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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가 된 맹꽁치 샌드위치를 보고 생각난 글.
게시물ID : cook_1524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수렵의헌터
추천 : 1
조회수 : 84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5/26 17:04:36
어렸을 적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정어리 통조림과 식빵을 먹는 장면인데요.

아래에 초록색으로 표시된 부분입니당. 저는 어린마음에 나름 맛있겠다 생각했는데... ㅎㅎ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추스렸다.

가는 도중 아싸 가에서 튀니지 사람이 하는 잡화상을 보았다. 문이 아직 열려 있었다.

기름에 절인 정어리 통조림 하나,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 한 덩이, 배 하나, 포도주 한 병과 아랍 식빵을 하나 샀다.

호텔 방은 플랑슈 가에 있는 그의 방보다도 작았다. 한쪽 면이 출입문보다 약간 더 길었다. 기껏해야 3 미터밖에 안 될 것 같았다.

벽들은 서로 직각을 이루며 맞물려 있지도 않았고 문쪽에서 보자면,폭이 2 미터쯤 되어 보이는 곳까지 비스듬히 벌어지다가, 갑자기 좁아지면서 방의 전면에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며 서로 붙어 있었다.

방의 모양새가 말하자면 관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관보다 훨씬 더 넓지도 않았다.

긴 벽 쪽에 침대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세면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안에서 밖으로 돌리며 끄집어낼 수 있게 만들어진 뒷물 대야가 하나 있었고,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세면대의 오른쪽 위로는 천정 바로 밑으로 창문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것은 창문이라기보다는 두 가닥의 끈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든 유리가 끼워진 작은 채광구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습하고 후끈한 미풍이 밖에서 나는 잡다한 소음을 그 구멍을 통해 관 속으로 실어날랐다.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 화장실에서 물을 트는 소리, 스페인 어와 포르투칼 어의 토막 단어들, 약간의 웃음소리, 어린애가 훌쩍거리는 소리 그리고 가끔은 아주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

조나단은 속옷 바람으로 침대가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을 먹었다. 의자를 끌어다가 그 위에 가방을 얹은 다음, 사온 물건 봉지를 펼쳐놓아 식탁 대용으로 썼다.

쬐끄만 정어리를 주머니칼로 가로로 잘라 반쪽을 찍어 빵조각에 얹어서 한 입에 먹었다.

물컹물컹하고 기름에 절은 생선 살이 싱거운 빵과 함께 뒤섞이며 기막히게 맛 좋은 덩어리가 되었다.


레몬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맛이 더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한 입 먹고 나서 포도주를 병째로 들어 조금 마신 후 그것을 이 사이로 지긋이 물면서 잠깐 물고 있으면 생선의 진한 뒷맛이 포도주의 약간 신 듯한 향료와 어우러지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맛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조나단은 식사를 하고 있는 그 순간보다 더 맛있게 음식을 먹어 보았던 적이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을 것 같았다.

통조림 통에 정어리가 네 개 들어 있었으므로 그런 맛을 여덟 번 맛볼 수 있었다.

빵과 함께 그것을 온 신경을 집중하여 씹어먹었고, 포도주도 여덟 번 마셨다.

그는 아주 천천히 먹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배가 많이 고플 때 음식을 빨리 먹으면 몸에 좋지 않고 소화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읽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먹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식사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어리를 다 먹고, 깡통에 남아 있던 기름도 빵으로 훑어서 다 먹은 다음 치즈와 배를 먹었다. 배는 어찌나 수분이 많던지 껍질을 깍다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그리고 치즈는 빈틈없이 단단히 뭉쳐져 있어서 칼날에 자꾸만 늘어붙었고, 맛이 어찌나 시면서 쓰던지 잇몸이 순간적으로 아찔했으며, 잠깐 동안 침샘이 말라버려 입이 건조해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달콤하고 물이 많은 배를 한 조각 먹으면 다시 괜찮아지면서 이와 입천정에서 떨어져 서로 엉키다가 혀를 타고 목 속으로 쏙 들어가곤 하였다.

다시 치즈 한 입 먹고, 한 번 살짝 놀라고, 또 다시 그것을 부드럽게 섞어주는 배를 한 조각 먹고, 치즈 먹고, 또 배 를 먹고.

맛이 너무나 좋아서 그는 치즈를 쌌던 종이를 칼로 박박 긁었고, 조금 전에 칼로 썰어냈던 배의 가운데 부분도 갉아먹었다.

한동안 몽롱하게 앉아 혓바닥으로 이를 훑다가 마지막 남은 빵 조각과 포도주를 삼켰다.

그런 다음 빈 깡통과 배 껍질과 치즈를 쌌던 종이를 빵 부스러기와 함께 돌돌 말아서 봉지에 넣어 치웠고, 쓰레기 봉지와 빈 병을 문가에 세워둔 다음, 가방을 의자에서 내려놓고, 의자를 도로 제자리에 갖다놓은 후, 손을 닦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담요를 발치까지 밀어놓고, 홑이불만 덮었다. 그리고는 불을 껐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위쪽 천장 근처의 구멍에서조차 한 줄기 가느다란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물기 찬 미풍과 멀리, 아주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만이 그 사이로 들어올 뿐이었다.

몹시 후덥지근했다.

"내일 자살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출처 비둘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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