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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바탕 휩쓸고 난 후에
게시물ID : bestofbest_3746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유토쨔응
추천 : 198
조회수 : 21211회
댓글수 : 33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7/11/13 19:10:30
원본글 작성시간 : 2017/11/13 12: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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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녀가 떠났다. 바로 어제. 곧 600일을 앞두고.
200일 기념으로 맞췄던 낡은 은반지를 바꿔주리라
돈을 모으고 있던 차였다. 손에서 빼낸 반지에 새겨진 
수많은 기스 자국은 우리가 만난 시간의 흔적 같았다.
 그녀는 남자와 술을 마셨다. 물론 나 몰래였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며 카페에서 잠든 그녀의 핸드폰을
보다가 실수로 누른 통화목록에는 남자 번호가 있었다.
새벽 4시, 아침 10시. 번호 옆에 있는 작은 화살표가
발신 표시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추궁하는 내 앞에서 그녀는 파들파들 떨었다.
울고불고 미안하다고 붙잡길 바랬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길바닥에 진득한 구토를 했다.

 취업 준비생이었던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서로 바빴다. 힘들었다. 한때는 떨어지고 싶지 않아 
부모님 몰래 동거까지 했던 사이였다. 
 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공무원 준비를 시작했다.
미래를 약속했다.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 가정을 차리자는.
그녀는 나를 믿는다고 했고, 나도 그랬다.
 그녀는 한번의 긴 연애 후에 나를 만났고, 나는 몇 번의
짧은 연애 끝에 그녀를 만났다. 서로 익숙지않은 연애였다.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달랐고, 그녀는 그게 새롭다고 했다.
집 앞에 찾아간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술자리의 그 남자와 
키스를 했노라고. 그리고 그게 또 새로웠노라고. 

 눈 앞이 새하얘졌다. 손 발이 놀랄만큼 차가워졌다.
심장이 터져서 온 몸의 피가 새어나와 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흐른 것은 피가 아니라 식은 땀이었다. 짓눌리는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숨이 멎었으면 간절히 바랐다.

 남자에게 이별은 갑작스럽고, 여자에게 이별은 서서히 
찾아온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그녀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게서는 미래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득 든 생각이
아니라, 오래도록 쌓여온 생각이었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 남자가 허리를 감았을 때 거절하지 않았고,
그가 입을 맞췄을 때 그녀도 그 남자의 몸을 감쌌다고 했다.

 헤어지고 싶어.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집으로 오는 길, 제일 느낀 후회감은 차를 끌고 오지 말 걸
하는 것이었다. 노란 차선이 자꾸만 자꾸만 흐려졌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들이받아 주길, 끔찍한 상상이 내게만 달콤했다.

 언젠가 외신에서 보도된 뉴스의 자료사진을 보았다.
이름도 생소한 나라에 지진이 났다고 했다. 
쓰나미가 덮쳐서 집도 병원도 모두 쓸려갔다고 했다. 
무너진 집 앞에 선 아이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이별은 내게 그렇게 왔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사랑이 한바탕 휩쓸고 난 후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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