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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의 순기능! -할아버지를 스토킹하다
게시물ID : boast_113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데포딜
추천 : 10
조회수 : 457회
댓글수 : 58개
등록시간 : 2014/07/26 15:38:08



새벽 5시에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9시에 엄마가 일 나가는 소리 듣자마자 눈이 번쩍 떠짐. 



눈꺼풀은 무척 무거웠지만, 

집에 할아버지를 케어할 사람이 항시 있어야 하고, 엄마가 없는 동안 내가 그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절대 다시 잠이 오진 않았음. 



할 일, 여려운 집안형편, 연애는 사치다 등등.. 이런저런 생각에 방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다가, 

어느덧 점심 무렵이 되었음. 

이번 여름 들어 건강이 확 안좋아지셨던 할아버지가 

오늘따라 모자를 쓰시는 모습이 내 방문 밖으로 보였음. 그리곤 이내 현관쪽에서 부시럭부시럭하는 소리가 들렸음 



현관으로 나가 할아버지에게 여쭈었음 

"할아버지, 산책 나가시려구요?"

"응, 한바꾸 돌고 오려구." 



연세는 아흔이 다 되가시지만, 정정하셨던 할아버지가 

올해 들어 정신이 없으시고, 했던 말도 자꾸 반복하시고.. 

기운도 없으시고.. 가끔씩은 가족 얼굴, 이름도 잊으시고 ㅠㅠ 

설상가상으로 한 달 반 전에 한 번 체하셨다가, 음식을 못 잡수셔서 굉장히 마르시고.. 

걸어다니기 힘든 지경까지 오셨었음.. 그런 할아버지가 요새들어 기운을 조금은 차리신 것 같아 무척 기뻤음. 




하지만, 며칠 전, 잠깐 잠든 틈에 할아버지가 사라지셔서 찾아다니다가 

공원에서 발견했는데 '누가 온다고 해서 마중 나와있었다' 란 말씀을 하셨지만 

정작 확인해보니 집으로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전화조차 없었다는.. 

그 아찔한 할아버지의 전과(?)가 생각나서 

무척 갈등하였음. 





내가 할아버지와 같이 동행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정신 없으신 와중에도 자존심이 무척 세신데, 분명히 손주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좋아하진 않으실게 분명했음.. 

그렇다고 내게 '산책을 하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자유의지를 막을 만한 권한이 있을 것 같아보이지 않았음.. 

또한, 막고 싶지 않았음.. 

엄청난 딜레마였지만, 잠시 고민을 한 후,

할아버지 방에 있던 휴대폰을 챙겨드리고, 신분증도 챙겨드리고.. 

그리고 조심히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드렸음.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신 후, 

나도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할아버지를 

미행하기 시작함.. 




할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나가셔서 골목길을 쭈욱~ 걸으셨음. 

나는 20m 뒤에서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신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할아버지 본인은 모르는 할아버지만의 수호천사라도 된 듯한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며, 

조심스레 할아버지의 뒤를 밟았음. 




5분 정도 걸었을까, 할아버지가 갑자기 확 돌아서 오던 길을 되돌아 오셨음. 

들키지 않게 작은 트럭 뒤에 몸을 숨기고 할아버지를 가끔 힐끗힐끗 쳐다보았음.  

할아버지는 한 분식집 앞 의자에 앉으셨음.. 




그리고 30분 쯤 지났을까, 

그 자리에 계속 계속 앉아계시는 것임! 사실 조금 멀리서 지켜보아서, 할아버지가 분식집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음... 

'혹시 모르는 분식집에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앉아계신 걸까' '혹시 분식집 장사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싶어,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계속 계시길 바라며 

집으로 얼른 뛰어가서 

5천원을 손에 쥐고 다시 뛰어나왔음. 

그리고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그 분식집으로 가서 

소시지를 하나 사서 할아버지 옆에 앉았음.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아무 일 없이 그냥 앉아계셨던 게 아니라, 

핫도그 하나를 손에 쥐고 야금야금 드시고 계셨음. 

아주머니께 "할아버지 혹시 계산 하셨나요?"라고 여쭤보자, 

그렇다고 대답하셨음.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의 한숨이 펴져 나왔음.. 




그 순간 할아버지 옆에 세워져있던 지팡이가 쓰러져, 내가 다시 세워드렸음. 

그러자 할아버지가 "고맙습니다, 제가 할테니  냅두셔도 되유" 라고 하시길래... ㅠㅠㅠ 

"할아버지, 저예요 할아버지 손녀딸" 이라고 알려드렸음 ㅠㅠ 

그제야 "어, 가만보니 너로구나" 하고 날 알아보시더니 활짝 웃으셨음. 





가만히 나와 할아버지를 지켜보시던 분식집 아주머니가, 

친 손녀딸이냐며, 아깐 모르는 할아버지 핫도그를 계산하려는 줄 알았다며 웃으셨음. 

그리고, 아주머니와 대화가 시작되었음 ! 





알고보니, 이 분식집은 할아버지의 단골 분식집이었음.. 

이전엔 거의 매일매일 오셔서 뭔가 하나씩 잡수셨다 함. 

연세가 있으신지라 할아버지가 식사량이 굉장히 적으신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핫도그를 항상 반 개만 드시곤, 배부르시다며 "이건 우리 손자녀석 줄거유" 하시곤 

항상 남은 반을 집으로 싸가셨다는 것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일매일.. ㅎㅎ 

할아버지의 손자 생각에 뭔가 뭉클.. 정말 뭉클했음.. 






또, 아주머니께선 할아버지의 다른 가족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라 하셨음. 

그래서, 나는 큰 손녀딸이고, 위의 할아버지가 말한 손자는 지금 군입대를 한 지 두 달 정도 되었고, 

집 근처 군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는 소식까지도 알려드렸음.. ㅋㅋㅋㅋ 

이 와중에 할아버지는  손녀둘, 손자 하나가 있는데 정말 예쁘다며 

아주머니께 자랑을 하셨음.. ㅎㅎ 





문득 생각이 나는게, 그동안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집을 비웠던 동안,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을 돌볼 수 없었음.. 아니,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는 생활(=알바라이프.....)이었음..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어찌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원을 한 학기 다니다가 남동생이 입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원을 포기하고 그냥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왔음.. 




왜냐면, 아버지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그 후에 여동생도 대학을 서울로 와서 나랑 같이 사는데.. 

남동생이 입대하면 고향엔 할아버지와 엄마만 계시기 때문..! 

할아버지도 할아버지대로 불편하시고, 엄마도 엄마대로 힘드실 게 정말 뻔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하고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서 

여동생과 나 둘 다  

바로 고향으로 내려왔었음. 






사실 포기한 것이 많은지라, 나름대로 이런 저런 속상한 생각이 들곤 하는데, 

그 와중에 정말 힘이 되는 것이 가족임.. ㅎㅎ   





할아버지가 며느리, 손주들을 무척 챙겨주신다는 사실, 

치매기..가 있으신 와중에도 인품에 흐트러짐 없이 맑게 웃으시는 모습,.. 

이런 사실 하나 하나가 내겐 정말 큰 기쁨이자 힘임.. 

그리고 현재 내 삶의 원동력이자 목표임. 






비록 할아버지가 나이를 많이 드셨다는 사실과,

하루하루 줄어드는 할아버지의 실루엣이 나를 울리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할아버지 남은 여생 동안, 본인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시도록 곁에서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뿐임.. 

이 와중에 할아버지의 단골 분식집을 알게 되고, 

할아버지와 핫도그, 소시지를 먹으며 나름의 추억을 하나 만들어서 정말 기쁨!!! 






이게 다 스토킹 덕분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스토킹의 순기능이에요!! 





어쨋거나 마무리를 짓자면, 오늘도 할아버지는 손주 먹으라고 핫도그 반을 집으로 싸오셨음 ㅋㅋㅋㅋㅋ 

글 다 쓰고 내가 먹을거에요 ㅎㅎㅎ






나름의 미행(?) 성공기에,

할아버지 덕후손녀로서 할아버지의 단골 분식집과 음식 취향(핫도그)을 늦게나마 하나 더 알게 되었다는 기쁨에 

그리고, 할아버지의 손자손녀 생각에 마음이 정말 기뻐서 자랑글을 적어보았어요.. ^ㅡ^ 

편의상 쓴 음슴체가 혹시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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