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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 아들로 산다는 것
게시물ID : cook_1294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예뛰남
추천 : 22
조회수 : 1334회
댓글수 : 93개
등록시간 : 2014/12/17 19:23:22
밤11시 20분 나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치킨집에 있다. 12시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듯 진열대에 놓인 닭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 젊은 커플이 들어온다. 개인적으론 후라이드라고 편하게 부르고 싶지만 오리지날 크리스피라고 이름 지어진 메뉴를 선택한다.
8500원을 금고에 넣고 닭을 튀겨준다. 이런 속도라면 닭은 아직 마감까진 여유가 있다.
이때 전화가 걸려온다. BBQ가 아니냐고 물어본다. BBQ를 찾아봐야 소용없다 우리 동네 BBQ는 망했고 BBQ사장님은 우리 집 단골이 된지 오래다.
이 사실을 방금 잘못 건 전화 넘어로 들은 사람은 우리 가게 치킨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배달을 해달란다. 문제 없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라이더 아버지가 항시 대기 중이시다.
모든 주문을 받고 이제 슬슬 정리를 시작한다. 먼저 밀가루로 뒤덮힌 싱크대를 닦기 시작한다.
하루동안 쌓인 밀가루를 벗어낸 싱크대는 여름날 해운대에서 오일을 바른 여인 처럼 그 표면이 반짝 거리기 시작한다.
이 때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듯한 중년 남성이 들어와 크리스피 오리지날 2마리를 주문한다.
젠장.. 한마리 반밖에 안남았는데..
반마리를 다시 튀기면 지금 이렇게 빛나고 있는 싱크대는 다시 밀가루로 뒤덮히겠지..
그렇게 둘 순 없지..
이 손님에게 조각을 작게 내어 먹기 편하고 현미 가루를 입힌 바삭하고 고소한 현미 크리스피를 추천한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 인듯한 남성에게서 새로운 것을 시도 할 법한 도전 정신을 기대한 난 아직 하수다.
결국 새로 튀겨야 한다. 싱크대와 내 마음은 표효하며 하얗게 불타겠지.
한 번에 여러마리를 튀길 수 있다. 낮 시간에는 그렇게 한다. 하지만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에 여러마리를 튀겨놓고 다 팔지 못하면 낭패다.
팔지 못한 닭은 다음날 결국 그 특유의 고소함과 바삭함을 잃은채 낮 손님에게 팔리게 마련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를 절반이나 읽은 나에게 이런 비 양심적인 경영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요한 만큼만 튀긴다!
그렇게 중년의 남성을 따듯한 집으로 이제 막 튀겨진 따듯한 치킨과 함께 보낸다.

지금 시간 11시 50분.. 이제 정말 마감이다.. 이때. 딸 내미의 성화에 못이겨 치킨을 사러온 아줌마가 들어온다. 동시에 전화가 온다. 젠장.
큰일이다. 이제 남은건 뼈가 없어서 먹기 편하고 현미를 입혀 고소하고 바삭한 현미 순살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줌마가 딸내미가 좋아 한다며 닭강정을 시킨다.
역시 닭강정은 순살이 아니 겠냐며 아주머니에게 순살을 권하고 그녀는 흔쾌히 받아 들인다. 딸내미는 뭐든 잘먹으니까 상관없다는 말투다.
전화 주문을 받는다. 젠장 순살이다.. 남은 순살은 정량에서 약 100g 정도가 모자라다.
난 '정의란 무엇인가'를 절반이나 읽었다.
100그램 때문에 다시 새로 튀기기 시작한다. 딱 100그램만 튀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손님이 온다.
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나를 시험한다. 순살을 달란다. 젠장!!!
다시 튀긴다 딱 나갈 만큼만.  
손님들은 가족들과 함께 께끗하고 양심적인 주방에서 조리한 맛있는 치킨을 먹을 생각에 한껏 들떠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다. 이 시간이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순간이다.
맛있는 치킨을 제공 할 수 있다면 양심과 청결은 포기 할 수 없다.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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