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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 실제 이방원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네요.
게시물ID : drama_439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철학
추천 : 4
조회수 : 10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21 23:42:19
오늘 육룡이 나르샤를 보고 나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동안 극중에 나오는 이방원의 심리묘사가 묘하게 생생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그래서 혹시 하는 마음에 실록을 좀 찾아봤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던 날의 기록인데요. (이틀 뒤에 세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약간 어휘가 어려워서 요약까지 하기는 힘듭니다만... 나름 중요하게 보이는 부분들을 표시해 봤습니다.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8월 8일 을유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임금이 세자에게 국보를 주다





임금이 세자에게 국보(國寶)를 주고, 연화방(蓮花坊)의 옛 세자궁(世子宮)으로 이어(移御)498)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내선(內禪)의 거조(擧措)를 행하고자 하여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와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좌부대언(左副代言) 원숙(元肅)·우부대언(右副代言) 성엄(成揜) 등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재위(在位)한 지 지금 이미 18년이다. 비록 덕망(德望)은 없으나, 불의한 일을 행하지는 않았는데, 능히 위로 천의(天意)에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번 수재(水災)·한재(旱災)와 충황(蟲蝗)의 재앙에 이르고, 또 묵은 병이 있어 근래 더욱 심하니, 이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고 한다.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傳位)하는 것은 천하 고금(天下古今)의 떳떳한 일이요, 신하들이 의논하여 간쟁(諫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임신년(壬申年)·무인년(戊寅年)의 일은 모두 경들이 아는 바이다. 무인년의 일은 죽음을 면하고 살려고 한 일이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직(社稷)을 정하는 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되겠는가? 하늘이 실로 정한 것이다. 나의 상(像)과 모양은 임금의 상이 아니다. 위의(威儀)와 동정(動靜)이 모두 임금에 적합하지 않다. 무일(無逸)499) 한 것을 가지고 상고한다면 재위(在位)한 것이 혹은 10년이요, 혹은 20년이었는데, 20년이면 나라를 누린 것이 장구한 임금이다. 나는 나라를 누린 지 오래이다. 그간에 태조(太祖)가 매우 귀여워하던 두 아들을 잃고 상심(傷心)하던 것을 생각하면 비록 내 몸이 영화로운 나라의 임금이 되었지만 어버이를 뵙지 못하고, 혹은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전(殿)에 나아갔다가 들어가 뵙지 못하고 돌아올 때에는 왕위를 헌신짝을 버리듯이 버리고 필마(匹馬)를 타고 관원 하나를 거느리고,혼정신성(昏定晨省)500) 하여 나의 마음을 표(表)하고자 생각하였다. 이에 병술년(丙戌年)에 세자에게 전위하여 하였으나, 백관들이 중지하기를 청하고 모후(母后)의 영혼이 눈물을 흘리면서 꿈에 나타나고, 또 양촌(陽村)501) 이 사연(辭緣)을 갖추어 상서하고, 민씨(閔氏)의 사건이 비로소 일어나서 대간(臺諫)에서 굳이 간(諫)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내가 생각건대, 원민생(元閔生)이 〈중국에서〉 돌아오고 세자가 조현(朝見)한 뒤에 전위(傳位)한다면, 마땅히 두 가지가 온전할 것이다. 그러나 미편(未便)한 것이 있으니, 동전(東殿)502) 의 병이 위독하고, 나의 병이 다시 발작하니, 세자가 어찌 경사(京師)503) 에 입조(入朝)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회안(懷安)의 부자(父子)가 있는 경우이겠는가? 또 양녕(讓寧)이 비록 지극히 친(親)하여 변(變)을 일으킬 의심은 없으나, 어제까지 명분(名分)의 지위에 있다가 이제 이에 폐출(廢黜)되어 외방에 있으니, 어찌 틈을 엿보는 사람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조현(朝見)하는 것을 정지하고 내선(內禪)을 행하고자 한다. 이미 하늘에 고하고 종묘(宗廟)에 고하였으니, 내선(內禪)의 일은 신하들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민생(元閔生)이 중국 경사(京師)에 있을 때 비록 세자(世子)의 조현(朝見)을 말하였으나 명문(明文)이 없고 말뿐이었다.

또한 세상의 사고는 때가 없이 생기고, 또 만기(萬機)의 몸은 가볍게 길을 갈 수가 없다. 황제가 어찌 외국(外國)의 일을 가지고 힐난하겠느냐? 내가 8월 초4일에 병(病)이 났다고 핑계하고 자문(咨文)을 보내어 주문(奏聞)하면, 황제가 반드시 고명(誥命)을 내려 줄 것이니, 지금 판비(辦備)한 금(金)·은(銀)·마필(馬匹)로써 사례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정조(正朝)의 진하사(進賀使)라면 우의정(右議政) 이원(李原)으로 이를 삼고, 원민생이 돌아오거든 사은사(謝恩使)는 마땅히 찬성(贊成) 심온(沈溫)을 차견(差遣)하여야 할 것이다. 전위(傳位)한 뒤에도 내가 마땅히 노상(老相)504) 들과 임금을 보익(輔翼)하고 일을 살필 것이다. 당(唐)나라 예종(睿宗)이 5일에 조회를 받은 것을 반드시 본받을 것은 없으니, 너희들은 간(諫)하지 말고, 각각 나의 말을 기록하여, 정부 대상(大相)505) 에게 갖추어 전하여 나의 뜻을 생각하게 하라."

대언(代言) 등이 아뢰기를,

"옳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18년 동안 호랑이[虎]를 탔으니, 또한 이미 족하다."

하였다. 이명덕 등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서 정부·육조에 선전(宣傳)하였다.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좌의정 박은(朴訔)·우의정 이원(李原) 등과 육조 판서·육조 참판(六曹參判)이 말을 같이하여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노모(老耄)함에 이르지 않고, 병환도 정사(政事)를 폐지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또 원민생(元閔生)을 보내어 세자를 세우도록 청하고, 또 세자가 조현(朝見)한다고 아뢰게 한 지 몇 달이 못되어서 전위(傳位)하고 자일(自逸)하심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선(內禪)은 나라의 큰 일이니 마땅히 인심을 순(順)하게 하여야 하며, 억지로 간쟁(諫諍)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전하가 천조(踐祚)506) 한 이래로 백성이 평안하고 물건이 부성(阜盛)하고 해구(海寇)가 복종(服從)하여 오늘과 같이 태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혹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있더라도 어찌 전하의 덕(德)이 천심(天心)을 누리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요(堯)임금·탕(湯)507) 임금도 또한 면치 못한 바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비가 아들에게 전(傳)하는 것이니, 신하들이 간쟁(諫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하의 간쟁하는 법이 어느 경전(經典)에 실려 있는가?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된 지 오래니, 고칠 수가 없다. 다시 이를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일오(日午)508) 에 이르러 임금이 의관을 정제하고 지팡이를 짚고 보평전(報平殿)으로 이어(移御)하여 승전 환자(承傳宦者) 최한(崔閑)으로 하여금 승정원에 하교(下敎)하기를,

"오늘 개인(開印)509) 할 일이 있으니, 속히 대보(大寶)510) 를 바치라."

하니, 대언(代言) 등이 소리내어 울면서 보평전(報平殿) 문 밖에 이르니, 임금이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다. 내신(內臣)으로 하여금 세자를 부르고, 상서사(尙瑞司)511) 에 명하여 대보(大寶)를 바치라고 재삼 독촉하니, 영돈녕(領敦寧) 유정현(柳廷顯) 및 정부·육조(六曹)·공신(功臣)·삼군 총제(三軍摠制)·육대언(六代言)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가 보평전 문밖에 이르러 호천 통곡(呼天痛哭)하면서, 내선(內禪)의 거조(擧措)를 정지[停寢]하기를 청하고, 함께 대보(大寶)를 붙잡고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큰 소리로 이명덕(李明德)을 윽박지르기를,

"임금의 명(命)이 있는데, 신하가 듣지 않는 것이 의리인가?"

하니, 이명덕이 마지 못하여 대보(大寶)를 임금 앞에 바치었다. 세자가 급히 명소(命召)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허둥 지둥, 급히 와서 서쪽 지게문으로 들어가니, 임금이 세자를 보고,

"얘야! 이제 대보(大寶)를 주겠으니, 이를 받아라."

하였다. 세자가 부복(俯伏)하여 일어나지 않으니, 임금이 세자의 소매를 잡아 일으켜서 대보를 주고 곧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가 몸둘 바를 알지 못하다가 대보를 안(案)에 놓고, 안으로 따라 들어가 지성(至誠)으로 사양하고, 군신들도 또한 통곡하여 마지 않으며 국새(國璽)를 되돌려 받도록 청하고,

"〈중국에〉 세자를 봉(封)하도록 청하여 주준(奏准)512) 을 받지 못하였는데, 어찌 이리 급박하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어찌 〈중국에〉 주문(奏聞)할 연고가 없겠는가?"

하고, 이에 최한(崔閑)으로 하여금 대소 신료(大小臣僚)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이미 국왕과 서로 대(對)하여 앉았으니, 경 등은 다시 청하지 말라."

하였다. 세자에게 명하여 대보(大寶)를 받고 궁(宮)에 머물게 하였다. 인하여 홍양산(紅陽傘)513) 을 내려 주고, 상서관(尙瑞官)과 대언(代言)한 사람에게 명하여 대보(大寶)를 지키면서 자게 하였다. 가종(駕從)514) 10여 기(騎)에게 명하여 서문(西門)으로 나가서 연화방(蓮花坊)의 옛 세자전(世子殿)에 거둥하니, 백관(百官)들이 따라서 전정(殿庭)에 이르러 통곡하면서 복위(復位)하기를 청하였다. 세자가 대보(大寶)를 받들고 전(殿)에 나아가 대보를 바치며 굳이 사양하였다. 밤이 되자 임금이,

"나의 뜻을 유시(諭示)한 것이 이미 두세 번이나 되는데, 어찌 나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臣僚)들의 청을 들어 복위(復位)하려 한다면, 나는 장차 그 죽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하고, 이에 두 손을 맞잡아 북두성(北斗星)을 가리키고 이를 맹세하여서 다시 복위(復位)하지 않을 뜻을 보였다. 최한(崔閑)으로 하여금 명(命)을 전하기를,

"내가 이러한 거조(擧措)를 천지(天地)와 종묘(宗廟)에 맹세하여 고(告)하였으니, 어찌 감히 변하겠느냐?"

하니, 세자가 황공하고 두려워하여 이명덕(李明德)을 돌아보면서,

"어찌할까?"

하니, 이명덕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효도를 다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세자가 이명덕으로 하여금 대보를 받들고 나가서 경복궁에 돌아가게 하고, 대언(代言) 김효손(金孝孫)으로 하여금 대보를 지키면서 자게 하였다. 대간(臺諫)에서 상소하여 내선(內禪)을 정지하도록 청하였다. 그 소(疏)의 피봉(皮封)에 쓰기를, ‘상전 개탁(上典開拆)515) ’이라 하였다. 임금이,

"나는 이미 사위(辭位)하였는데, ‘상전 개탁(上典開拆)’이라 함은 무엇인가? 만일 ‘상왕전 개탁(上王前開拆)’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읽어볼 것이다."

하고, 곧 그 소(疏)를 물리쳤다. 이날 저녁에 정비(靜妃)가 연화방(蓮花坊) 옛 세자전(世子殿)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8008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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