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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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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풋볼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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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4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23 13:03:53
바비 롭슨

위키백과링크












풀럼 FC
풀럼
 강등
 해임
그는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입스위치 타운 FC
입스위치 타운
13년

풋볼리그1부 4위
2번의 리그 준우승
유럽대회를 이끌고
14명의 선수만 영입. 유스시스템을 거쳐 올라온 선수만 활용


구단주가 10년 재계약을 했으나 롭슨이 거절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 코치로 일함

이후 감독이 됨

약팀에 속한 입스위치를 준우승으로 이끈 공으로 감독이 되었다.



                   
1986년 피파월드컵에서  조별예선에서 2위경쟁을한 폴란드를 꺾음

폴란드 0:3 영국






16강에서

파라과이도 꺾음         파라과이 0: 3 영국






8강에서 아르헨티나와 만남

전쟁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분위기가 매우 안좋았고

경찰이 많이 배치되었음





근데 여기서 마라도나의 신의손이 작렬

아르헨티나 2:1 영국으로 영국탈락

아르헨티나는 계속 올라가면서 결국 우승을 차지하게 됨




1990년 피파 월드컵

준결승에서 서독(너무 강한 강적)을 만나 패배

서독은 결승에 올라가고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함






롭슨은 감독직에 물러나고 언론에게 많은 질타를 받았기에

잉글랜드가 아닌 네덜란드로 가게 되었음. 








PSV 아인트호벤

psv 아이트호벤에 감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고

스포르팅 리스본

무링요는 1992년 스포르팅 통역관을 맡으면서 바비 롭슨을 보좌하게 됐다. 롭슨은 1996년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동한 무링요에게 통역관, 전력 분석, 때로는 코치 업무까지 맡겼다. 클럽 내부 깊숙한 일까지 담당하게 된 무링요는 선수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1992년 7월 스포르팅 CP의 감독으로 부임했다.(당시 통역은 조제 모리뉴가 맡았다.) 롭슨은 그의 첫 번째 해에 3위를 했다. 팀의 구단주는 롭슨의 동의도 없이 선수를 영입했고, 롭슨은 팀의 상태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결국 1993년 12월 팀을 리그 상위권에 올려놓고 해임되었다. 


FC 포르투




스포르팅의 라이벌 FC 포르투는 재빨리 롭슨을 감독자리에 앉혔다. 당시 FC 포르투는 평균 관중 수가 1만명 가까이로 추락한 상태였다. 롭슨의 포르투는 포르투갈 컵에서 그의 전 팀 스포르팅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고, 

1994-95시즌과 1995-96시즌 우승을 차지했다.[8]


한 경기에서 패배한 뒤 어린 팬이 전술에대한 비판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전술을 편지로 썼는데

롭슨은 좀더 자세히 편지를 쓸 것을 요구했고 팬은 데이터와 자료을 통해 더 자세히 편지를 썼다.

이 17세 밖에 안된 어린팬의 박식함에 반한 롭슨은 그에게 유소년 코치직을 제안하는데

그는 바로 2010년 포르투를 무패우승시킨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였다.


FC 바르셀로나


호나우두가 곧 전술이다



1996년 여름, FC 바르셀로나는 롭슨을 데려오려 했다. 7월 그가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되자,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요한 크라위프는 회장실에서 의자를 때려부수고 팀을 나왔다. 롭슨은 호나우두를 영입했고, 코파 델 레이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과 UEFA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9] 1996-97시즌 유럽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선수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그는 이해할 수 없게도 경질되고 만다.









PSV 아인트호벤

 1998-99시즌에 다시 PSV로 돌아간 그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빌럼 II 틸뷔르흐에 이어 3위를 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로 팀을 이끌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PSV와 계약이 만료된 그는 잉글랜드 축구협회 기술국의 자리에 앉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가, 뤼트 휠릿이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에서 사임하자 1999년 9월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999-00시즌에 뉴캐슬은 11위를 차지했다. 2000년 후반에, 케빈 키건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임하자, 축구협회는 뉴캐슬 구단주 프레디 셰퍼드에게 롭슨을 국가대표팀의 보조 코치로 해줄것을 요청했지만 셰퍼드는 거절했다.[10] 2001-02시즌 롭슨은 뉴캐슬을 4위로 이끌었고, 다음해에는 3위를 함과 동시에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얻었다. 2003-04시즌 5위를 해 챔피언스리그에는 나가지 못했으나, UEFA컵에서 준결승전까지 진출했다. 그는 2004년 8월 30일까지 뉴캐슬의 감독으로 있었다. 

2002년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얻었다.

뉴캐슬은 챔스티켓을 따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경질했고

이후 뉴캐슬의 행보가 어떤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2005년 그는 한국 국가대표를 맡고싶다며 자청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가대표들의 열정에 감명깊었던 그는

돈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이는 거의 성사될 뻔 하였다.

그러나 축구협회의 거절로 무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과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였다. 



2003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입스위치의 명예 회장으로 있었다.





후에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고문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성적이 좋지 못했고

건강상의 문제로 2007년 11월 17일 사임했다




그는 18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암과 싸웠다.

삶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암센터를 세웠다.

2009년 7월 31일 바비 롭슨은 고향인 더럼 주에서 사망했다.





보비 롭슨 경 동상. 입스위치 타운의 경기장 앞에 서 있다.


























 
 
 
 
 
 
제니트 비야스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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