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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쉽다. 쉬워서 어려운가.
게시물ID : bestofbest_2371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요깅요긔
추천 : 188
조회수 : 25320회
댓글수 : 62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6/03/30 01:47:07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3/28 23:32:08
 

적어도 돈 버는 건 쉬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근래에 벤츠 못 산다고 잠시 우울했던 적은 있으나 그럭저럭 회복됐다. 차는 내가 생각해도 좀 돈지랄인 것 같았다.

일은 항상 많이 한다. 프리랜서라 작업시간이 가늠이 안 갔는데 사무실 얻어서 출퇴근 하다보니까 맨날 야근이더라. 시벌.

공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떠올려보면 고등학교 일학년 말쯤부터? 생각해보니 그리 일찌감치는 아닌 것도 같고. 이학년 땐 하고 싶은 거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엄마 아빠랑 죽자고 싸웠다.

난 공부한다고 거짓말하고선 몰래 딴 짓하고 아빠는 내 물건 부수고 나는 울고 아빠는 화내고 엄마도 화내고 꽉꽉빽빽. 이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엄마는 그 제목을 읊었다. 너를 위해.

근데 그게 꼭 하고 싶었다기보단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다. 머리에 영 다른 게 들어있는데 문제집 푸는 게 재밌을 리가 있나. 내가 생각해도 좀 대책이 없었는데 부모님 보기에는 훨씬 더 한심했을 거다.

엄마랑 아빠가 말했다.

‘다 네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너 그거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냐.’

근데 먹고 살 수 있었다. 수입이 생긴 후로부터 가족이랑 별다른 부딪음은 없다. 오히려 일 안 하고 있으면 놀지 말라고 쪼시는데 업체 사람보다 무섭다. 맨날 가출할 생각만 했었던 것 치곤 결과가 허무하군.

옛날에 오빠가 내 걱정을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라고 대답했었는데 요즘엔 본인이 더 대책 없다. 내가 어쩌려고 그러냐고 물으면 똑같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하고 대답한다. 이런 거 닮으면 안 되는데. 케세라세라

취미로 시작했던 일을 직업으로 가진 케이스라 가장 좋아하고 안 질리는 일이 이거다. 그러다보니 다른 취미가 없다. 말하자면 일이 취미다. 근데 일이 취미가 될 순 없었다. 원래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기다가 풀었는데 여기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풀 데가 없다.

즐거워서 몸을 혹사시키다가도 급격히 생활에 힘이 빠진다. 그럼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먹고 자기만 한다. 그러다보면 ‘아, 나 지금 좀 쓰레기 같아.’라는 생각이 들고 슬슬 작업 마감이 다가온다. 그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일한다. 어쩔 수 없이 일해도 일이 되긴 된다. 좀 생활의 여유를 가지면 될까 싶은데 또 커리어 욕심은 더럽게 많다. 좌뇌와 우뇌과 따로 노나 봐.

무작정 우울해질 때가 있다. 뮤지컬도 보러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책도 사고 양초도 모으고 여행도 가고 별의별거 다했는데 그다지 재미가 없다. 그나마 돈 쓸 때는 재밌다. 뭘 살 때 오는 충족감이 좋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갑자기 이제 와 인생 상담이 하고 싶어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 들렀다. 처음으로 선생님이랑 단 둘이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 연봉을 물으시기에 말씀드렸더니 자기 연봉 두 배라고 놀라셨다. 그리고 말한다.

‘그래도 너는 잘 될 줄 알았다.’

나는 몰랐는데.

어쨌든 그 다음엔 뭐 배우고 싶진 않느냐고 물으셨다. 말하자면 대학 얘기다. 예전엔 대학 안 가냐는 말 들으면 진저리가 쳐졌는데 이번엔 조금 혹했다. 졸업하고 보니 왜 그러셨는지 알 것도 같다. 맨날 뒹굴거리고 처먹기만 했더니 점점 멍청해지고 있다. 사람은 배움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디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이 생각보다 중요했다. 친구들은 새내기라 MT도 가고 미팅들도 하고 재수 없게 즐겁다. 여기서 재수생들은 빼고.

그놈의 과톡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과잠 안감은 누빔이야 아니면 그냥 천이야? CC는 정말 엿 되는 미래 밖에 없는 거야? 또 학식은 대체 무슨 맛이느냐고.


어디 취직해 볼까도 생각했다. 그럼 적어도 생활 습관이 잡힐 테니까. 하지만 학교 다닐 때도 맨날 지각하고 빼먹고 했으니 직장 가진다고 새삼 나아지진 않겠지. 아마 한 달도 안 가서 잘릴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졸 받아주는 데가 없더라. 대한민국 학벌주의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러면서 시도하지 않는 나는 더 마음에 안 든다. 전자가 변함없이 이어지듯 후자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의지가 없다. 끈기는 더 없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싶은데 그럼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외롭고 공허한 곳일 거야.

이렇게 살다 죽겠지 생각하면 허무한데 죽고 싶지도 않다. 손목 긋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섭다. 스무 살에 인생무상거리고 있으니 웃기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으니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다. 익명이라는 건 좋은 거였다. 누군가는 생각하겠지.

이 년 웃기는 년일세.

그럼 이렇게 대답한다. 예, 제가 허락하니 관객 분들은 마음껏 비웃어주십시오.

스스로가 운이 좋은 편이라는 거 알고 나보다 힘든 사람도 많은 것도 아는데 그거 생각하면서 회복하기는 비겁하다. 남의 손써서 자위하는 게 기분 좋긴 한데 끝나고 나면 배로 쪽팔린 법이다. 혼자 하는 위로보다 빨리 싸는 만큼 현자타임도 일찍 온다. 모름지기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강조하는 자기주도학습! 하지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사교육이지.

이쯤 썼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다짐 혹은 교훈이 나와야 되는데 결론이 없다. 그냥 쭉 이대로 살지 않을까. 인생엔 원래 기승전결이 없다고 누가 그랬다. 슬퍼하며 울어야 하나 아니면 위로로 삼아야 하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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