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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소녀
게시물ID : bestofbest_1851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피즈치자
추천 : 633
조회수 : 35914회
댓글수 : 78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4/11/07 04:01:46
원본글 작성시간 : 2014/11/05 20:47:27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내 안의 두려움과 비겁함을 누르고

정의가 특별함이 아닌 보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격적인 시작은 그랬다.

" S기업에서 전시를 한다고? 
그럼 S기업을 까는 걸 만들어야지."



.........

모난 돌인 나는 학교의 악습을 고발했다가 3년간 휴학을 했다.

늘 그렇듯 투명인간처럼 다니던 4학년 1학기, 

내가 수강한 전공필수 과목에서 하는 것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인 

S기업 사옥 외부에 전시하는 것이었다.



S기업은 학생들에게 일정 금액의 돈을 주고,

학생들은 한 학기 내내 작품을 만든다.



교수님은 S기업이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써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기회인지 설명했다.



그 앞에서 발표한 나의 첫 피피티 내용은 대략 이랬다.


● 위안부 소녀상은 전쟁 속에서 가장 약한 존재라 할 수 있는 

  어린 소녀가 겪은 끔찍한 역사의 상징이다.


 전쟁이 없는 지금이라고 그런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어린 소년 소녀들이 끔찍한 환경에서 부자들의 돈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S기업 반도체공장에서는 안전관리 및 고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린 소녀에 불과한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죽었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안 좋은 기업으로 뽑히기도 했다.


 길고 긴 투쟁 끝에 얼마 전 법원에서 산재판정을 받기도 했다.
  

 나는 역사 속에서 가장 약한 소녀들이 끔찍한 피해를 당했다는 점에서

    위안부 소녀들과 산재 피해로 죽어간 소녀들이 똑같이 너무나 아프다.


● 그들을 외면한다면, <또 하나의 소녀>가 생길 것이다.



작품 구상은 이랬다.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의자.

첫 번째 의자 위의 위안부 소녀. 

두 번째 의자 위의 백혈병 소녀. 

세 번째의 빈 의자.




그리고 이런 식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널린 게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 기성작가인데

굳이 비교적 서툰 대학생에게 전시기회를 준다는 것은

대학생이 가져야 할 시선 등을 요구함이라 생각했다.

나는 예술가는 기분 좋게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S기업에서도 무조건 S기업을 찬양하는 작품만을 만들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사실 이 정도의 비판은 당연히 예상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건설적으로 수용해 더 큰 기업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교수님은 의외로 화를 내거나 안된다고 하지 않으셨고,

다만 재료적인 측면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실 뿐이었다.



내 작품의 주재료는 나무와 종이였는데, 

이게 비바람을 견디지 못할 것 같으니

철을 용접해 금속조각을 하는 게 어떻겠냐....

는 얘기를 지속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한 재료를 살 돈도 없었을뿐더러

철판 하나 나를 힘도, 그걸 매번 도와줄 만한 학과 친구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나무로 의자를 만들고 종이와 점토를 사용해 소녀들을 만들었다.



모델이 되어주려던 소녀1은 작품설명을 들으신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날 도와주지 못하게 되었고,

소녀2는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르바이트비를 넉넉하게 주지 못했고 

그게 미안해서 자꾸 뭘 해먹였다.




완성 후 몇 겹의 방수작업이 끝나자 작품은

내가 양동이로 물을 쏟아부어도 멀쩡한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용접이나 플라스틱 같은 것보다는 날씨에 훨씬 약할 것이었다.

작품은 몇 달간 외부에서 전시되어야 했고, 

그 기간에는 장마도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S전자 사옥부지는 마을 수준으로 거대했다.

애들은 거기 가서 작품을 어디에 전시할 것인지 정해놓고 왔다.

하지만 나는 가지 못했고, 그런 사람들을 포함해 모두는

위성에서 찍은듯한 사옥 내부 사진을 붙여두고

자기가 전시하고 싶은 곳에 스티커를 붙였다.




나는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스티커를 붙였다.





작품을 싣고 가서야 나는 내가 선택한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았다.

그 자리는 대로로 사람이 많이 지나갔고, 

밝았으며, 뒤에는 풀밭이 펼쳐져 예뻤다. 

그곳에는 다른 아이들의 작품도 있었다.

풀밭에 평화롭게 누운 여인 조각, S기업의 혁신을 표현한 추상적인 조각 등등..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작품을 놓기로 한 바로 그 자리 옆에는 

아주 커다란 비석처럼 생긴 탑이 있었다.

그리고 그 탑에는 '무재해'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무려 무재해 기원탑 앞에 산재를 입은 소녀상을 앉혀놓은 것이었다.

그 아이러니가 나를 벅차게 했다.



나는 비를 맞으며 작품을 설치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 작품은 내가 없는 사이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겨졌다.

그 자리는 어떤 건물의 뒤편이라 사람이 거의 지나가지 않았고,

어두웠으며, 뒤쪽에는 건물 벽에 다닥다닥 붙은 에어컨 실외기뿐이었다.





사실 작품 설치가 끝난 후 교수님은 작품을 옮기라고 했었다.

전시기회까지 주고 S기업이 자기들 비판하는 걸 받을 것이 무어냐고.

S기업의 전시 담당 사원은 내게 두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비를 맞으며 작품을 옮겼다가, 

너무나 외진 장소라서 다시 옮겨왔었다.



교수님은 작품을 옮기지 않으면 성적을 낮게 줄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외진 곳에서 전시한 나는 D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고집을 피웠고, 원하는 자리에 작품을 두고 떠났었다.




그리고 '네 작품 옮겼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교수님께 화를 내지도

왜 그러셨냐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도 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S기업에서 다정한 대우를 받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하지 않았다.

그런 곳이라면 산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영화도 그런 대우를 당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작품은 망가지거나 하면 곧바로 주인에게 연락을 준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 작품도 마찬가지일까.

내 작품은 비바람에 그리 강하지 않게 설계되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혹은 누군가 망가뜨릴 마음을 먹는다면,

아주 손쉽게 부술 수 있다.





한참 후 도록이 나왔고, 

내 작품은 엉뚱한 이름이 붙은 채 인쇄되었다.





14.11.6 바로 내일, 폐막식에 참여한다.

나는 그곳에서 작품을 보고, 

마침 그 날 수원에서 노동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활동하신다는

반올림이라는 단체 분들과 만나뵙기로 했다.




나는 그냥 예술가가 되고 싶은 학생일 뿐이다.

그렇게 용감하지도, 그렇게 이타적이지도 않다.





또 하나의 소녀는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또 하나의 소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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