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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최동원 선수의 팬이라면...
게시물ID : bestofbest_2320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싼커피
추천 : 225
조회수 : 20347회
댓글수 : 27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6/02/14 04:13:21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2/12 18: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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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문현로터리 시위(1987.06.26).jpg

너무 익숙한 사진이죠? 다들 한 번쯤은 보셨을껍니다.

근데, 저 사진이 찍힌 장소가 어딘지 아시나요?

바로 부산입니다.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그리고, 저 현장에 부산 야구의 자존심 최동원 선수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열기로 타오르던 부산. 시위대와 전경들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시내를 야구점퍼를 입은 청년이 택시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전경들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시위대는 물론 길 가던 시민들까지 얼굴을 감싸쥐고 쓰러지며 고통스러워했다. 택시 안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청년은 분노했다. “아니, 경찰이 맨몸으로 서 있는 시민들한테 저래도 되는 깁니꺼.” 즉시 택시에서 내린 청년은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전경들에 맞서 돌을 던졌다. 그 돌은 너무나 빠르게 너무나 정확하게 너무나 멀리 날아갔다. 시위대 중 누군가가 야구점퍼를 입고 돌을 던지는 이 청년을 보고 말했다. “어? 최동원 선수 아입니꺼!” 

몇몇 목격담과 함께 부산 지역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 전설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을 버린, 최동원의 아이들’ 한겨레21 1096호)

최동원 동상.jpg


최동원 선수는 부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야구선수입니다. 부산 야구의 성지인 사직구장 앞에 최동원 선수의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이 그 증거죠.

1984년,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결승전에서 맞붙었습니다. 약체라고 평가받던 롯데를 대결 상대로 고르기 위해 삼성이 일부러 져주기 게임을 했다는 의혹도 있었죠. 그래서, 전문가뿐만 아니라 야구팬들, 일반인들까지 모두 삼성의 승리를 예상했었죠.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김시진, 김일융이라는 막강한 선발투수진에 장효조, 이만수, 장태수, 오대석 등 막강 화력의 타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죠.

결과는 롯데 자이언츠의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롯데의 첫 우승이었죠. 7전 4선승제 경기에서 최동원 선수 혼자 4승 1패를 기록했습니다. 고교 야구도 아닌 프로야구에서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하다니...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롯데하면 최동원, 최동원하면 롯데라는 등식이 성립했었죠.

그렇게 몇 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최동원 선수가 갑자기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합니다. 누구보다도 롯데를 사랑하고 부산을 사랑하던 선수가 말이죠.

바로 선수협의회 창립 주동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88년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창립을 주도한 최동원은 그 해 9월 13일 열린 비밀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되었던 셈이죠.

당대 최고의 선수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으나 동료 선수들의 어려움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던 겁니다. 부산 싸나이 특유의 의리가 작동했겠죠.

당시, 역시나 부산 싸나이였던 문재인이 선수협의회 구성에 있어 무료로 법률 자문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야구팬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MLB파크’에 직접 글을 올려 그 사실을 알리기도 했었죠.

문재인 MLB파크.JPG


하지만, 모든 구단이 나서서 선수협의회 해체를 시도했고 최동원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로 강제 이적을 당했습니다. 원치 않았던 삼성에서의 선수생활은 처참했습니다.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오로지 롯데로의 복귀만 바라고 있었죠.

하지만, 결국 최동원 선수는 롯데 자이언츠로 돌아오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합니다. 

선거포스터.jpg


실의에 잠겼던 최동원은 1991년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을 걸고 부산광역시의원 선거에 도전합니다. 야구로 안된다면 정치로라도 부산 땅을 다시 밟고 싶었나 봅니다. 당시 부산에서의 최동원의 인기를 감안하면 이름만 걸어놔도 당선된다고 다들 얘기했었고,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 김영삼이 입당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삼은 최동원의 경남고 선배이기도 했죠.

하지만, 최동원은 당선에 유리했던 민자당 입당 제안을 뿌리치고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이 있었던 ‘꼬마 민주당’ 후보로 출마합니다.

결과는 역시 낙선이었습니다. ‘부산의 영웅’ 최동원의 인기도 지역주의를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야구를 통해서도, 정치를 통해서도 최동원은 부산의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2011년 9월 14일,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동원은 당대 최고의 선수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동료 선수들을 위해 선수협의회 창립을 이끌었고, 입당만 하면 당선이 확실했던 민자당 공천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자진 입당하여 출마했습니다.

부산 출신의 유명한 바보 2명이 있죠.
한명은 지금까지 얘기한 최동원 선수이고, 다른 한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었고, 지역주의에 안주할 수 없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 두 명은 부산 사람들의 외면 속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바보는 진정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요.

의리의 부산 갈매기, 더불어 다시 한 번 날아오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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