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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대 1의 쌍권총의 전설 의열단 김상옥 의사
게시물ID : bestofbest_3571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과향구
추천 : 200/75
조회수 : 25623회
댓글수 : 14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7/08/16 22:53:18
원본글 작성시간 : 2017/08/16 18:19:22

 의열단 김상옥 의사 1890 ~ 1923년


1910년 : YmAca의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국제정세와 신식문물에 대하여 공부.

1912년 : 동대문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고 이후 결혼하여 자식을 낳음.

1917년 : 말총모자를 개발하고 장갑과 양말도 생산, 국산품 장려와 일제 물건을 쓰지말자는 운동을 벌임, 이후 사업의 성공으로 50여명의 종업원을 고용하는 사장이 된 벤처사업가가 됨.

1919년 : 3.1운동 도중 해산하는 여학생을 칼로 찌르려는 일본 기마경찰을 본인의 힘으로 때려눕히고 칼을 빼앗음. 그 검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

1919년 4월 : 윤익중, 신화수 와 같은 청년 학생들과 혁신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3.1운동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혁신 공부라는 지하 신문을 제작하고 배포 하였으나 일제에게 붙잡혀 40일 동안 고문을 받고 풀려남.


1920년 4월 : 한훈, 유장렬 등과 함꼐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모 쇠 수명을 총살, 또한 오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

1920년 8월 :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 한다고 하자, 그해 5월 총독 사이토 및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했지만 거사 하루 전 발각되어 추적을 피해 은신 10월에 상하이로 망명.

1920년 11월 : 임시정부 요인인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이동휘, 김원봉 등과 교류하고
일제 관공서 파괴와 인물 암살의 계획을 세우며 의열단에 입단하게 됨.

1922년 : 사이토 총독 처단을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기로 마음먹고 마지막말을 남김.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이후 용산구 후암동쪽 매부의 집에 숨어서 거사를 계획,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쓰러뜨리는 것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시도하지 못함.

1923년 1월 12일 : 밤 종로 경찰서 서쪽 창문으로 폭탄을 던졌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고 기자 등 5명이 부상.

1월 13일 ~ 18일 : 은신처가 발각, 종로 경찰서는 우메다, 이마세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경찰을 보내어 은신처를 포위


포위된 상황에서 총격전을 벌여서 김상옥 의사는 종로 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를 사살 하고 이마세, 우메다 경부 등 수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혈혈단신으로 남산으로 유유히 피신 이후 왕십리 안장사 까지 은신

1월 22일 : 동지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강원도로가 피신하려 했으나 

은신한 집을 4개 경찰서에서 400여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네 겹을 포위 하였다. 붙잡힌 동료의 자백에 발각.

의사는 다시 싸울 준비를 함. 30분 정도 기다린 경찰은 총격을 개시하 였고 김상옥 의사는 은신처에서 총격전을 벌임. 

구리다 경부를 사살. 


이후 벽장 담을 뚫고 김상옥 의사는 지붕으로 올라가서 일경 2명은 총알로 명중 이후 쌍권총을 들고 포위된 


400여명의 경찰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임.



무려 3시간 동안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총격전이 벌어짐. 

김상옥 의사는 15명을 쓰러트리고 변소에 은신, 그에게는 3발의 탄환이 남아있었고 온몸에 총탄이 박혀있었다고 함. 

이후 권총으로 자결. 그의 나이 34살.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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