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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하고 또 강간하고…1947 인도와 파키스탄의 지옥열차
게시물ID : bestofbest_3817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가입:2015-01-12 방문:754)
추천 : 151
조회수 : 58156회
댓글수 : 17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7/12/18 01:00:27
원본글 작성시간 : 2017/12/17 13: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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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델리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24시간 전, 파키스탄은 카라치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분리 독립, 분단 건국이었다. 그러나 델리에도 카라치에도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는 없었다. 그는 콜카타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당시 벵골에서 자행되고 있던 힌두와 이슬람교도 간 폭력과 학살을 멈추라며 절절하게 호소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만 갈라졌던 것이 아니다. 벵골도 동/서로 찢어졌다. 서벵골은 인도가 되었고, 동벵골은 파키스탄이 되었다. 그래서 신생 국가 파키스탄의 모양새는 기형적인 것이었다. 


인도 아대륙의 서북에는 서파키스탄이 들어섰고, 동북에는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이 세워졌다. 한 나라라고 했건만 서로 1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적성국이 된 인도를 통해서는 왕래도 할 수 없었다. 서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동파키스탄의 치타공까지 배편을 이용하면 꼬박 닷새가 걸렸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잘못된 장소에서 독립을 맞이했다. 인도의 깃발 한복판에는 법륜(法輪)이 있다. 업보와 윤회의 상징을 국기에 새겨 넣은 것이다. 파키스탄의 국기는 녹색 바탕에 초승달이 그려졌다. 이슬람 국가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는 여전히 힌두교들이 있었다. 인도에도 적지 않은 이슬람교도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독립이 곧 해방을 뜻하지 않았다. 숨죽인 채 낯선 국가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국경 마을'에서는 양국의 깃발이 번갈아 게양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두 번의 독립 행사에 모두 참여했다. 델리와 카라치에서는 폭죽이 터졌지만, 더 많은 곳에서는 약탈과 방화와 학살이 일어났다. 환호보다는 비명이 더 자주, 더 크게 들렸다. 특히 펀자브가 그랬다. 8월과 9월, 60일 사이에 60만 명이 죽었다. 


펀자브에서 자행된 힌두, 이슬람교도, 시크 간 삼파전은 유난히 치열하고 격렬했다. 우연하고 우발적인 범죄보다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인종 학살에 가까웠다. 유럽의 홀로코스트와 아시아의 킬링필드가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흥건한 핏물이 다섯 개의 강을 붉게 적셨다.


죽음의 기차 


결국, 10월 14일, 양국 정부는 동/서 펀자브의 '소수자'들을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건국 이전보다 이후에 더 많은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웃 마을이었던 곳이 돌아갈 수 없는 타국이 되었다.


펀자브에서만 약 1000만 명이 이동했다. 동펀자브에서 서펀자브로 이주한 인구는 435만, 서펀자브에서 동펀자브로 이주한 인구는 429만을 헤아린다. 인도/파키스탄 전체로는 1500만 명이 이동했다. 20세기를 통틀어 최단 기간 내 최다 인구의 교환이었을 것이다. 1951년 통계로 파키스탄 인구의 10%가 난민이었고, 델리 인구의 3분의 1이 난민이었다. 인도는 한때 수도 이전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펀자브와 가까운 델리가 안보상 취약한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결국 이슬라마바드라는 별도의 행정 수도를 지었다.


방향은 달라도 피난 경로는 겹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기차가 복병이었다. 기차역 곳곳에서 습격과 폭동이 일어났다. 떠나는 자들은 곧 적을 의미했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 기차역에서 보복을 가했다. 그들에게는 남은 이들이 적이었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여성들을 강간했다. 


델리에서 요가 인맥으로 초대받은 한국분의 남편이 펀자브 출신이었다. 그의 할머니가 피난민이었다. 평생을 악몽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 산 채로 불에 타서 죽어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꿈에 나왔다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에도 모성은 질겼다. 두 아이를 데리고 델리로 피신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라호르에서는 집 안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언제 이슬람교도들이 망치와 낫을 들고 와 강간하고 살해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밤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이들을 품에서 재우고 할머니는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한다. 


겨우 기차를 타고 나서도 괴한들이 침입하며 식칼을 들이밀고 힌두 국가를 원하느냐, 이슬람교도 국가를 원하느냐 심문받기도 했다. '호신용'으로 준비해둔 코란을 보여주고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8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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