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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족 6명을 도끼로 몰살시킨 고재봉 사건
게시물ID : bestofbest_3751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99콘
추천 : 208
조회수 : 30330회
댓글수 : 24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7/11/15 23:41:18
원본글 작성시간 : 2017/11/15 19: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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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실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잔인한 내용을 싫어하시는 분들께서는 읽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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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사건은 고재봉 사건입니다.
당시 피해자들은 새벽에 영문도 모른채 도끼로 도륙되어 일가족 6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고재봉은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합니다.
사건이 발생(1963년 10월 19일) 하기 8개월 전 고재봉은 국군 3군단의 야전포병단에서 
부대장이었던 박모 중령의 당번병으로 복무중이었습니다.
당시 박 중령과 그의 가족에 관련된 잡다한 일을 부대와 관사를 오가며 처리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서재를 정리하라는 지시를 받고 서재를 정리하고 나오다
고재봉은 박 중령의 집에서 고기 한덩이를 훔치게 됩니다.
훔친 고기를 신문지에 싸서 나오던 중 박 중령의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던 식모와 마주치게 되는데
물건을 훔쳐가는 것을 눈치챈 식모가 고재봉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우연히도 그때 고재봉의 옆에 도끼가 놓여있었는데 그는 그 도끼로 소리를 지르던 식모를 식모를
조용히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하고 관사를 빠져나갑니다.
당시 박 중령이 머무르던 관사에서 도난사건이 자주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고재봉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 쓰게되고
절도와 살인미수로 육군교도소에서 7개월을 복역하게 됩니다...
(부대장의 괘씸죄가 추가 되어 더 큰 처벌을 내리지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재봉은 육군교도소에서 복역중 결혼하려던 여인마져 떠나가 버리는 불운을 겪습니다.
그는 자신이 불행하게된 모든 원인이 박 중령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석방되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박중령을 꼭 찾아가 그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의 복수심은 석방 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매일 드나들던 관사는 그리 멀지않으니까요
복수를 하리라 마음먹은 고재봉은 인근 민가에서 식칼과 도끼를 훔칩니다.
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경 허리춤에 식칼을 차고 한손에는 도끼를 한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새벽 2시경 박 중령이 살고있는 관사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는 박중령의 집으로 들어가 관사에서 잠들어 있던 부부를 포함 일가족 6명을
도끼와 식칼로 무자비하게 도륙하는데... 
어이없게도 무자비한 도륙의 결과는 자신의 복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재봉이 그토록 죽이려했던 박 중령과 그의 가족들은 몇달뒤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되어
이사를 가버버린 뒤였고 박 중령이 살던 그 집에는 고재봉과는 일면식도 없는
이득주 중령과 그의 부인인 김재옥씨 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큰아들은 큰집에 있어 화를 피하게 되는데 큰아들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사망합니다.
 
고재봉은 피해자의 집에서 시계와 다이아반지 등의 귀금속을 훔쳐서 달아나고
고재봉은 군인의 신분인지라 군 경 합동 수사본부가 설치되는데
사건발생 일주일 후 
수사본부는 이사건의 진범으로 고재봉으로 지목하고 긴급 지명수배합니다.
 
그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지냈는데 이때 추운 겨울이었던 지라 잘곳이 마땅치않았던 그는 
땅굴을 파 잠을 자고 근처 인가에서 밥을 훔쳐먹는 생활을 17일 동안 생활했다고 합니다.
 
사건 발생 후 25일 11월 12일 그는 서울 청계천에서 발견되는데
그를 알아본 두 상인 추적과 신고로 저녁 6시경 체포 됩니다.
 
검거된 고재봉은 11월 19일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합니다.
이때 고재봉은 항소도 포기한채 교도소에서 기독교에 귀의해 전도에 힘을 쏟았는데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동료 재소자들을 전도하는데 앞장섰다고 합니다.
후일담으로 그가 수감되어 있던 교도소의 재소자 2천명 중 그가 전도한 수감자들의 숫자가 무려 1800명 이라고합니다.
 
사형판결 4개월 뒤 그는 총살형을 당하는데 사형당일 자신이 미쳐 전도하지 못한 나머지 200명의 전도를
동료재소자에게 부탁한다고 말한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사형장에서도 고재봉은 자신에게 총을 쏘러 온 9명의 군인들에게는 축복의 기도를 
사형대에서는 찬송가 부르던 중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했던 박 중령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건 이후 마음고생을 많이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군을 예편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미처 하지 못한 나머지 200명의 전도를 부탁하고
총구가 눈앞까지 닥친 죽음 앞에서도 찬송가를 부르며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형당일 동료 수감자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러가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 은혜가 되는 감동적인 장면일수 있지만
어떻게?
왜? 
누가 그를 용서 했을까요?
묘하게도 영화 "밀양" 의 장면이 겹치는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려고 찾아가는 장면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너님의 용서 따위는....
자신의 죄를 셀프용서했다는 장면과 묘하게 겹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열성적인 전도와 종교활동이 자기합리화와 궤변이라는 생각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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