔다. 당초 정치자금 창구인 SK에게 4%의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소환해 3%를 더 내놓으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6) 회전당구대 사건 : 파친코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금지된 도박 기구 파친코를 500대 수입케 하고  영업 허가를 내주는 대신 돈을 챙긴 사건이다. 1961년 12월 중순쯤, 재일교포 김태준(金泰俊) 등이 세칭 파친코라고 불리는 회전당구대 100대 등을 부산항에 탁송하고 통관에 필요한 귀국증명서 1통을 위조해 재일교포 재산의 국내 반입인 것처럼 속여 국내에 들여왔다. 도입된 빠찡코는 모두 2천 527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한동안 빠찡코 열풍이 불었다.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데 쓸 정치 자금을 벌기 위해 국민들을 도박에 빠지게 만들면서까지 뒷돈을 챙긴 것이다.
 
7) 새나라 자동차 사건 :
 
 박정희 정권은 1962년 5월 31일,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이 법은 외국산 자동차(완제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으면서도 자동차의 제조 및 조립에 필요한 부품에 관해서는 관세를 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이에 '공업 발전을 위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박정희 정부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자동차 공업이란 빈부격차와 정치자금의 수입원만 될 것'이라는 야당의 논쟁이 붙기도 했다.
 
 
야당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아 정부와 기업 간에 밀실거래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당시 공화당을 창당한 군사 정권은 정치자금이 필요했고,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한일 회담차 일본에 갔을때 재일교포 기업 <야스다 상사>의 사장 '박노정'을 만나 정치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그에 대한 댓가로 <야스다 상사>의 한국내 자동차 판매에 대한 특혜를 제공하기로  한다. 이로써 1962년 1월 '시발'(시발은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 이름이다)에 지원키로 예정되었던 기술 지원비는 무산되었고, 재일교포 박노정에게 <새나라자동차> 회사 설립을 허가해주게 되는 것이다.
 
 
 곧 <야스다 상사>는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의 지원으로 국내에 <새나라자동차> 회사를 설립했고, 석정선의 압력을 받은 인천 시장은 새나라 회사의 부지와 자재구입에 까지 편의를 제공했는데, 지원 금액은 약 100만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조 그 이상이다. 1962년 1월 29일, 일본 기업 <닛산>과 기술제휴(말이 기술 제휴이지 사실상 <닛산>의 제품을 그대로 들여오는것에 지나지 않았음), 현재는 GM대우 자동차 공장이 위치한 부평에 연간 6천대의 생산능력을 가진 조립공장을 세우고, 그 해 11월 부터 생산에 돌입한다. <새나라자동차> 회사는 곧바로 <닛산>의 제품인 파랑새(블루버드) 400여대를 '반제품식'으로 '면세 혜택을 받고' 들여와서 조립하였다. 일본의 '파랑새'가 한국에 와서 '새나라'로 이름이 바뀌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폐품으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이 차를 63년도 7월까지 1772대나 들여와 조립생산하였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사실 나사나 끼워맞추는 정도의 작업만을 했다. 그렇게 생산된 새나라 자동차는 시가의 2배로 한국에서 판매되었다. (국내 자동차 회사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던 돈을 외국 기업 유치에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 외국산 폐품을 2배나 올려 파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63년 7월까지 수입된 새나라 자동차는 총 1772대, 약 184만달러 어치를 면세 도입했다. 대당 수입단가는 1040달러로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13만 1천원 정도인셈인데 국내판매가는 22만 4천원으로 모든 비용을 빼도 대당 8만 5천원이 남아 총 1억 5천여 만원의 폭리를 취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5000억원 이상의 폭리를 취한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2500289109005&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8-25&officeId=00028&pageNo=9&printNo=1991&publishType=0001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22500209205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2-25&officeId=00020&pageNo=5&printNo=18583&publishType=00020
 
그렇게 취한 폭리 중 일부는 공화당의 정치 자금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박노정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새나라 자동차는 또한 수입 과정 뿐만 아니라 국내에 들어오고 나서도 문제가 불거졌다. 당초 수입 목적은 정부의 '관광용 자동차'라는 목적으로 150여대는 외국인 관광용, 250여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허가해서 들여왔으나, 1962년 5월, '서울 아시아 영화제'의 택시 공급을 빌미로, 전량 일반 택시로 둔갑해 버렸다. 당시 한국 자동차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회사는 국산 <시발> 택시였고, 시발 택시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러던 시발 택시가 보다 현대적 모델을 갖춘 새나라 자동차 택시의 출현으로 하루 아침에 시세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시발>은 1964년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며, 이후 기술 자립의 싹이 잘린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1990년대까지 외국 기술 의존의 길을 걷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국내 자동차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의 자동차 도입을 억제하려고 했던 <자동차 공업 보호법>의 원래 목적과는 달리 국내 기술로 만든 시발 자동차의 퇴출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이후 남한의 외화사정이 악화되면서 기술과 부품을 모두 외국에 의존하고 있던 새나라 자동차는 수입대금을 충당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무역 적자만 내고 1년 만에 생산을 중단한다. 이후 새나라 자동차는 <한일은행>의 관리하에 있다가 <신진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가 인수하였다.
 
 
8) 사카린 밀수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을 이야기 하기 앞서 언급할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고(古) 이병철 삼성 회장이다. 경남 의령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부터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드는 성질을 가진 타고난 사업가였다. 10대 시절 부터 전국의 유명한 요정들을 들락거리며 기생들을 예약해놓고 놀다 일본 관리들이 찾으면 양보해주는 댓가로 돈을 챙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박정희와 아주 잘 맞아떨어져 박정희는 이병철을 통해 정치 자금을 제공 받는 댓가로 당시 규모가 큰 프로젝트 하나를 허가해주게 되는데, 바로 '한국비료 공장 건설 프로젝트'였다. 박정희로 부터 대외교섭권을 얻은 이병철은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 기업인들과 차관 협상을 시작한다. 이병철은 일본 <미쓰이> 그룹으로 부터 '한국비료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4천 2백만 달러 어치의 기계와 설비를 제공받기로 약속했다. 이 차관은 4년거치 연리 5.5%, 1할의 조건이었는데, 당초에 한국 국회의 승인을 얻을 때부터 시비가 있었다. 꼭 같은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이 일본 현지에서는 2천 2백만 달러면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은 같은 규모의 비료공장을 소련에 2천 8백만 달러에 판매한 전례가 있었다. 당시 김대중 의원은 나머지 차액만큼의 돈이 한일 정치가들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궁하고 나올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93년,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증언으로 리베이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맹희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철은 <미쓰이> 그룹으로 부터 실제 공장을 짓는데 필요한 금액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차관을 정부 지불 보증으로 빌려오는 댓가로 100만 달러의 뒷돈을 제공받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100만 달러는 이병철과 박정희의 주머니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100만 달러의 불법적인 리베이트를 합법적으로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 박정희는 현금으로 가져오는 대신 일본에서100만 달러 어치의 물건을 사와서 국내에 팔아 이익을 남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100만 달러어치 물건을 밀수해 와서 시중에 내다팔면 대강 4배 정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이맹희가 증언하기를, "400만 달러는 지금(93년도 당시)의 2천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현재(2014년도) 가치로 환산하면, 수 조원에 이르는 거액인 셈이었다. 그렇게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 사카린(외에도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밀수입해오다 들통이 난 것이었다. 이맹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보도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고 지하 창고에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암시장에서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이 사건은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 오물을 투척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상상을 해보아라. 국민들 세금으로 정상 설비 가격의 두 배나 되는 차관을 빌려오는 것도  모자라 리베이트 자금을 국내로 반입하기 위해 밀수까지 해서 부당 이익까지 챙기는 천일공노할 만행을..)
 
 
 여론이 악화되자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결국 1966년 9월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밀수사건을 사죄하며 '한국비료공업'의 지분 51%를 정부에 헌납하고, 중앙일보, TBC 등 계열사 언론사업과 학원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병철은 언론사업에 이어 주력인 삼성물산의 경영에서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병철은 대국민 약속을 깨고 17개월만에 삼성물산과 중앙일보 및 TBC 회장에 복귀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병철 당시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의 개입에 의해 조직적으로 밀수가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병철 회장의 복귀는 가능한 것이었다.(이병철 회장의 맏아들 맹희씨의 증언). 정부로서는 수사를 더 깊게 하면 삼성과 공모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했고, 삼성으로서는 사카린이 밀수품이 아니라고 버티다간 본질적인 부분(숨겨 놓은 밀수품)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카린 밀수 시인, 한국비료공업의 지분 절반 헌납」선에서 타협을 본 것이었다. 
(참고로, '한국비료공업'은 오늘날 '(주)삼성정밀화학'의 전신이다.)


9) 끝 없는 리베이트 : 박정희는 이외에도 '정부 지불 보증'으로 기업이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올 수 있도록 해주는 댓가로 이병철로 부터 수 억원의 돈을 리베이트 받음.(중앙정보부 전 감찰실장 '방준모' 증언). 그렇게 '정부 지불 보증'으로 외국으로 부터 차관을 도입해온 기업들을 열거하면, 한진, 현대, 한일합섬, 한국화약, 조선공사, 선경, 쌍용, 효성, 신진, 럭키, 코오롱, 신동아, 삼성, 기아, 대농, 태광, 대한통운, 금호그룹 등 무수히 많다.. 열거된 기업들이 해외로 부터 빌려 온 차관은 1억 5천만달러 이상으로 모두 정부 지불 보증, 즉 국민들 세금을 댓가로 빌려온 것들이다. (열거된 기업들이 차관을 빌려올때마다 박정권에 리베이트를 대주었다고 하면 ㄷㄷ)
 
심지어 미국 기업으로 부터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 관계자는 "71년 김성곤으로부터 선거자금 1천만달러를 요구받고 협상해 4백만달러를 지급했다" 고 밝혔다. 걸프의 해외 정치헌금중 80%가 한국에 주어졌다는 불미스런 기록도 남아 있다. http://blog.daum.net/livenewyork/55
 
 
 
 
 
"뒷돈 마련을 위해 증권 조작도 서슴치 않은 박정희 - 증권 파동"
 
 
 5.16 쿠데타 집권 이후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단기간에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권 시장에 눈을 돌린다. 5.16 쿠데타가 터지고 4일 후인 20일께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강성원 육군소령은 윤응상을 방문한다. 윤응상은 황해 해주 출신으로  일본 식민지 시대때 일본중앙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인 1958년 부터 경희증권 고문으로 활동을 시작한 증권업 유경험자였다.

1961년 11월 초, 중앙정보부의 지령을 받은 윤응상은 중정 소속 정진호 소령으로 부터 3차례에 걸쳐 9억환을 받아 증권 시장 조작에 나선다. 윤응상은 1961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공공사업인 <한국전력>의 주식을 사들여 한전주의 시가를 올렸다. 당시 정부는 한전의 대주주로 있던 <농협>에 압력을 가하는데, 이때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이 농협중앙회장인 오덕준과 부회장인 권병호를 찾아가 한전주를 시가보다 싸게 매각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농협은 한전주를 시가보다 8백환 싼 주당 1만 5천 8백환의 가격에 불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농협은 정부의 요청해 의해 보유하고 있던 한전주 12만 8천주를 헐값으로 불하하였고, 윤응상은 그 중 5만 주를 사들여 약 8억 6천 환의 폭리를 취했다. 정부는 이 금액을 윤응상에게 자본금으로 운용토록 하였고, 윤응상은 <통일>, <일홍>, <동명>의 세 증권 회사를 설립하고, 공공기관인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의 70%이상을 점유하고 인사권 등 각종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부는 이때 윤응상을 도와 그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세웠다. 윤응상의 대증주(대한증권거래소주식) 70% 매입과 더불어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발표가 뒤따르자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증주는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하게 된다.

 1962년 4월 말, 윤씨는 대증주의 가격이 폭등하고 거래량이 폭증하는 시점에 40억환의 증자(주식 수 증식)를 추진한다. 이때 액면가 50전인 대증주를 29배인 14환 50전으로 뻥티기 하여 투자자들로 부터 청약을 받는데 이때 수탈한 금액은 무려 136억환에 달한다. 그러나 청약결과는 예상외였다. 급심한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의 청약률이 67%에 그치는 부진을 보인 것이다. 또한 주가가 갑자기 폭등하게 되자 투자자들은 본격적인 주식 매도(현금화)를 시작했고, 이로써 주가는 매도 물량이 많아져 급락하기 시작했다. 윤씨측은 주가 유지를 위해 매수를 거듭했으나 이는 결국 자금부족으로 이어져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수도결제 불능사태'에 직면하였다. 이에 윤씨 계열의 증권사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다. 중앙정보부는 곧바로 <한일은행>에 압력을 가하여 4월 30일, 윤응상이 50억 환을 한일은행으로 부터 융자받아 수도케하고, 남은 금액은 전액 현금 없이 연수표로 발행하여 5백 27억환을 지불케 하였다. 그러나 주가는 계속 떨어졌고 주식을 현금화하려는 투자자들로 인해 수도자금 부족 현상은 계속되었다. 한편, 주식 폭락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5,340명의 투자자들은 연일 자살 소동을 벌이는데 이들의 피해 금액은 무려 138억 6천만 환(현재가 약 60조)에 달했다. 
 
1962년 5월 24일, 윤씨 계열의 증권사들이 지고  있는 투자자들에 대한 미결제자금은 무려 3백 52억환에 달하여, 이로써 윤씨는 다시 정부와 중앙정보부 정진호 소령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6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 유원식과 정진호 소령 등이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에 압력을 넣어 2백 80억 환을 융자받아 겨우 난국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2백 80억환은 남한 총 통화량의 8%, 화폐발행고의 16%나 되는 거액으로서 국내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몰고 오는 등 그 폐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윤응상은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경영하는 <영화증권>과 <범일증권>에서 고객들로 부터 위탁받은 돈 10억원을 횡령하여 고객들이 윤씨를 고발했으나 중앙정보부는 검찰총장에게 압력을 가하고 담당검사를 좌천시켜 이 사건을 무마하려 하였다. 이때 중앙정보부는 피해 고객들인 황인섭 씨 외 12명을 중정으로 불러 변상해준다고 설득(혹은 협박)했으나, 투자자들은 결국 돈을 못받고 말았으며, 윤응상은 검찰진술에서 67억환(현재가 약 30조)을 중앙정보부에 제공해주었다고 말했다. 

 증권파동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이것이 여론화되자 6월 13일, 최고회의 특별감사단장 유양수가 진상조사에 나섰으며 이듬해 2월 중앙정보부가 '4대 의혹사건수사팀'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이 결과에 따라 윤응상, 서재식, 유원식(최고회의 재경위원), 천병규(재무장관), 강성원 등 14명이 구속되고 검찰과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등 전원 유죄 구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군법회의에서 "의혹의 원인없다."는 판시가 내려져 전원무죄를 선고받아 증권파동은 형식적으로  매듭지어졌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50300099111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5-03&officeId=00009&pageNo=11&printNo=9087&publishType=00010
 
 

 
 
"뒷돈 마련을 위해 소비자 가격을 올리는 일도 서슴치 않는 박정희 - 삼분 폭리"
 
 
설탕·밀가루·시멘트를 생산하는 이른바 삼분재벌이 가격조작과 세금포탈 등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도록 묵인해준 대가로 공화당정권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긴 사건. 1964년 1월 15일 야당 원내교섭단체인 삼민회 대표 박순천 의원이 국회에서 폭로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져,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민주당 유창렬 의원과 삼성재벌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또한 민주당 측에서는 2월 5일 국회 제10차 본회의에 <특별국정감사 실시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폐기되었다. 이 사건은 밀가루·설탕·시멘트 등이 모두 국민의 실생활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품목인데다 62년의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만큼 전국민의 분노를 샀다.
 
밀가루, 시멘트, 설탕 등 분말(粉末)제품을 생산하던 대한제분(동아그룹), 대한양회(개풍그룹), 제일제당(당시 삼성 계열사) 등 3개 재벌을 중심으로 19개 기업이 담합해 정부 고시가격의 5배가 넘는 폭리를 취했던 사건이다.  민정, 민주당 등 야당은 삼분 재벌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부당 이득이 50~60억 원 선이며, 이 중 약 20억 원이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민정당 대변인 김영삼 의원은 "삼분업자들이 약 51억 원을 부정폭리 했으며, 부정 폭리금 중 약 20억 원이 두 번에 걸친 선거에서 공화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세 가지 분말 중에서 설탕은 삼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설탕은 분식장려로 인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국내 제당업자는 둘뿐이었다.
이중 삼성계의 제일제당이 약 60%를 차지했고, 당시 금액으로 15억을 소비자들로부터 빼앗아 갔다
 
 
1) 밀가루폭리
 

63년의 밀가루 값은 정부 고시가격이 1부대당 370원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시세는 1,200원까지 올랐다. 이로써 부대당 평균 이윤을 최저 500원선으로 잡더라도 846만 부대의 매출로 제분업자 및 밀가루 판매업자들이 챙긴 이익은 43억 원(현재가 9조)이라는 엄청난 액수에 달한다. 특히 이 사건은 전국민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일어났기 때문에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2200329204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22&officeId=00032&pageNo=4&printNo=5642&publishType=00020

 
 
2) 설탕폭리
 

제당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63년의 내수용 설탕공급량은 3만 4천 톤이었고, 판매고는 18억원이었다. 이 발표를 바탕으로 설탕 1톤의 값을 계산해보면 5만 3천원 꼴이며, 근당으로는 33원 12전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도매값은 오르기 시작하여 63년 3월에 35원 55전, 4월에 36원 26전, 5월에 38원, 6월에 44원 30전, 7월에 58원 60전, 8월에 67원, 9월에 76원, 10월에 82원, 11월에 82원, 12월에 98원, 64년 초에는 102원까지 올랐다. 근당 평균 도매값을 80원으로 잡더라도 3만 4천 톤의 값은 곱하기 80을 하면 43억 5천 2백만원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정상적인 판매고인 18억원을 제하고 나면 25억 5천 2백만원의 폭리를 취한 것이다. (참고로 이 판매고 중에서 삼성의 계열사인 <제일제당>의 공급이 60%를 차지했는데, 이로써 <제일제당>이 취한 폭리를 계산해보면 25억의 60%인 15억원에 해당하는 폭리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15억이지 이는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의 액수였다. 1966년 한 해 예산 규모가 1537억원 정도였으니 한 해 예산의 1%를 횡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370조의 1%인 약 4조원을 횡령한 셈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240032920400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24&officeId=00032&pageNo=4&printNo=5643&publishType=00020
 
 
 
3) 시멘트폭리
 
 
 63년중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가 국내에 생산·공급한 시멘트량은 2,220만 부대(46만톤)에 달하며, 부대당 150원하는 시멘트가 시중에서는 300원에 거래되었다. 이 중 관수용 40%는 제외하고, 자유판매량 1,213만 부대에만 한정해서 본다 해도 1부대당 유통비를 제외한 평균 이윤을 100원씩 잡으면 12억원의 폭리를 취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정부의 세무조사는 미온적이었다. 관련회사 18개에 대해 추징한 세액이 3830만원, 부과금이 390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의혹과 분노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건설협회의 추계에 의하면 이 협회 산하 회원들은 16만 톤을 시중 가격으로 매입하여 3억 7천만원의 직접적인 손실을 보았고, 이에 따른 공사 지연 등의 간접손실은 약 5억원으로 추정, 도합 8억 7천만원의 출혈을 보았다.
이러한 시멘트 파동으로  인해 한때 건설협회산하의 건설업자들이 80%이상 공사 스톱 상태를 나타내기도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270032920400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27&officeId=00032&pageNo=4&printNo=5646&publishType=00020
 
 
 
"선거 공작을 위해 한 해 국가 예산의 1/10을 지출"
 
 
 1971년 7대 대선은 금권이 휩쓴 사상 유례없는 '부정타락 선거'였다. 박정희는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돈(2014년도 국가예산이 357조니까 현재 가치로 약 35조)을 퍼부었다. 관권이 총동원돼 선거운동에 투입됐다. 지역감정을 본격적으로 조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공화당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경상도에 피바람이 분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야당 유권자를 투표인 명부에서 누락시키고 친여 유권자는 중복 등재시키는 조작도 일삼았다. 투표 당일에는 릴레이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등 불법이 난무했다.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참관인이 쫓겨나기도 했다.

총체적인 불법ㆍ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95만표 차이로 간신히 김대중 후보를 따돌렸다.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도 나돌았다. 간담을 쓸어내린 박정희는 이른바 유신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꿔버렸다.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도 등장했다. 경쟁자였던 김대중은 감옥을 들락거리며 해외 망명지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6&aid=0000068700
 
- 세상에. 정치 공작을 위해 국민들 돈으로 이따위 짓을 하니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총에 죽지 않았더라면? 남한은 오늘날 북한행 ㄱㄱ
 
 
 
 
"유가상승으로 기업도산 속출"
 
 
 
1979년 OPEC의 2차 석유류 감산이 시작. 이른바 2차 오일쇼크다. 여기에 한국은 70년대 내내 추구하던 중화학 공업정책이 발목을 잡히면서 엄청난 공황 직면. 1 배럴에 36달러까지 유가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직전의 상태. 이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음.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 (IMF때도 50%에는 이르지 않았음).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
 
이 때문에 수많은 기업이 일거에 도산. 살아남은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을 갚기 위해 필사적.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의 연속.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 1979년말 180억달러 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달러 수준으로까지 급격히 증가. (이 당시 수출액이 300억달러 수준).
 
 
 
 
 
 
 
 
 
 
결국, 박정희는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게 아니라 대기업과 자기 가족 경제를 발전시킨 것이다. 하긴 그 시절은 가족을 살리고 지 목숨 살리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영웅이라 불릴 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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