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여행 둘째 날 오후는 자유시간이었다. 태환이가 남자애들하고 전쟁놀이를 한다고 우르르 몰려다니다 내쪽으로 달려왔다. “니가 좋아. 넌 내 여자 친구야.” 그리고는 초등학생 입맞춤을 해주었다. 개구쟁이 태환이와의 입맞춤은 첫 키스였다. 애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태환이도 갔다. 저녁때 장기자랑이 벌어졌다. 수학여행을 위한 싸구려 숙박업소의 무대란 그야말로 낙후했지만 우리들에겐 무엇보다도 진지하고 소중했다. 졸업여행이라서 애들은 장기자랑을 할 때 첫사랑도 고백했다. 나는 무대 밑에 앉은 승완이를 자꾸만 쳐다봤다. 태환이의 장기자랑. 태환이가 집에서 만들어 온 투구를 쓰고 기사의 검을 휘두르면서 무대로 올라왔다. 태환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나는 들었던 것 같다. 널 좋아한다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태환이의 목소리, 태환이의 얼굴이 사라진다.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뒤섞이고 남자애들의 개굿한 웃음이 무대 뒤로 흩어졌다. 무대 밑에 승완이는 조용히 앉아만 있다.
난 태환이랑 노는 것도 좋고 승완이랑 노는 것도 좋은데… 졸업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태환이는 내 앞에 앉았고 승완이는 내 짝이었다.
졸업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승완이는 텅 빈 교실 뒷문에서 나를 기다렸다. “너 그 시간을 다 잃어버린 건 아니야.” 그 애가 나를 붙잡고 바짝 다가섰다. 그 애의 따뜻한 숨을 느낄 수 있었다. 승완이는 생각이 깊은 그런 아이였다. 난 승완이에게 믿음이 갔다. 태환이는 날 자기 여자 친구라고 해. 태환이가 입을 맞출 때 싫지 않았어. “괜찮아.” 승완이의 대답이 의외였다. 괜찮다고? 승완이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도 진심이야.” 그 애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입술에 다가가 나도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안 될 소리다. 태환인 어쩌고? 게다가 난 결혼해서 남편도 있고 애들도 셋이나 있지 않은가? 벌써 심각하게 일이 꼬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