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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5
게시물ID : databox_732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InHere
추천 : 0
조회수 : 10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10/19 15:18:52

"2015"


넓은 백양관 대강당에 자는 사람이 반, 강의를 듣는 사람이 반.
백발의 교수님은 느리지만 차분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나는 여러분 나이 때 삼수를 했습니다.'

옆 사람이 움찔하면서 잠에서 깼어요. 삼수?
여기저기서 뜨이는 눈들을 보신건지, 교수님의 눈가에 살짝 웃음이 감돌았어요.

'이 연세대학교에 들어오려고 삼수를 했어요, 내가. 삼수.'

그래. 네가 들은 게 맞다, 라는 듯 교수님은 몇몇의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교수님은 삼수생이셨어요. 연대생이 되고 싶어 삼수를 하셨대요. 현역, 그리고 재수 생활 때 닿을 듯이 닿지 않은 연대가 가고 싶어 삼수를 하셨대요.

'많이 늦었지. 많이 늦었어요. 대학교도 늦게 왔으니, 군대도 늦게 갔고.'

어디든 따라다니던 '삼수'의 꼬리표가 교수님은 그렇게 힘드셨대요. 대학교 동기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형은 왜 이렇게 나이가 많아요?' 군대에서 만난 나이 어린 선임들은 '너는 뭐하다가 이제야 왔냐?'

삼수를 했다. 그래 내가 대학교 한 번에 못 들어가서 조금 늦었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교수님께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때마다 교수님은 같은 대답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게 힘드셨대요.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게. 내가 괜스레 주눅드는 게. 많이 초조하셨대요. 나의 친구들은 이미 나보다 2년이 앞서있어서. 나는 2년 전에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교수님께는 꿈이 있었어요. 힘들었던 재수 생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삼수 생활을 이 악물고 버티게 해준 꿈.

어렵게 어렵게 삼수를 해가며 들어온 이 대학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걸고 강단에 서는 것. 본인이 그렇게 사랑하는 이 학교의 학생들, 자신의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그게 교수님의 목표였고 꿈이었어요.

길고 힘든 과정이었다..고 얘기하셨어요. 군대, 학부 졸업, 대학원 진학.. 언덕을 하나 넘으면 다음에는 산.

주변에서는 '저 나이가 되도록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라는 말을 듣기 일수였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가' 라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조교를 하던 때에는 목표를 공유하던 어린 동료들의 조롱까지.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조교해요?' 나이 차도 별로 안 났는데.
'솔직히 교수하기엔 좀 늦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몇 년 늦었을 뿐인데.

쓰라린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으셨던 건지.
쓴웃음을 지으며 교수님은 잠시 말을 멈추셨죠.
이내 알 수 없는 미소에, 눈을 빛내며 입을 떼시던 교수님.

'근데 지금, 그 친구들 중에 교수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침묵이 맴돌았죠. 그리고 교수님의 입가에 돌던 옅은 미소.

'나 하나에요, 나 하나.'

'내 자랑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늦은 건 없습니다."

우리만큼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없을 거에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며 살아왔잖아요. 옆집 철수가 국어에서 100점을 맞아오면 나는 수학에서라도 100점을 맞아야 했고, 이웃집 영희가 미국 유학을 갔다 오더니 how are you?를 원어민처럼 한다면 나도 암 파인 땡큐 앤쥬?는 좀 굴려야 했죠.

고등학교 때는 특목고다 뭐다, 과학고다 뭐다. 초등학교 동창이 유명한 자사고에 들어가면 어느새 모든 부모님들이 그 소식을 알고 있었고요. 대학 입시는 어땠나요. 나는 재수하는데 친구는 연세대 들어간 게 친구들 사이의 핫뉴스였죠. 우리는 항상 알게 모르게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어요. 남보다 뒤쳐지면 안되니까. 남들보다 늦으면 안되니까.

근데, 그러면 어때요. 남들이 뭐라 한들 어때요. 늦은 건 없어요. 중학교 때 반에서 꼴등하던 친구가 유학 가더니 하버드에 들어갔대요. 고등학교 자퇴한 친구가 어플 하나 만들었더니 대박이 났대요. 남들이 뭐라 한들, 어때요? 나는 나의 길이 있어요. 그게 지금은 남들이 보기에 늦어 보일 수도 있고, 내가 보기에도 남들보다 뒤쳐져서 불안하고 초조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어요.

거리에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불편하잖아요. 남과 같은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저 눈치 보면서 공부만 하다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갖는 것. 물론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정말 성공한 인생이겠죠. 그 길이 자신의 길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게 우리 모두가 가야만 하는 길인가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쳇바퀴만 돌리는 인생을 살 수는 없잖아요. 지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나의 길을 묵묵히 찾아봐요. 모르겠으면 일단 한 길로 걸어봐요. 재수 삼수 사수 n수 하면 어때요. 취업 좀 늦게 하면 어때요. 아니, 아예 취업 때려 치고 다른 길을 찾아 좀 헤매면 어때요. '옳은 길'은 오직 나만 아는 거에요. 결국 그 모든 게 나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인 거고, 나는 내 인생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거에요. 누가 알아요? 나중에 자서전에 이렇게 한 문장을 넣을 수도 있겠죠.
'김연돌, 그는 대학은 네 번이나 떨어졌지만 인생은 한번에 합격했다.'

'늦은 건 없습니다.'
교수님의 그 말이 요즘 들어 자꾸 생각나곤 해요. 소위 말하는 '늦는 길'을 제가 지금 걷고 있거든요. 그래서 불안해요. 그리고 초조해요. 하지만 다시 그 행보를 이어가고자 해요. 저는,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요.

늦은 건 없어요. 20대 밖에 안된 우리에게 대체 뭐가 그리 늦은 일이고 늦는 길이겠어요. 천천히 가는 길은 있어도 늦은 도착은 없는 거니까요. 남들보다 조금 천천히, 경치를 둘러보며 세상을 좀 더 알아가며 걸어갈 뿐인 거니까요.

삶에 조금의 풍파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저 다들 자신의 속도에 맞춰 기나긴 길을 걷고 있는 거겠죠.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천천히.

어느덧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2015년도 벌써 열 달이 흘러갔고요. 수능을 준비 중인 고3과 n수생들, 중간고사를 갓 마치고 푹 쉬고 있을 대학생들, 그리고 예비 직장인이 되기 위해 힘쓰고 있는 많은 분들까지. 저마다 나에게는 가장 높아 보이는 삶의 언덕을 하나씩 넘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의 삶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오르막길이 있을 거에요. 오르고 올라도, 넘고 넘어도 계속되는 언덕과 오르막길. 다치기도 하고 많이 넘어지기도 할거에요. 그게 부끄러워 주저앉고 싶을 수도 있어요. 나보다 빨리 정상에 오른 저 친구들을 보며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결국에 당신은 당신만이 갈 수 있는 정상에 도달할 거에요. 물론 힘든 여정이 될 거에요. 지금도 이미 많이 힘들겠죠. 하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래서 이제는 다 놓아 버리고 싶을 때. 그 날의 백양관 대강당에서 나지막이 울려 퍼졌던 교수님의 한 마디를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늦지 않았어요.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꿈을 찾아 가는 당신은 그 누구보다 빛나는 길을 걸을 거에요.

'늦은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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