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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어떻게 한국경제를 망쳤나
게시물ID : bestofbest_1686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라마
추천 : 382
조회수 : 119382회
댓글수 : 86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4/07/06 01:31:49
원본글 작성시간 : 2014/07/05 22:15:22
목록.
 
1. 경제 개발 전략도 없던 박정희
2. 화폐 개혁 실패
3.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투기로 인한 집값 상승.
4. 농촌 경제 붕괴
5. 리베이트의 화신 - 일본을 너무 좋아한 박정희
6. 증권파동 - 뒷돈 마련을 위해 증권 조작도 서슴치 않는 박정희
7. 워커힐 사건 - 뒷돈 마련 위해 공사비 횡령.
8. 삼분폭리 사건 - 뒷돈 마련 위해 소비자 가격 올려
9. 8.3 긴급 조치 - 개인 투자가들 희생시켜 재벌 이익 도모
10. 선거 공작을 위해 한 해 국가 예산의 1/10 지출
11. 건설주 파동 - 정부의 섣부른 통화량 회수로 증시자금 막혀 일어난 제 2의 증권파동
12. 무리한 중화학 투자로 기업 도산 속출(2차 오일 파동)
 
 
 
 
 
 
1. 경제 개발 전략도 없던 박정희
 
 
1961년 6월 13일, 워싱턴에서는 이 날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 한국 문제 태스크 포스팀>이 작성한 종합 보고서는 미국이 한국을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로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
둘째, 미국의 국가적 위신이 걸려 있다.
셋째, 특히 일본을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
 
결국,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이 위험해지고 미국의 태평양 방어 라인은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따라서1960년대 초 한국 정부가 외채를 빌리려고 해도 빌려줄 나라가 없었다는 말은 개소리다. 이미 50년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한국은 원조액이 전체 GDP의 30%를 차지하는 국제원조국가였다.) 
 
1961년 6월 13일, 미국의 엘리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한국의 경제 개발 계획과 근대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1961년 11월 3일, 케네디는 USAID(국제개발처) 조직을 탄생시켰다.
 
이 기구의 임무는 친미 국가 계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1961년 11월 14일, 박정희는 워싱턴에 있는 케네디를 방문했다. 특별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회담 도중 박정희는 특별 원조를 요청했다.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서를 작성중이다. 특별 안정 기금으로 2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해달라."
 
그러나 케네디는 꺼려했다.
 
석달 전, '버거' 주한 미대사는 박정희에게 직접 경고를 보냈었다.
 
"당신들이 만든 경제 개발 계획서는 현실성이 없다."
 
버거의 말은 정확했다. 박정희의 경제 참모조차 허술하게 작성했다고 시인할 정도였다.
 
 "사실 1차 계획안은 통계의 미비와 작성 기술도 문제가 있었다."
 
 -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 -
 
그러한 경제 계획에 케네디가 특별 원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무 회담에서 미국의 '해밀턴' AID 처장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밝혔다.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어떤가?"
 
미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냉정하게 비판했다.
 
 "현실을 무시하고 설정한 7.1%의 성장률은 지나치게 높다."
 
 "수출 전략도 없다."
 
 사실 박정희에게도 수출 전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토끼털을 깎아 팔고, 생선을 많이 잡고, 돼지를 키워서 외화를 벌자.'
 
 즉, 수출 기업을 집중적으로 양성해서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수출 확대 전략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 전문가들은 종합 제철소 같은 투자비가 많이 드는 시설을 짓겠다는 박정희의 계획은 시기상조라며 비판했다.
<프레이져 보고서> 中   http://www.youtube.com/watch?v=z-up2VNU8eo
 
 
결국, 박정희는 마지못해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하기로 한다.
 
당시 상공부 관리였으며 나중에 박통 경제 수석까지 된 오원철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공업부문 투자액 중 당초 중공업에 속하는 금속 기계부문에 28.8%를 투입하여 11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을 5개 사업 14%로 축소시켰다. 그것도 교통부 철도공사 사업을 빼면 4개 사업에 겨우 2.1%를 할당한 것이다. 중공업은 보완작업시기 거의 배제되고 말았다. 경공업 분야는 40.2%를 투자하여 23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이 12개 사업 38.6%로 변경되었다. 나머지 31%는 중소기업 육성 등 기타 산업에 대한 투자였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은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어 당초 1.8%밖에 투자계획이 없던 것을 30.4%로 대폭 증액하였다.
 
교통부 소관 30억6천만원을 뺀 민간에 대한 중공업 투자액 5억 3천만원과 경공업 투자액 9백88억2천만원을 비율로 나타내면 5대 95이다. 그러니까 1차 5개년계획은 경공업 분야에 중점 투자하도록 수정된 것이다. 연평균 성장률도 당초 7.1%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고 총투자도 50.8%에서 31.9%로 대폭 축소하였다. 가용 자원면에서 외자도입 계획도 8.95%에서 8.1%로 줄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외환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민간사업에 대한 지불보증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어서 오원철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목표는 정해져 있었으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작전계획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상공부 장관이었던 김정렴씨는 회고록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 계획안은 1959년에 자유당 정권, 1961년 민주당 정권이 시안작성에 착수했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장기경제개발 계획안을 참고로 하여 서둘러 대폭 수정, 보완한 것으로 대단히 조잡한 수준이었다. 계획에 책정된 공장의 대부분은 국내에 아직 설립된 바 없는 신공장이었으며 관계 공무원은 물론 실업가들조차 외국에 나가 관계 공장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 드문 가운데 소요액이 책정되었다......64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해였다...야당의원들이 삼분폭리 사건(밀가루, 설탕, 시멘트 기업들이 가격조작과 세금포탈을 통해 폭리를 취한 사건)을 들고 나왔고 새나라 자동차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본회의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대학생들의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마침내 6.3사태로 이어져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지경으로 번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9월 들어 중부지방에 폭우가 쏟아져 770여명의 사망자가 생기고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혼란한 지경에서 경제개발 계획은 실패의 조짐을 드러냈고 보릿고개는 여전히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다. 개발계획을 세운 62년 초보다 상황이 더욱 나빠져 있었다. 위기 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바닥을 헤매는 외환보유고,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상황."

박정희 정권 당시의 외환보유고 상황은 처참했다.
 
당시 상공부 공업국 과장이었던 오원철씨의 논문에 당시 우리나라 외환보유고 현황이 잘 나타나 있다.
 
"1962년 말에는 1억 6천6백79만3천 달러, 63년 3월에는 1억 3천7백5만7천 달러, 동년 9월에는 1억 5백40만5천 달러로 떨어졌으며, 그나마 순 미국 달러는 9천3백29만8천 달러로 채 1억 달러가 되지 않았다."
 
"2년간 경제개발계획은 별다른 진전이 없이 오히려 외환보유고만 줄어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5개년 경제 계획은 거듭된 수정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계획이 되고 만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무(無)계획성과 무리한 중화학 투자에 기인한다. 집권하면 어떻게 경제를 꾸려가겠다는 청사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장면 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베꼇고, 그것도 거듭된 수정 끝에 수치상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 '새나라 자동차 사업' 등과 같은 무리한 중화학 공업에 매진하게 된 것이 패인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지하자금을 정치자금화하기 위해 섣불리 추진한 '화폐개혁'으로 인한 공장 가동률 마비와 높은 인플레이션이다.

세번째 요인은 정부를 장악한 박정희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경제교란이다. 박정희 정권은 불법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고,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장에 개입해 한국 경제를 흔들어놓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증권조작 사건(일명 '증권파동')'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사건들을 하나 둘씩 살펴보도록 하자.
 
 
 
 
 
2. 화폐 개혁 실패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군사쿠데타로 침체된 경제활동 때문에 정권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실제로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1961년도 한국의 GDP 순위는 92위로서 1960년 장면정부 시절보다 21위나 떨어졌다.)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위험 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6월 9일 저녁 밤 10시에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한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하루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와 화교의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부정축재자들은 검은돈을 몰래 숨겨 놨을 것이고, 화교는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있어 현금을 다발로 집에다 모아 놨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6월10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2차 통화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962년 6월10일부터 구 ‘환’화의 유통을 금하고 신 화폐인 ‘원’화를 발행한다.
- 신화폐 ‘원’과 구화폐 ‘환’의 환가비율은 원 1에 대하여 환 10으로 한다.
- 구권과 지불어음은 6월10일부터 17일까지 신고 또는 예입해야 한다.
- 17일까지의 생활비로 세대별로 1인당 500원 한도내에서 신권으로 지불한다.
http://impeter.tistory.com/2127

등 이었다. 이 중 "기존 화폐 ‘10환’을 신 화폐 ‘1원’으로 바꿔준다는 것"은(이후 대한민국 화폐는 지금까지 ‘원’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원화가치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는 통화량을 줄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박정권은 화폐개혁을 통해 지하자금 활성화와 인플레이션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막상 화폐개혁이 시행되자 지하 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았다.

  '긴급통화조치'의 결과로 1962년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데, 이중에서 1,582억환은 환화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의 지급수단이었다. 6월 9일 당시 남한의 화폐발행액은 1,653억환이었으므로 71억원만이 회수되지 않은 것이다.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12억)에 불과하였다.
 
 즉, 박정희는 화폐개혁만 하면 이런 지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박정희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을 현금으로 거액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금과 같은 현물을 보유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자금의 흐름이 막힌 관계로 가장 빨리 타격을 받은 것은 중소기업이었다. 약1만7,000개의 업체를 거느린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집계한 가동률에 따르면 통화개혁이 실시된 직후인 6월10일의 가동률을 100으로 했을 때 6월20일의 그것은 42.5% 에 불과했다. 무려 절반 이상의 공장이 가동을 멈춘 것이다. 통화개혁 후 한달이 지난 후인 7월9일의 중소기업 가동률 역시  57.7%로서, 이로써 한국 기업들은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통시장 역시 사금융 두절로 인해 극단적인 자금고갈 현상을 빚었으며, 유휴자금 활용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경제적 부작용만 양산했다는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미국 정부의 압력은 물론 국민적 비난이 고조되자 군사정부로서도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긴급금융조치법'을 통해 예금동결을 일부 완화한데 이어 7월13일에는 아예 봉쇄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를 발표, 예금동결을 사실상 전면 해제해 버렸다. 통화개혁을 왜 단행했는지 그 목적 자체를 의심케 하는 전면후퇴 선언이었다. 이로써 화폐단위만 10분의 1로 절하되어 인플레이션만 가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잃게 된 것이다.
 
 박정권이 화폐개혁을 통해 거둔 효과는 이렇게 경제 활성 둔화와 인플레이션이었고, GDP 순위가 102권까지 추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애초에 화폐 개혁은 박정희가 지하자금을 정치 자금화 하기 위해 시도한 것인데, 의도한대로 정치 자금도 얻지 못하고 서민 경제만 파탄시켰으니 박정희는 이기적이면서도 머리가 나쁜, 한마디로 '우악스러운'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백해무익한 우악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하며 국사를 운영하니 앞으로 펼쳐질 남한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3.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투기로인한 집값 상승
 
 
 1960년대에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지향정책은 농촌 붕괴현상을 초래했다. 그 결과 막대한 실업과 외화 부족현상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국정부는 광부와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의 해외송출을 추진했다. 반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다. 많은 취업의 기회가 보장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도 수출기업에 제공할 차관을 빌리기 위해 보내졌다. 정부는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봉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얻어왔다.
 
 그렇게 빌려온 차관은 일부는 박정희의 뒷 주머니로 들어가고, 일부는 공장을 지어 서민들을 17시간 노동시키고 무역적자를 가속화시키는데 사용되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6년간 도입된 상업차관은 약 8억달러로서, 5%가 박정희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는데, 계산하면 4000만달러(100억원)이다. 참고로 그 당시 한국의 한 해 예산 규모는 1500억원(66년도 기준)에 불과했다. 국가 예산의 1/15을 자기 돈으로 만든 셈이니 이는 오늘날 규모로 환산해보면 수십 조원에 이른다. (6년간 축적한 부정 재산이 이 정도이니 나머지 임기 동안 축적한 돈까지 합하면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박정희의 대국민 수탈 정책은 기상천외하고도 엽기적이었는데, 이명박은 박정희에 비하면 좀도둑 수준이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12/10/200712100500015/200712100500015_1.html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수출경쟁력 확보의 원천이었지만, 수출 증대의 명분 아래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한 건 ‘물가 폭등’에서도 한눈에 나타난다. 물건을 나라 밖으로 보내고 그 대신 돈을 들여오는 수출 중심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통화량 증대로 이어져 물가가 계속 오른 것이다. 이는 내수가 뒷받침되지 않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큰 독이 되었다.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서 김재규의 총탄으로 사망할 1979년까지 연평균 9.1%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이 보다 약 두 배 정도 높은 16.5%를 기록하였다. 이를 물가상승률 대비 경제성장률이라는 절댓값으로 계산해보면 0.55로 역대 정권 중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전두환 1.42, 노태우 1.13, 김영삼 1.42, 김대중 1.25, 노무현 1.51)
 
 
 '17시간 노동'과 '통일벼 재배'로 대표되는 '저임금·저곡가'에 기초한 ‘내수 억압적 불균형 산업전략’에서는 내부 소비구조가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그 뒤 대외여건이 어려워져 수출 증가율이 둔화됐을 때 내수를 확대해 불황을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 지급보증 등 각종 지원·특혜로 자금을 풀면서 총통화 관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당시 국내 기업들이 해외로 부터 도입한 차관자금의 연평균 이자율은 5~6%에 불과한 반면, 국내 시중은행의 이자율은 25~30%에 이르러 기업들이 차관자금을 도입하여 국내 은행에만 예치해도 막대한 이자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체금리는 이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차관자금으로 이자놀이만 하여도 막대한 이익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물가 폭등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그때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대출받은 돈으로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여 앉아서 떼돈을 버는 등 투기를 부추겼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연평균 지가 상승률은 33.1%로서 역대 정권 중 가장 땅값이 많이 올랐다. 이는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와 서민들의 판자촌 내몰림 현상을 반영해주는 수치이다. (참고. 연평균 지가 상승률 - 이승만 21.6%,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
 
 
 
박정희 정권하의 저임금 정책은 양극화를 극대화시켰으며, 내수경제가 침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1977년에 총 취업인구의 59.2%인 770만명이 노동자였는데, 이 중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과 최저 생계비는 1977년 당시 4인 가족 최저 생계비가 9만 7천원이었고,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6만 9천원이었다.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4인 가족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1978년 최저 생계비는 11만 9천원, 노동자의 평균 임근은 9만 2천원으로 실질임금은 더욱 낮아진다. 1979년 최저생계비는 15만 3천원, 노동자 평균 임금은 11만 4천원으로 이를 통해 노동자 서민들이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하루 16시간을 일해야 했지만, 돌아오는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5분의 1이었다. 당시 평화시장 피복노동자들의 77퍼센트가 폐결핵 등 기관지염을, 81퍼센트가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217p -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수록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박정희 정권 당시 노동운동을 하다 잡혀갔던 동일방직, 원풍모방의 여성 노동자들은 재판 중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저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서 옷걱정, 먹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노동자로 일해서 먹었던 음식과 입었던 옷보다 범죄자들에게 제공되는 음식과 옷이 더 좋더군요. 우리 노동자들은 그동안 범죄자들에게 주는 처우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저임금 구조는 박정희 정권을 유지시키는데 가장 큰 정책 중 하나였다.
 
 
  물가가 폭등함에 따라 돈의 가치가 떨어져 환율도 엄청나게 상승하였는데, 19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1961년에는 130원으로 두 배 상승, 박정희 사망 당시의 환율은 485원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매우 중요한데, 원화 가치 하락은 기업 입장에서 볼때 물건을 만들어 외국에 판매하면 국내에 판매할 경우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들은 실생활에 필요한 경공업 분야의 물품들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기업 역시 기업 나름대로 제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원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므로 수출이 아무리 늘어나도 수입은 더욱 급증 하게되었고, 물건이 팔려나갈 수록 무역적자가 계속되어 박정희 임기 말에 이르면 총 250억달러(당시 돈 12조,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00조 이상)의 무역적자가 나게 된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박정희 재임 기간(18년 동안) 연평균 55조의 무역적자가 난 셈이다. 이러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다시 정부와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 정책을 펼치게 되고 정부는 화폐를 더 발행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는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사회'가 된 것이다.  
 
 
 
 
 
4. 농촌 경제 붕괴
 
 
새마을운동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농촌의 역사, 전통문화, 공동체를 파괴해버렸다. 그 결과물이 대대적인 이촌향도 현상. 저물가 기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었던 통일벼로 인해 수확량이 급증하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가격이 낮아질수밖에 없었고 결국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대지주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농촌의 젊은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배진한(고려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60년 부터 1975년까지 약 68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했고, 그 중 가구유출이 68.2%인 468만명, 단신유출이 31.8%인 218만명으로, 연간 5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했고 이렇게 도시로 유입된 농촌의 과잉인구는 다시 저임금 노동자들을 양산하게 된다.(참고로 1968년 남한 인구 약 3000만명, 남한 인구의 23%가 도시로 대이동을 한 것이니 노년과 유년 인구를 제외한 청장년층의 절반이 도시로 이동한 셈이다. 이 좁은 반도 안에서 '민족대이동'을 능가하는 규모의 인구 대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농촌붕괴는 정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한국 경제를 저임금 노동 구조로 고착화 시킨 셈이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낮은 소득과 도시의 부족한 주택사정 때문에 도시 주변에 판잣집을 짓고 생활해야 했고, 서울의 경우 판잣집은 1961년 8만 4440호에서 매년 10-15%씩 증가하여 1966년에는 13만66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에 이르렀고 도시 주민의 약 1/3이 판자촌에 살았다. 장상환(경상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명이 판자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5. 리베이트의 화신 - 일본을 너무 좋아한 박정희
 
 
1) 한국 알루미늄회사 사건 : 박정권은 일본에서 현지가격으로 7백만 달러인 공장을 1천 3백만 달러에 사도록 허용. 여기서 차액인 6백만 달러는 정치자금으로 분배됨.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의 기업체들은 히다치, 도멘, 쇼와전기 등의 큰 기업체.
 
2) 서울지하철 차량 매입사건 : 일본 회사는 한국에 엔진 하나당 6,400엔에 판매. 그러나 그 엔진의 일본 현지 가격은 3천 엔. 박정희는 일본 제품을 정가의 2~3배로 구입해주는 댓가로 일본 기업으로 부터 개인 돈을 제공 받음. 이때 한국정부는 186개의 엔진을 매입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기업체들은 마루베니, 미쯔비시 상사, 이와이, 고큐 등.
 
3) 대한항공 리베이트 사건 : 일본 항공기 구매시 일정비율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키로 일본 우익인물들과 배후 약정.
 
 
4) 미쓰비시 상사 리베이트 : 미쓰비시의 한국측 대리인으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가까웠던 박제욱 씨는 "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백만달러(현재가로 1조원에 가까운 액수)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 고 주장했다. 그가 '빌렸다' 고 하는 것은 '몇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 이다.
 
 
5) 이토추 상사 리베이트 : 일본 이토추 상사 서울 사무소장이었던 '고바야시 유이치'는 95년, 일본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7년 총공사비 2천6백만달러인 영동화력발전소 프로젝트를 따면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공사비의 7%인 1백80만달러를 커미션으로 주었다" 고 밝혔다. 당초 정치자금 창구인 SK에게 4%의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소환해 3%를 더 내놓으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6) 회전당구대 사건 : 파친코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금지된 도박 기구 파친코를 500대 수입케 하고  영업 허가를 내주는 대신 돈을 챙긴 사건이다. 1961년 12월 중순쯤, 재일교포 김태준(金泰俊) 등이 세칭 파친코라고 불리는 회전당구대 100대 등을 부산항에 탁송하고 통관에 필요한 귀국증명서 1통을 위조해 재일교포 재산의 국내 반입인 것처럼 속여 국내에 들여왔다. 도입된 빠찡코는 모두 2천 527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한동안 빠찡코 열풍이 불었다.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데 쓸 정치 자금을 벌기 위해 국민들을 도박에 빠지게 만들면서까지 뒷돈을 챙긴 것이다.
 
7) 새나라 자동차 사건 :
 
 박정희 정권은 1962년 5월 31일, <자동차 공업 보호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이 법은 외국산 자동차(완제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으면서도 자동차의 제조 및 조립에 필요한 부품에 관해서는 관세를 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이에 '공업 발전을 위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박정희 정부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자동차 공업이란 빈부격차와 정치자금의 수입원만 될 것'이라는 야당의 논쟁이 붙기도 했다.
 
 
야당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아 정부와 기업 간에 밀실거래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당시 공화당을 창당한 군사 정권은 정치자금이 필요했고,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한일 회담차 일본에 갔을때 재일교포 기업 <야스다 상사>의 사장 '박노정'을 만나 정치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그에 대한 댓가로 <야스다 상사>의 한국내 자동차 판매에 대한 특혜를 제공하기로  한다. 이로써 1962년 1월 '시발'(시발은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 이름이다)에 지원키로 예정되었던 기술 지원비는 무산되었고, 재일교포 박노정에게 <새나라자동차> 회사 설립을 허가해주게 되는 것이다.
 
 
 곧 <야스다 상사>는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의 지원으로 국내에 <새나라자동차> 회사를 설립했고, 석정선의 압력을 받은 인천 시장은 새나라 회사의 부지와 자재구입에 까지 편의를 제공했는데, 지원 금액은 약 100만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조 그 이상이다. 1962년 1월 29일, 일본 기업 <닛산>과 기술제휴(말이 기술 제휴이지 사실상 <닛산>의 제품을 그대로 들여오는것에 지나지 않았음), 현재는 GM대우 자동차 공장이 위치한 부평에 연간 6천대의 생산능력을 가진 조립공장을 세우고, 그 해 11월 부터 생산에 돌입한다. <새나라자동차> 회사는 곧바로 <닛산>의 제품인 파랑새(블루버드) 400여대를 '반제품식'으로 '면세 혜택을 받고' 들여와서 조립하였다. 일본의 '파랑새'가 한국에 와서 '새나라'로 이름이 바뀌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폐품으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이 차를 63년도 7월까지 1772대나 들여와 조립생산하였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사실 나사나 끼워맞추는 정도의 작업만을 했다. 그렇게 생산된 새나라 자동차는 시가의 2배로 한국에서 판매되었다. (국내 자동차 회사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던 돈을 외국 기업 유치에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 외국산 폐품을 2배나 올려 파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63년 7월까지 수입된 새나라 자동차는 총 1772대, 약 184만달러 어치를 면세 도입했다. 대당 수입단가는 1040달러로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13만 1천원 정도인셈인데 국내판매가는 22만 4천원으로 모든 비용을 빼도 대당 8만 5천원이 남아 총 1억 5천여 만원의 폭리를 취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조원에 가까운 폭리를 취한 것이다.
 
그렇게 취한 폭리 중 일부는 공화당의 정치 자금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박노정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윌리엄 마지스트레티' 전 주한미국대사관 부대사는 1963년 6월 19일, 김재춘(3대 중앙정보부장)과의 면담에서 김재춘으로 부터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 새나라자동차수입 등을 통해 해외에 부정 자금을 축적했음을 전해들었다고 폭로했다. http://andocu.tistory.com/5394
 
 새나라 자동차는 또한 수입 과정 뿐만 아니라 국내에 들어오고 나서 문제가 더 커졌다. 당초 수입 목적은 정부의 '관광용 자동차'라는 목적으로 150여대는 외국인 관광용, 250여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허가해서 들여왔으나, 1962년 5월, '서울 아시아 영화제'의 택시 공급을 빌미로, 전량 일반 택시로 둔갑해 버렸다. 당시 한국 자동차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회사는 국산 <시발> 택시였고, 시발 택시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러던 시발 택시가 보다 현대적 모델을 갖춘 새나라 자동차 택시의 출현으로 하루 아침에 시세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시발>은 1964년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며, 이후 기술 자립의 싹이 잘린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1990년대까지 외국 기술 의존의 길을 걷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국내 자동차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의 자동차 도입을 억제하려고 했던 <자동차 공업 보호법>의 원래 목적과는 달리 국내 기술로 만든 시발 자동차의 퇴출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이후 남한의 외화사정이 악화되면서 기술과 부품을 모두 외국에 의존하고 있던 새나라 자동차는 수입대금을 충당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무역 적자만 내고 1년 만에 생산을 중단한다. 이후 새나라 자동차는 <한일은행>의 관리하에 있다가 <신진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가 인수하였다.
 
 
 
 
8) 사카린 밀수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을 이야기 하기 앞서 언급할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고(古) 이병철 삼성 회장이다. 경남 의령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부터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드는 성질을 가진 타고난 사업가였다. 10대 시절 부터 전국의 유명한 요정들을 들락거리며 기생들을 예약해놓고 놀다 일본 관리들이 찾으면 양보해주는 댓가로 돈을 챙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박정희와 아주 잘 맞아떨어져 박정희는 이병철을 통해 정치 자금을 제공 받는 댓가로 당시 규모가 큰 프로젝트 하나를 허가해주게 되는데, 바로 '한국비료 공장 건설 프로젝트'였다. 박정희로 부터 대외교섭권을 얻은 이병철은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 기업인들과 차관 협상을 시작한다. 이병철은 일본 <미쓰이> 그룹으로 부터 '한국비료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4천 2백만 달러 어치의 기계와 설비를 제공받기로 약속했다. 이 차관은 4년거치 연리 5.5%, 1할의 조건이었는데, 당초에 한국 국회의 승인을 얻을 때부터 시비가 있었다. 꼭 같은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이 일본 현지에서는 2천 2백만 달러면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은 같은 규모의 비료공장을 소련에 2천 8백만 달러에 판매한 전례가 있었다. 당시 김대중 의원은 나머지 차액만큼의 돈이 한일 정치가들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궁하고 나올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93년,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증언으로 리베이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맹희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철은 <미쓰이그룹>으로 부터 실제 공장을 짓는데 필요한 금액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차관을 정부 지불 보증으로 빌려오는 댓가로 100만 달러의 뒷돈을 제공받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100만 달러는 이병철과 박정희의 주머니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100만 달러의 불법적인 리베이트를 합법적으로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 박정희는 현금으로 가져오는 대신 일본에서100만 달러 어치의 물건을 사와서 국내에 팔아 이익을 남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100만 달러어치 물건을 밀수해 와서 시중에 내다팔면 대강 4배 정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이맹희가 증언하기를, "400만 달러는 지금(93년도 당시)의 2천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현재(2014년도) 가치로 환산하면, 수 조원에 이르는 거액인 셈이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난 1966년도 환율은 1달러당 255원, 곧 400만 달러는 10억 2천만원에 달한다. 당시 국가 예산의 1/12에 이르는 거액인 셈이었으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9조 이상이다. 그렇게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 사카린(외에도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각종 기계 등)을 밀수입해오다 들통이 난 것이었다. 이맹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보도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고 지하 창고에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암시장에서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이 사건은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 오물을 투척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상상을 해보아라. 국민들 세금으로 정상 설비 가격의 두 배나 되는 차관을 빌려오는 것도  모자라 리베이트 자금을 국내로 반입하기 위해 밀수까지 해서 부당 이익까지 챙기는 천일공노할 만행을..)
 
 
 여론이 악화되자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결국 1966년 9월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밀수사건을 사죄하며 '한국비료공업'의 지분 51%를 정부에 헌납하고, 중앙일보, TBC 등 계열사 언론사업과 학원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병철은 언론사업에 이어 주력인 삼성물산의 경영에서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병철은 대국민 약속을 깨고 17개월만에 삼성물산과 중앙일보 및 TBC 회장에 복귀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병철 당시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의 개입에 의해 조직적으로 밀수가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병철 회장의 복귀는 가능한 것이었다.(이병철 회장의 맏아들 맹희씨의 증언). 정부로서는 수사를 더 깊게 하면 삼성과 공모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했고, 삼성으로서는 사카린이 밀수품이 아니라고 버티다간 본질적인 부분(숨겨 놓은 밀수품)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카린 밀수 시인, 한국비료공업의 지분 절반 헌납」선에서 타협을 본 것이었다. 
(참고로, '한국비료공업'은 오늘날 '(주)삼성정밀화학'의 전신이다.)

 

9) 한일 협정 리베이트 :

 
<한겨레>와 <한국방송> ‘일요스페셜’이 보도한 민족문제 연구소 보고에 의하면, 1965년 한·일협정에 임해서 한국 집권자(박정희)가 일본쪽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뇌물을 받고 한국에 불리한 한·일협정을 체결해 준 것이 밝혀졌다6600만달러는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1달러당 255원'의 환율을 적용하여 168억원(당시 국가예산의 20%)을 능가하고 , 이로써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70조원 이상의 거액이었다. (오늘날 박근혜 정부가 일본으로 부터 70조원을 뇌물로 받았다고 상상해보아라..)
 
당시 일본은 3년간 점령했던 필리핀에게 무상 6억달러를 배상 하고 국교를 재개했다. 그러나 한국은 36년간 강점당해 온갖 살육·투옥·착취를 당하고 무상 3억달러를 그것도 ‘배상’이란 이름도 못부치고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았으니 웬일인가?    
 
더군다나 한·일협정에서는 평화선(어족자원보호선) 철폐, 독도문제 회피(독도 폭파 희망 피력 등), 징용·징병·정신대·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징용·징병자의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문화재 반환 포기,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 포기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익 손실을 내면서 대부분 일본쪽 주장대로 협정에 서명해 준 이유를 당시 순진한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 집권자들이 6600만달러의 일본쪽 뇌물을 받고 국익을 팔아먹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당시 순진한 우리 국민과 학생들은 군사정변 주동자들이 아무리 양심이 썩었어도 일제 식민지 통치를 배상받는 회담에서 일본 뇌물을 받고 국익을 팔아먹는 매국적 외교를 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국력부족으로 ‘굴욕외교’를 한 것으로 짐작했다.    
 
그래서 6·3세대가 선두에 서고 학계·언론계·문화계 온 국민이 총궐기해서 ‘굴욕외교’ 파기를 외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본 뇌물 6600만달러를 받고 국익을 팔아 ‘매국외교’를 한 무리들이, ‘굴욕외교’ 파기를 주장했다고 애국적 학생들과 국민들을 탄압하고 체포 투옥하여 징역을 살리고 불구자를 만든 것이었다.    
 
당시 한·일협정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소련·중공에 대항한 반공의 띠를 만들려고 추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때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한·일회담, 한·일협정의 일정까지 짜주면서 깊이 개입했기 때문에, 1965년 한·일협정에 관한 한 미국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자료다.
 
미국 중앙정보국 보고서에서 당시 한국 민주공화당이 1961~1965년의 약 4년간 일본의 6개 재벌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 받았는데, 이것이 4년간의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했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당시 공화당의 정치활동과 한·일협정이 일본의 배후 조종 아래 매국적으로 되었음을 알려주는 충격적인 것이다.   일본한테 받은 무상 3억이 한국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되었다는 일본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어불성설이다.
 
1960년 4·19혁명이 성공하여 4·19주체들이 강력히 경제개발계획 수립요구에 직면하자, 당시 민주당 정권은 부흥부가 중심이 되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1961년 5·16군사정권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정권을 찬탈한 5·16군사정변 주동자들은 반공만 강조했을 뿐, 경제개발은 상상에도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대기업 경제인들을 모조리 ‘부정 축재자’로 몰아 투옥하기 시작했었다.
 
정변 주동자들이 부흥부 접수 중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안’을 발견하고 이를 찬탈하여 헌정 중단의 중죄를 만회해 보려고 이듬해 62년부터 자기들이 실시하였다. 이때 개발의 종잣돈은 민주당 정권 부흥부 계획대로 내자와 세계 각국 차관으로 시작되었다.    
 
한·일협정 후 무상 3억달러와 차관 2억달러 등 5억달러는 개발 시작 4년 후인 1966년부터 현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10년 분할로 10년에 걸쳐 물자로 들어왔다. 이때 일본 플랜트도 몇개 들어왔는데, 부속품을 일제사용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일본 시장으로의 개편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차관 규모는 500억달러에까지 달했으므로 무상 3억, 차관 2억은 경제개발의 종잣돈은 커녕 한국경제의 일본시장화 정책의 출발과 단계적 강화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articleId=2647369&bbsId=D115&pageIndex=1
 
 

10) 끝 없는 리베이트 : 박정희는 이외에도 '정부 지불 보증'으로 기업이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올 수 있도록 해주는 댓가로 이병철로 부터 수 억원의 돈을 리베이트 받음.(중앙정보부 전 감찰실장 '방준모' 증언). 그렇게 '정부 지불 보증'으로 외국으로 부터 차관을 도입해온 기업들을 열거하면, 한진, 현대, 한일합섬, 한국화약, 조선공사, 선경, 쌍용, 효성, 신진, 럭키, 코오롱, 신동아, 삼성, 기아, 대농, 태광, 대한통운, 금호그룹 등 무수히 많다.. 열거된 기업들이 해외로 부터 빌려 온 차관은 1억 5천만달러 이상으로 모두 정부 지불 보증, 즉 국민들 세금을 댓가로 빌려온 것들이다. (열거된 기업들이 차관을 빌려올때마다 박정권에 리베이트를 대주었다고 하면 ㄷㄷ)
 
 
심지어 미국 기업으로 부터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 관계자는 "71년 김성곤으로부터 선거자금 1천만달러를 요구받고 협상해 4백만달러를 지급했다" 고 밝혔다. 걸프의 해외 정치헌금중 80%가 한국에 주어졌다는 불미스런 기록도 남아 있다. http://blog.daum.net/livenewyork/55
 
 
 
 
 
6. 증권파동 - 뒷돈 마련을 위해 증권 조작도 서슴치 않는 박정희
 
 
 5.16 쿠데타 집권 이후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단기간에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권 시장에 눈을 돌린다. 5.16 쿠데타가 터지고 4일 후인 20일께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강성원 육군소령은 윤응상을 방문한다. 윤응상은 황해 해주 출신으로  일본 식민지 시대때 일본중앙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인 1958년 부터 경희증권 고문으로 활동을 시작한 증권업 유경험자였다.

1961년 11월 초, 중앙정보부의 지령을 받은 윤응상은 중정 소속 정진호 소령으로 부터 3차례에 걸쳐 9억환을 받아 증권 시장 조작에 나선다. 윤응상은 1961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공공사업인 <한국전력>의 주식을 사들여 한전주의 시가를 올렸다. 당시 정부는 한전의 대주주로 있던 <농협>에 압력을 가하는데, 이때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이 농협중앙회장인 오덕준과 부회장인 권병호를 찾아가 한전주를 시가보다 싸게 매각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농협은 한전주를 시가보다 8백환 싼 주당 1만 5천 8백환의 가격에 불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농협은 정부의 요청해 의해 보유하고 있던 한전주 12만 8천주를 헐값으로 불하하였고, 윤응상은 그 중 5만 주를 사들여 약 8억 6천 환의 폭리를 취했다. 정부는 이 금액을 윤응상에게 자본금으로 운용토록 하였고, 윤응상은 <통일>, <일홍>, <동명>의 세 증권 회사를 설립하고, 공공기관인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의 70%이상을 점유하고 인사권 등 각종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부는 이때 윤응상을 도와 그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세웠다. 윤응상의 대증주(대한증권거래소주식) 70% 매입과 더불어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발표가 뒤따르자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증주는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하게 된다.

 1962년 4월 말, 윤씨는 대증주의 가격이 폭등하고 거래량이 폭증하는 시점에 40억환의 증자(주식 수 증식)를 추진한다. 이때 액면가 50전인 대증주를 29배인 14환 50전으로 뻥티기 하여 투자자들로 부터 청약을 받는데 이때 수탈한 금액은 무려 136억환에 달한다. 그러나 청약결과는 예상외였다. 급심한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의 청약률이 67%에 그치는 부진을 보인 것이다. 또한 주가가 갑자기 폭등하게 되자 투자자들은 본격적인 주식 매도(현금화)를 시작했고, 이로써 주가는 매도 물량이 많아져 급락하기 시작했다. 윤씨측은 주가 유지를 위해 매수를 거듭했으나 이는 결국 자금부족으로 이어져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수도결제 불능사태'에 직면하였다. 이에 윤씨 계열의 증권사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다. 중앙정보부는 곧바로 <한일은행>에 압력을 가하여 4월 30일, 윤응상이 50억 환을 한일은행으로 부터 융자받아 수도케하고, 남은 금액은 전액 현금 없이 연수표로 발행하여 5백 27억환을 지불케 하였다. 그러나 주가는 계속 떨어졌고 주식을 현금화하려는 투자자들로 인해 수도자금 부족 현상은 계속되었다. 한편, 주식 폭락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5,340명의 투자자들은 연일 자살 소동을 벌이는데 이들의 피해 금액은 무려 138억 6천만 환(현재가 약 60조)에 달했다. 
 
1962년 5월 24일, 윤씨 계열의 증권사들이 지고  있는 투자자들에 대한 미결제자금은 무려 3백 52억환에 달하여, 이로써 윤씨는 다시 정부와 중앙정보부 정진호 소령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6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 유원식과 정진호 소령 등이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에 압력을 넣어 2백 80억 환을 융자받아 겨우 난국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2백 80억환은 남한 총 통화량의 8%, 화폐발행고의 16%나 되는 거액으로서 국내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몰고 오는 등 그 폐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윤응상은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경영하는 <영화증권>과 <범일증권>에서 고객들로 부터 위탁받은 돈 10억원을 횡령하여 고객들이 윤씨를 고발했으나 중앙정보부는 검찰총장에게 압력을 가하고 담당검사를 좌천시켜 이 사건을 무마하려 하였다. 이때 중앙정보부는 피해 고객들인 황인섭 씨 외 12명을 중정으로 불러 변상해준다고 설득(혹은 협박)했으나, 투자자들은 결국 돈을 못받고 말았으며, 윤응상은 검찰진술에서 67억환(현재가 약 30조)을 중앙정보부에 제공해주었다고 말했다. 

 증권파동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이것이 여론화되자 6월 13일, 최고회의 특별감사단장 유양수가 진상조사에 나섰으며 이듬해 2월 중앙정보부가 '4대 의혹사건수사팀'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이 결과에 따라 윤응상, 서재식, 유원식(최고회의 재경위원), 천병규(재무장관), 강성원 등 14명이 구속되고 검찰과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등 전원 유죄 구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군법회의에서 "의혹의 원인없다."는 판시가 내려져 전원무죄를 선고받아 증권파동은 형식적으로  매듭지어졌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50300099111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5-03&officeId=00009&pageNo=11&printNo=9087&publishType=00010
 
 
 
 
7. 워커힐 사건 - 뒷돈 마련을 위해 공사비 횡령.
 
 
 5.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군사정권은 정치 공작을 위한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졌고, 정치 자금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무의미한 건설 사업을 벌여 공사비를 착복하는 것이었다. 공사판을 벌이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군사정권은 마침 당시 미군들이 휴가때가 되면 휴양지를 찾아 대부분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엔 이렇다할 윤락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맞이한 주한 미군들은 한국에 남아 달러를 소비하는 대신 일본 등 해외로 나가 달러를 소비하였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 정부도 정부 나름대로 미군의 달러가 자국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해외에서 소비되는것에 못마땅해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외화벌이의 명분을 내세워 윤락시설을 구상한다. 윤락시설의 이름은 얼마 전, 한국군 운전병의 실수로 죽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로 정했다.
 
 군사 정부의 워커힐 공사 계획이 발표되자,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은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국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며, 그 대신 박정희가 기생 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부터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었던 워커힐은 1961년 9월 부터 착공에 들어가 11개월만인 62년 12월 26일 완공이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워커힐의 공사 과정과 공사에 투입된 비용에 있었다.
 
 1961년 9월, 군사정권은 워커힐을 짓기 위해 성동구 광장동 부지 18만 평을 수용했다. 이때 워커힐 부지는 원래 '대한전선그룹'으로 유명한 설경동 회장의 땅이었다. 그는 당시만 해도 10대 재벌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새도 눈만 깜빡이면 떨어뜨리는 게 군사정권이었고,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국가 명의로 설경동의 부지를 헐값으로 사들였다.
 
 워커힐 건설사업에는 중앙정보부의 석정선(중앙정보부 제 2국장), 김용태(중앙정보부 경제고문) 등이 개입했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했는데, 교통부 장관 박춘식은 워커힐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지자 워커힐 이사장인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1과장, 중령)에게 정부주식 출자금 5억 3천 600만 원을 건설자금 명목으로 빌려주었다. 정부가 아직 공사에 드는 비용도 책정되지 않은 시점에 가불 형식으로 거액을 빌려 준 것은 야당 의원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건설을 위해 투입된 비용은 2억 8천만 원(22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 이는 형무소 죄수들과 각 군의 공병들의 무상 노역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부족한 장비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서 지원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워커힐 공사에 필요한 일본제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물지 않았는데,그렇게 무대 장치로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수입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무관세 무검사로 도입하여 150만달러(2억여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51쪽). 그런 까닭으로 애초 서울대 공대 교수나 외국 건축가들이 8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가 소요될 거라고 예상한 워커힐 건축을 불과 220만 달러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4,158대의 각종 장비와 연인원 24,078명을 무상 노역케 했으며, 건설비 명목으로 책정한 5억 3천 600만원 중 실제 공사에 투입된 2억 8천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 5천여만원(현재가 약 10조원)을 착복했다. 참고로 1963년도 한 해 국가 예산이 768억원이었다. 매춘굴을 짓는데 한 해 국가 예산의 0.6%인 5억원의 거액을 투입한 것이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350조(2014년도 국가 예산)의 0.6%인 20조원을 투입한 셈이다.  
 
 

 
 
8. 삼분폭리 사건 - 뒷돈 마련 위해 소비자 가격 올려
 
 
설탕·밀가루·시멘트를 생산하는 이른바 삼분재벌이 가격조작과 세금포탈 등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도록 묵인해준 대가로 공화당정권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긴 사건. 1964년 1월 15일 야당 원내교섭단체인 삼민회 대표 박순천 의원이 국회에서 폭로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져,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민주당 유창렬 의원과 삼성재벌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또한 민주당 측에서는 2월 5일 국회 제10차 본회의에 <특별국정감사 실시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폐기되었다. 이 사건은 밀가루·설탕·시멘트 등이 모두 국민의 실생활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품목인데다 62년의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만큼 전국민의 분노를 샀다.
 
밀가루, 시멘트, 설탕 등 분말(粉末)제품을 생산하던 대한제분(동아그룹), 대한양회(개풍그룹), 제일제당(당시 삼성 계열사) 등 3개 재벌을 중심으로 19개 기업이 담합해 정부 고시가격의 5배가 넘는 폭리를 취했던 사건이다.  민정, 민주당 등 야당은 삼분 재벌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부당 이득이 50~60억 원 선이며, 이 중 약 20억 원이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민정당 대변인 김영삼 의원은 "삼분업자들이 약 51억 원을 부정폭리 했으며, 부정 폭리금 중 약 20억 원이 두 번에 걸친 선거에서 공화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세 가지 분말 중에서 설탕은 삼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설탕은 분식장려로 인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국내 제당업자는 둘뿐이었다.
이중 삼성계의 제일제당이 약 60%를 차지했고, 당시 금액으로 15억을 소비자들로부터 빼앗아 갔다
 
 
1) 밀가루폭리
 

63년의 밀가루 값은 정부 고시가격이 1부대당 370원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시세는 1,200원까지 올랐다. 이로써 부대당 평균 이윤을 최저 500원선으로 잡더라도 846만 부대의 매출로 제분업자 및 밀가루 판매업자들이 챙긴 이익은 43억 원(현재가 19조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에 달한다. 특히 이 사건은 전국민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일어났기 때문에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2200329204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22&officeId=00032&pageNo=4&printNo=5642&publishType=00020

 
 
2) 설탕폭리
 

제당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63년의 내수용 설탕공급량은 3만 4천 톤이었고, 판매고는 18억원이었다. 이 발표를 바탕으로 설탕 1톤의 값을 계산해보면 5만 3천원 꼴이며, 근당으로는 33원 12전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도매값은 오르기 시작하여 63년 3월에 35원 55전, 4월에 36원 26전, 5월에 38원, 6월에 44원 30전, 7월에 58원 60전, 8월에 67원, 9월에 76원, 10월에 82원, 11월에 82원, 12월에 98원, 64년 초에는 102원까지 올랐다. 근당 평균 도매값을 80원으로 잡더라도 3만 4천 톤의 값은 곱하기 80을 하면 43억 5천 2백만원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정상적인 판매고인 18억원을 제하고 나면 25억 5천 2백만원의 폭리를 취한 것이다. (참고로 이 판매고 중에서 삼성의 계열사인 <제일제당>(오늘날 'CJ제일제당')의 공급이 60%를 차지했는데, 이로써 <제일제당>이 취한 폭리를 계산해보면 25억의 60%인 15억원에 해당하는 폭리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15억이지 이는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의 액수였다. 1963년 한 해 국가 예산 규모가 768억원 정도였으니 한 해 예산의 2%를 횡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350조의 2%인 약 7조원을 착복한 셈이다. 오늘날에는 세계적 기업이 된 삼성은 이렇게 정경유착으로 국민들 고혈을 빨아 성장할 수 있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240032920400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24&officeId=00032&pageNo=4&printNo=5643&publishType=00020
 
 
 
3) 시멘트폭리
 
 
 63년중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가 국내에 생산·공급한 시멘트량은 2,220만 부대(46만톤)에 달하며, 부대당 150원하는 시멘트가 시중에서는 300원에 거래되었다. 이 중 관수용 40%는 제외하고, 자유판매량 1,213만 부대에만 한정해서 본다 해도 1부대당 유통비를 제외한 평균 이윤을 100원씩 잡으면 12억원(현재가 약 5조원)의 폭리를 취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정부의 세무조사는 미온적이었다. 관련회사 18개에 대해 추징한 세액이 3830만원, 부과금이 390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의혹과 분노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건설협회의 추계에 의하면 이 협회 산하 회원들은 16만 톤을 시중 가격으로 매입하여 3억 7천만원의 직접적인 손실을 보았고, 이에 따른 공사 지연 등의 간접손실은 약 5억원으로 추정, 도합 8억 7천만원의 출혈을 보았다.
이러한 시멘트 파동으로  인해 한때 건설협회산하의 건설업자들이 80%이상 공사 스톱 상태를 나타내기도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2270032920400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2-27&officeId=00032&pageNo=4&printNo=5646&publishType=00020
 
 
 
 
9. 8.3 긴급 조치 - 개인 투자가들 희생시켜 재벌 이익 도모
 
 
 60년대 한국은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면서 공업화와 수출증대를 기반으로 사상 유례없는 외형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자기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타인자본, 특히 사채의존도가 높다 보니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이자 갚기에 급급한 형국이었다. 여기에 물가상승과 환율인상 등 고도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제2차 경제개발계획 후반기인 70~71년 들어 기업들의 자금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불황의 여파는 성장률 하락으로 나타났다. 69년 13.8%에 달했던 경제성장율은 ▲70년 7.6% ▲71년 8.8% ▲72년 5.7% 까지 떨어졌다. 수출증가율도 68년 42%에서 ▲69년 34% ▲70년 28%대로 하락했다. 자금, 생산, 판매, 고용 등 경제 전반에 걸쳐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부도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러다가는 3차 경제개발계획(중화학공업 육성)도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 기업들의 경영 여건이 이처럼 급격히 악화된 것은 1966년 외자도입법이 실시되고 정부가 외국인의 국내 자본 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에 따라 국내 기업들이 외국 자본을 마구 빌려다 썼기 때문이다. 이후 70년대 부터 외국 사업차관의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서 기업들의 자금사정을 압박했기 때문. 여기에 정부가 수출촉진을 위해 환율을 18% 대폭 평가절하(환율인상)한 것도 차관기업들의 원리금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재로 작용했다. 고도성장의 결실을 누리기도 전에 이처럼 기업들이 일제히 경영난에 봉착한 것은 그만큼 국내기업들의 자본축적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환율상승으로 인한 원리금 부담으로 외자 도입이 어렵게 된 기업들은 국내의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서울의 명동과 소공동 등을 중심으로 적어도 100개 이상의 대규모 사채중개업소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외형상 출판사나 전화거래상 등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당시 사채의 평균금리는 월 3.84%로 연 46%를 넘는 고금리였지만 돈을 구할 수 없는 기업들은 이들 사채업자들의 돈이라도 감지덕지 써야 할 형편이었다. 이에 금융부담이 가중화 되어 부실화 수준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1969년 83개 업체중 45%가 부실기업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이것이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 회원들이 박정희에게 사채동결 조치를 요청하게 된 배경이다.
 
1971년 6월11일, 전경련의 요청으로 박정희는 김종필 총리와 김학렬 부총리, 남덕우 재무부 장관 등을 배석시킨 가운데 김용완 전경련 회장, 신덕균, 정주영(현대그룹 창업자) 부회장 등을 만났다. 김용완(오늘날 '(주)경방 그룹' 회장 김준의 조부)은 이 자리에서 재계가 겪고 있는 어려움 전반에 대해 설명하고, 특히 기업들의 사채이자 부담이 커 부실기업이 갈수록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해결책으로 기업사채를 은행에서 떠맡아 줄 것과 세금감면, 금리인하 등 특단의 대책을 요청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정렴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김(용완) 회장은 고리사채에 대해 정부가 비상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모든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역설했지요. 특히 자신이 경영하는 경성방직(경방의 전신)도 사채를 쓰고 있었는데 최근 공장부지를 팔아 다 정리했다면서 조금도 사심없는 건의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 <한국 경제정책 30년사> 中 -

 전경련 회장단으로 부터 연쇄부도 가능성을 보고받은 박정희는 사실확인 작업에 나섰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전경련 건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대해 “김(용완) 회장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며, 사태가 금융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채를 일정기간 동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고했다. 상황을 파악한 박 대통령은 즉각 대책마련을 지시한다. 사채동결을 통해 당장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 기업공개를 유도해 기업들의 직접자금 조달을 원활하게 만드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72년 8월2일 밤 11시40분,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에서 8.3조치가 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형식으로 의결, 공포됐다. 긴급조치의 골자는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72년 8월3일을 기준으로 무효화되며 
▲정부가 2000억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고리 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장기저리 대출로 대체해준다는 것이었다. 채무자는 신고한 사채를 3년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상환하되 이자율은 월 1.35%로 낮췄다. 당시 사채 평균이자가 월 3.84%였던 만큼 긴급조치로 인해 기업의 사채이자 부담이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경감된 셈이었다

그러나 8.3조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발적인 사채 신고가 필수적이었으나, 시행 초기에 신고실적은 매우 저조했다. 기업들 입장에서도 신고하는 것이 유리한 지, 안하는 것이 유리한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사채 신고실적이 저조한 것으로 드러나자 박 대통령은 “신고된 사채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금출처조사를 하지 말라”고 국세청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자금원 노출을 우려해 사채신고를 꺼리는 행위를 막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국세청은 각 세무서에 관할 기업들의 사채신고를 독려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청와대 비서실장이 소공동 세무서에 나가 직접 기업인들을 만나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태완선 부총리와 남덕우 재무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정책 수뇌부는 일제히 TV 대담프로에 출연, 사채동결조치의 당위성 홍보에 주력했다. 이 같은 전방위 홍보에 힘입어 시행 초기 저조했던 사채 신고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9일, 전국 92개 세무서와 각 은행 창구에서 마감된 사채신고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3456억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통화량의 80%에 달하는 규모로 전경련이 예상했던 1800억원의 두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당시 지하경제가 얼마나 번창했는 지를 보여주는 구체적 물증이었다. 총 40,677건에 3,456억 원의 신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조사 결과 사채의 3분의 1에 가까운 1137억원이 자기 기업에 사채놀이를 한 기업주의 돈인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전경련 건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던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사채 때문에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대기업들이 뒤로는 위장사채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8.3 사채동결조치는 기업 입장에서 더 바랄 나위없는 최상의 지원책이었다. 당장 사채이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데다 원금상환 일정이 최장 8년 뒤로 유예됨에 따라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8.3조치로 3400억원을 넘는 거액사채가 일괄 동결되고 만기연장됨에 따라 그동안 줄을 잇던 대기업 부도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대로 사채를 빌려준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조치였다. 이자수입이 1/3로 대폭 줄어들고 향후 3년간은 원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됐다. 사채업자의 소득을 박탈해 기업에 이전해 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조치였다. 특히 서민들의 피해가 엄청났다. 전체 사채규모의 90%의 신고건수를 차지하던 일반 소시민들의 소액(300만원 미만) 사채에 대해 적용시켜 일반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했음에도 기업인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당시 사채 신고액 중에서 약 3분의 1이 소위 '위장 사채' 즉, 자기 기업에 스스로 사채놀이를 해 기업은 적자로 만들고 기업가만 살찌는 식의 사채였음에도 이에 대한 대책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한다(이는 박정희 정권이 위장사채 기업들을 엄벌했다는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상의 말과는 다르다.)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0299&idxno=377462#

 
 이처럼 8.3 조치는 기업 자금난을 풀고 어려운 경제 여건을 타개하기 위한 극약처방이라고는 하지만 개인 사채권자의 무한대 희생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형평의 문제로 남는다. 또 사채를 많이 쓴 기업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고, 사채를 덜 쓴 건실한 기업에게는 혜택이 덜 가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재계의 도덕 해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폐단은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기업들에게 미증유의 특혜를 줌으로써 박 정권과 재계간 정권유착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외형상으로는 8.3조치를 계기로 한때 7.8% 까지 떨어졌던 경제성장율이 73년 다시 14.1%로 뛰어올랐으나, 재무 불건전 기업들을 그대로 양성하여 훗날 오일 쇼크 등 경기 파동이 일어났을때 위장사채 기업들이 연이어 줄도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8.3 조치는 재벌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 투자자들만 희생시켰을 뿐 기업의 재무 건전성 향상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채 정경유착 구조만 심화시킨 것이다. 긴급조치는 한국기업으로 하여금 자금의 차입에 의존하게 하고 기업내부의 자금적립에 의거하지 않게 만들었다. 때문에 '8.3'긴급조치 등 관치금융은 1997년 IMF 금융위기의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10. 선거 공작을 위해 한 해 국가 예산의 1/10 지출
 
 
 1971년 7대 대선은 금권이 휩쓴 사상 유례없는 '부정타락 선거'였다. 박정희는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돈(2014년도 국가예산이 357조니까 현재 가치로 약 35조)을 퍼부었다. 관권이 총동원돼 선거운동에 투입됐다. 지역감정을 본격적으로 조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공화당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경상도에 피바람이 분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야당 유권자를 투표인 명부에서 누락시키고 친여 유권자는 중복 등재시키는 조작도 일삼았다. 투표 당일에는 릴레이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등 불법이 난무했다.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참관인이 쫓겨나기도 했다.

총체적인 불법ㆍ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95만표 차이로 간신히 김대중 후보를 따돌렸다.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도 나돌았다. 간담을 쓸어내린 박정희는 이른바 유신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꿔버렸다.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도 등장했다. 경쟁자였던 김대중은 감옥을 들락거리며 해외 망명지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6&aid=0000068700
 
 
 
 
 
 
11. 건설주 파동 - 정부의 섣부른 통화량 회수로 증시자금 막혀 일어난 제 2의 증권파동
 
 
 
건설주 파동의 원인은 '중동특수'와 '강남개발' 그리고 정부의 '정책 미스', 이 세 가지였다.
 
 1973년, 중동에서는 아랍-이스라엘 간의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이 터졌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탈환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중동 각국이 대대적인 석유감산정책을 펼침으로서 원유값이 폭등, 달러가 넘쳐났다. 그러자 중동 각국엔 오일 달러로 앞다투어 도로를 건설하고 주택을 대량 건설하고 항만을 축조해 바다를 메우는 공사 등으로 인해 대량공사 붐이 불어닥쳤다. 한편, 베트남에서는 미군공사를 도급받아 건설사업을 벌이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1974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쫓겨나자 이들 업체들 가운데 대다수 업체가 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중동 건설 시장에서 건설공사를 수주하려면 국내 은행의 '입찰보증서'와 '지급보증서'가 필요했다. 특히 지급보증서는 자금 대출과 직결된 것으로 만일 잘못되면 은행이 망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지급보증업무처리 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은행이 강제로 기업에 돈을 빌려주도록 했다. 애초 정부는 중동 진출 업체의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14개 업체에 한해 중동공사를 하도록 했으나 1976년 부터는 34개 업체로 늘어났다. 그러다가 1978년 후반에 당시 건설부장관인 신형식의 주장으로 건설업체가 급증하여 당시 중동계약고가 전체 해외건설수주의 98%(79억달러)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러한 중동붐 현상에 이어 정부가 '과밀화된 강북 인구를 분산한다'며 강북 지역 건물 신축 금지, 주요 시설 강남 이전 등 강남 개발에 본격 나선 점도 건설주 상승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건설 업체들은 이 과정에서 서로 수주 경쟁을 벌였고, 정부가 단기외화 무제한 도입을 추진하면서 은행으로 부터 '수출선수금'등을 무리하게 대출받아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건설업체들의 대출 경쟁은 시중 통화량 증가로 이어져 소비자 물가 지수는 연일 상승하여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매년 평균 10% 이상의 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 정부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뒤늦게나마 통화량 억제 정책을 펼치게 된다.
 
 정부는 시중 부동자금을 저축으로 흡수하고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1978년 6월 13일을 기해 금리를 대폭 인상조치했다. 또한 수출선수금 등 해외로부터의 자금 도입도 제한했다. 그러나 저축성 예금 증가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물가 불안이 계속되었다. 저축성 예금을 통한 통화환수가 부진, 동년들어 5월말까지 32억원 증가에 그쳤던 통화량은 6월 중 1198억원이나 증가하여 물가불안을 가중시켰다. 정부가 수출선수금 등 단기신용 도입은 억제한 반면, 건당 1000만 달러가 넘는 장기신용 도입에는 주력함으로서 지속된 인플레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동년 초, 현대건설이 법을 어기고 은행마감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 건설공사 명목으로 선수금 2억달러(1000억원)를 몰래 환전해 간 것도 통화량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그 당시 1000억원이면 전체통화량의 꼭 10%에 해당된다. 현대건설은 이때 자국의 물가를 올리며 환전해간 돈으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건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화량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은행으로 부터 돈을 빌리기 어렵게 된 기업들이 사채를 남발하면서 민간인들이 기업의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시중에 자금이 풀려 통화량이 늘어난 것이었다. 당시 채권 시장의 규모는 전체 통화량의 50%에 이르는 5000억원에 달했다.
 
 기업은 한편 주식시장을 통해서도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는데, 이에 따라 증시는 활황을 띄게 되어  동아건설ㆍ대림산업ㆍ경남기업ㆍ삼익주택 등 당시 39개의 건설 종목들이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동아건설과 대림산업의 경우 투기 열풍 전 단 500원에 불과하던 주가가 8,900원까지 폭등했다. 1977년 종합주가지수의 연간 상승률이 40%였으나 건설업종은 175%가량에 이를 정도였다.
 
  정부는 통화량 가중과 인플레 현상의 주범인 기업의 사채남발은 규제하지 않았다. 대신 '양곡증권' 발행으로 섣불리 시중 통화량을 회수하려 함에 따라 증권시장으로의 자금 흐름이 묶여 증시가 난황을 겪게 된다. 양곡증권은 정부가 발행하는 재정증권의 일종으로 민간에 유통되어졌다. 박정희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60년대 부터 다품종 신종벼인 '통일벼' 재배 사업을 적극 육성해왔는데, 이에 따라 쌀값이 급락하고 농촌 경제가 거의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70년대 중반 부터 긴급 부양책으로 대대적인 수매사업을 벌이기 시작한다.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일정량의 쌀을 농부들로 부터 사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적된 정부 재정적자는 엄청났으며, 정부가 대규모로 쌀을 사들일때마다 시중에 통화량이 엄청나게 풀려 인플레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양곡증권은 정부의 수매사업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메우고 시중의 통화량을 환수하여 인플레를 막기 위한 재정증권, 즉 정부채권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양곡증권은 인플레 방지에는 실효를 거두지 못한채 증시에 치명타만 안겨 주게 될 터였다. 1978년 박정부는 무리해서 전체 통화량의 25%에 달하는 2500억원 규모의 양곡증권을 발행한다. 기업들의 사채남발로 인해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의 무리한 양곡증권 남발로 인한 자금 회수는 물가 상승은 억제하지 못한채 통화량 흐름만 더욱 둔화시켜 증시의 불황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거듭된 물가 상승의 주범이 기업의 대규모 사채자금과 해외의존차관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규제는 없이 '가계 통화량'만 급히 회수함으로서 시중 자금의 흐름이 둔화되어 주식시장이 불황을 맞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건설주 파동의 배경이다.
 
 본격적인 건설주 하락 현상은 1978년 8월 12일을 기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양곡증권 남발에 이어 '증권거래세 신설', '배당세액공제 철폐', '시가발행제도 도입' 등 증권시장 규제정책을 잇따라 추친했다. 정부는 통화량 증가와 인플레의 주범이 증권시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건설주는 물론 증시 자체가 끝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정부의 수출선수금 규제로 인한 <원그룹>ㆍ<율산그룹> 등의 기업도산도 주가 폭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건설주들은 고점 기록 이후 무려 74%의 급락세를 나타냈으며, 일부 종목은 액면가 이하로 주가가 폭락했다. 당시 증권사 지점장이 자살하고 실직자들이 쏟아지는 등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78년 11월 하순에는 63년의 증권파동 이후 처음으로 투자자들의 집단항의 소동이 벌어졌다. 11월 22일, 300여명의 투자자들이 명동 거래소 앞에서 부양책 아니면 휴장을 촉구했으며 이러한 시위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부산과 대구 지역에서 항의가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정부가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 기관투자가들에게 주식 무제한 매입지시를 내렸으나 이 기회를 틈탄 기업들의 보유주 투매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꼴이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9년 '2차 석유파동'까지 불거지면서 국내 증시는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장기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63년도의 증권파동이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가 악의적 목적에서 일으킨 주가조작 사건이라면, 78년도의 건설주 파동은 서민들의 생계와 직계된 물가안정을 기하기 위해 선의적 목적에서 무리하게 통화량 회수 정책을 펼쳤다가 주식시장만 붕괴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결국, 박정희는 악심을 품으나 선심을 품으나 경제 살리는데는 소질이 없었다는 증거가 되고 만다.   
 
 
 
 
12. 무리한 중화학 투자로 기업 도산 속출(2차 오일파동)
 
 
 
1979년 2월,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새로 집권한 호메이니 정부는 혁명 직전 미국으로 탈출한 팔레비의 송환을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가 거절하자 서방국가 석유수출 전면금지 조치를 내린다. 세계 석유 공급량의 15%를 차지하는 이란의 석유수출 금지조치로 인해 다시한번 석유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 사건을 '2차 오일쇼크'라고 한다.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자 한국은 72년 부터 추진해오던 중화학 공업 중심의 3차 경제개발계획이 발목을 잡히면서 엄청난 공황 상태에 직면하였다.
 
1배럴에 12달러 하던 유가가 36달러까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직전의 상태에 직면했다. 이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하여 (IMF때도 50%에는 이르지 않았음) 기업들이 줄도산하였고,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 했다.
 
 이때 살아남은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을 갚기 위해 필사적.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의 연속이 계속되었으며,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 1979년말 180억달러(당시 원화가치 8조7천억원)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달러(당시 원화가치 44조 5천억원) 수준으로 급증하였다. (참고로 85년도 수출액은 300억달러 수준이었으며, 한 해 국가 예산은 12조였다.) IMF의 근본적인 원인이 사실상 박정희, 전두환 두 정권의 무리한 중공업 투자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가 사망한 직후인 1980년 초반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나 다름없었는데, 80년도 경제성장률은 -2.1%였으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이르렀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안겨준 선물이었다. 경상수지는 53억 1200만 달러라는 대규모 적자를 냈으며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그나마 한국 경기에 다행이라면 80년대 세계사를 휩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결과로 인한 저유가 시대 도래와 '플라자 협상'에 따른 저환율 시대의 도래로 기업 생산성이 좋아져 가까스로 국가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결된 88년 이후 국제원자재 가격상승 등 대외적 여건이 변화한데다 3저호황기(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시대)에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이 생산적 투자가 아닌 부동산 및 주식투기로 집중되는 대내적 요인으로  인해 수출경쟁력이 급속도로 둔화되면서 수출이 침체되고 적자수출을 재현하는 등 한국 경제는 침체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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