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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딩 룸을 마지막으로 회고해본다
게시물ID : economy_235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콜천
추천 : 10
조회수 : 97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25 20:14:32

트레이딩 룸의 생활을 다룬 이야기의 마지막 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착오매매 사고도 자주 나타난다. 소위 ‘한맥 사태’가 가장 유명했지만, KTB 증권도 알고리즘의 어처구니없는 오류로 100억대 손실이 난 적이 있었다. 비슷한 건수는 작고 큰 차이일 뿐 많이 있었다. 다만, KTB 증권에서 문제의 사고가 터진 2013년 6월 25일 날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어제처럼 생각이 난다. 해괴한 사건이었다.

나는 당시 새로 적응한 매매 스타일로 특히 그 날 역대 최대 손익을 벌고 있었다. 아침부터 느리게 움직이던 하락 추세에 편승해서 풋옵션을 아주 많이 매수하고 있었고 시장은 약속된 패턴으로 하락하여 옵션들이 들썩이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트레이딩룸에서 매매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후에 엄청난 주문사고가 선물 시장에서 나타나더니 본부가 술렁거렸다. 주문사고의 규모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선배들이 서로 부르고 뛰어다니고 난리도 아니었다. 매매에 방해될까 봐 나한텐 정확히 설명해주진 않았는데, 우리 팀에 갓 전입해온 분이 연루된 악성 사고였다. 심지어 그분은 당일 출근도 안 한 상태. 금요일 날은 나한테 ‘천 과장의 매매를 보고 있으니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매매 기법을 완전히 바꿔보고자 한다.’라는 불길한 소리를 남기고 휴가를 낸 상태였다. 어떻게 휴가를 낸 분이 이런 사고에 엮여 있는가, 머릿속에 온갖 께름칙한 생각들이 스쳐 갔다. 그 직전 2년여를 우리 팀장님과 우리 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인생을 전부 쏟아부은 터였다. 당일 매매를 정리하고 축하받을 새도 없이, 상황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영역에서 발생했는지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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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1편의 마지막 내용. 개발자가 아닌 사람은 몇만줄의 프로그래밍에서 단 하나의 부호를 잘못 썼을 때 얼마나 큰 규모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돈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한 줄의 잘못된 코드가 어떤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는지 일반적인 감각으론 받아들이기 힘들다. 인공지능의 예측 불가능성보다, 사악한 사람의 의지보다, 버그가 더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그 버그를 확인할 길이 없는 회사의 시스템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자.

상대 호가라는 것이 있다. 호가는 ‘가격을 부르다’는 뜻이다. 시장에서 미나리를 파는 아주머니가 ‘한단에 2천원이요!’를 외치면 그것은 매도호가이다. 내가 가서 ‘아주머니 1800원에는 안 되나요?’라고 외치면 나는 매수호가를 부른 것이다. 둘 중 하나의 가격에 거래가 성사가 안 된다면, 서로 상대 호가를 물끄러미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2000/1800에 호가가 형성되어 있다고 세련되게 표현해보자.

2,000원에 팔려고 내놓은 물량이 50단이 있으면 ‘호가잔량’이 50인 셈이다. 내가 50단을 사야 하는 상황이면 한 번에 다 살 수 있는 호가 잔량이 있는 셈이고, 내가 100단을 사야 한다면 여기서 50단을 싹 쓸어버리고 다른 데 가서 다시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 어쩌면 소문이 나서 가격이 오를 수도 있다. 물량이 없다면, 내가 2,000원에 50단을 사고 싶다는 이야기가 시장에 나돌며 매수호가의 잔량이 50이 쌓이는 셈이다. 어쩌면 50단이 팔리자마자 아주머니는 어디선가 100단을 더 꺼내와서 나한테 50단을 더 팔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 매도호가 잔량이 50개가 쌓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림 – 가운데 수평선 위아래의 267.75 / 267.70 이 각자 매도호가, 매수호가이며, 호가에서 각기 왼쪽 오른쪽 첫번째 숫자인 101과 77이 매도잔량 및 매수잔량. 건수는 해당 잔량이 몇개의 개별적 주문으로 이뤄져 있는지를 보는 것으로, 잔량이 100인데 건수가 100이면 예컨대 1계약 짜리 주문이 100번이 나와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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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를 해본 사람이라면, 호가가 형성되는 구조를 호가 창을 통해 한 번이라도 봤을 것이다. 책처럼 겹겹이 쌓여서 가격(호가)과 물량이 나타나는 그 창 말이다. 단어가 어려워서 그렇지 별 얘기 아니다. 어려운 단어들이 난무하는 김에 더 어렵게 표현해보면 이런 것을 시장의 미시구조라 한다. 장터에서 가격이 들쑥날쑥하는 메카니즘과 비슷하다. 아이, 요새 미나리 쓸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가격을 올렸어요~ 라는 표현 안에 이런 미시구조가 듬뿍 담겨 있는 것이다.

보통 트레이더들은 선물 (futures) 거래와 호가를 보며 시장의 분위기를 살핀다. KOSPI200 을 상징하는 이 선물이라는 상품은, (280pt인 지금 기준으로) 국내 대형주 200종목의 지수인 KOSPI200 주식 1.4억 원어치를 비중대로 들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다. 다만 훨씬 적은 돈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레버리지 효과와, 매도부터 할 수 있다는 장점 등이 있다. 그러니 선물 100계약(주식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이면 140억 원어치 KOSPI200 주식을 들고 있는 것과 손익이 거의 같이 움직인다.

당시에도 많은 알고리즘이 시장에서 돌아가는 중이었다. 0.001초를 millisecond, 즉 천분의 일초라고 하는데, 선물시장의 체결과 호가의 움직임은 이런 천분의 일초보다 빠른 속도로 끝없이 움직인다. 수많은 주체가 이 선물시장에서 한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호가를 넣거나 빼고 체결을 하고 청산을 하며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주식 시장 전체의 분위기를 살펴보는 방법으론 매우 효율적인 상품인 셈이다. 이때는 한 호가에 적게는 50계약, 많게는 400계약 정도가 ‘호가잔량’으로 쌓이던 시절이다. 그러니 약 4~500억 원까지는 시장을 놀래키지 않게 한 클릭만으로도 체결이 가능했다. 이러니 KOSPI200 선물 시장이 세계 지수선물 시장 중에 최상위의 거래량을 자랑했던 것이다.

이날 사고는 이 호가 잔량에서 우선 발생했다. 선물의 매수호가 잔량, 즉 미나리 1,800원에 50봉지 사겠다는 실시간 정보가 갑자기 기괴한 숫자를 찍기 시작했다. 50봉지가 100봉지 500봉지 1000봉지 5000봉지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선물 기준으로 다시 말해보자. 2013년 6월 25일 오후 2시 반, 주식 동시호가는 20분 남아있었고 선물 동시호가는 30분쯤 남아있어 거의 시장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 시장은 아침에 비틀대더니 하루종일 추세적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었고, 먼젓번 글에 밝힌 것처럼 나에게는 이런 움직임은 모처럼 나온 ‘약속된 패턴’이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역대 최대의 베팅으로 역대 최대의 수익을 보고 있었다. 하락의 끝자락이 다 진행되기 전에, 268.20이라는 매수호가에 약 200계약 남짓하던 잔량이 순식간에 올라가서 1만, 2만, 3만, 4만…. 10만 넘게 찍히는 것이었다. 단순계산해도 10만 계약은 14조 원어치의 주문이다. 명백한 주문실수였다. 게다가 한 증권사에서 9999계약 이상을 보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 주체임이 확실했으므로 시스템 오류가 동반된 엄청난 주문실수였다. 게다가 주문은 초당 몇천 계약씩 꾸준히 누적되어 쌓이고 있었다.

주문사고를 낸 사람이 주문을 취소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주문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주문 취소 시스템마저 붕괴된 무척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매도호가에서 사고가 났다면, 추세하락에 빌붙은 추세추종형 주문이나 손절 사고가 났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매수 즉 시장상승을 노린 주문이 발생한 점은 그냥 단순 오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더가 아닌 누군가의, 혹은 기계적 실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누군가의 실수는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기회일 수 있다. 트레이더의 본능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칠 만큼 흥분됐다. 당일 본부에서 매매를 하는 사람은 거의 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잘한 주문사고를 순발력 있게 잡아먹은 경험도 있어 이런 기회를 포착할 자신이 누구보다 넘쳤었다. 더욱이 손익이 두툼한 날이었다. 일생일대의 날이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사고 후 여기까지 3~40초의 시간이 흘렀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고, 모니터의 한 픽셀 한 픽셀이 내 뇌에 직접 꽂힌 듯 시장의 모든 뉘앙스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때쯤 다른팀의 대리가 얼굴이 하얘져서 뛰어들어오더니 얼마 전 부서이동을 한, 휴가 간 과장님을 찾더니, 휴가라고 답하자 얼굴이 더 창백해져 다시 뛰어갔다. 이 급한 시점에 남의 트레이딩룸에 저렇게 찾아오는 것을 보니 이런 경험이 부족한 친구라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손익도 안 좋을 텐데 불필요한 매매를 하다가 운 나쁘게 잘못 걸린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어 안타까웠다.

이런 주문사고의 진행 형태는 유경험자에겐 꽤 뻔한 패턴이다. 가격이 엉망진창으로 한쪽으로 튄다. 포식자들의 압박을 버티지 못해 폭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대개는 주문사고를 일으킨 사람에게 최악의 형태로 끝나고 만다. 매수 주문을 취소하는 사이에 잔인한 트레이더들이 미친듯이 반대 체결시켜, 훨씬 불리한 가격에 눈물을 머금고 손절할 수밖에 없도록 시장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가장 확률이 높다. 이곳은 정글이고, 약자의 사체가 생태계를 보존시키니까. 매수 주문을 낸 사람의 의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때일수록 결과는 뻔하다. 그러나 이번 사고는 규모 자체가 너무 커서 의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트레이더들은 전 호가의 주문 잔량을 빼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일단 무조건 이탈하는 셈이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주문사고를 낸 사람에겐 지옥 같은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문사고가 더 높은 가격에 매수 체결되기 시작했다. 선물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호가에는 12만 계약, 약 15조 원의 주문이 쌓여있고, 시장가 매수로 7000계약, 즉 1조 원 정도의 주문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시장을 뒤집어엎었다. 난장판이었다. 하방 포지션이던 나는 리스크 관리를 해가면서 버텼다. 포지션을 많이 줄여둔 게 어쩌면 엄청난 다행이었다. 어차피 사고를 낸 사람은 매수한 물량을 시장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도무지 이익을 보고 풀 수는 없는 포지션이다. 어마어마한 손실로 마무리될, 예고된 비극이 보였다.

그런데 본부 분위기가 이상했다. 선배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윗분들은 아랫사람에게 상황파악을 하고 있느냐, 이 사고는 너희 탓리라느니, 면피를 위한 잔인한 포석을 일찌감치 깔고 있었다. 뭔진 모르지만,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집중력을 흐뜨려트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걱정이 들었다. 나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우리 본부에서 이런 사고를 일으킬 어떤 종류의 시스템도 매매도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95%의 트레이더가 손으로 매매하고 있었고, 한분 한분이 백전노장들이었으며, 사고 대응 능력은 완벽에 가까웠을 것이다. 12만 계약이라니,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는 애당초 우리 시스템에서 주문이 나가지도 않을 터였다. 유일하게 손으로 매매하지 않는 사람은 내 가까이 앉아있던 절친 한 명과, 오늘 출근도 하지 않고 매매도 하지 않은 스캘핑 시스템 트레이더 한 분이었다. 절친인 그 개발자가 평소에 사고를 막기 위해 들이는 정성과 사고방지를 위해 포기하는 엄청난 손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 호가 없이 폭등 질주하던 시장은 제정신을 차리고 순식간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하락세를 일부 다시 진행했다. 매수를 한 사람의 주문으로 폭등하고, 그 사람이 청산하며 다시 원위치한 것이다. 나도 거의 휩쓸려 나갈 뻔했다. 7 포인트, 약 3%에 가깝게 폭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다. 5 포인트 정도밖에 안 올랐을 수도. 리스크 관리를 더 잘했다면 수십억도 벌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본부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도저히 매매할 환경이 아니어서 당일 벌었던 수준의 절반도 안 되는 1억쯤에서 수익을 챙기고 포지션을 다 정리해버린 다음 주위 분위기를 살펴봤다.

맙소사.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휴가 가신 분이 연루된 사고였다. 믿기지 않았다. 아까 뛰어온 대리의 팀원 한 명이 이 분과 함께 무슨 사고를 일으켜 1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트레이더들이 사고를 피하기 위해 바치는 비정상적으로 어마어마한 조심성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심성이 99인 사람이란 1만큼이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기회는 전부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복잡해질 여지가 있는 시스템은 죄다 거부한다. 블랙박스 시스템은 주문에 몇 겹의 안전망을 마련하지 않으면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런 시스템들마저도 개별 트레이더에게 구상권을 분명히 청구하게 마련이다. 정글 속에서의 생존법을 익혀온 트레이더 출신에게서 발생할 사고는 절대로 아니었다. 더욱이 저팀 팀장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조심성이 가장 많은 분이었다.

장이 끝나고 사고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 사고의 본질은 이랬다. A 씨와 B 씨가 있는데, 한때 같은 팀으로 있다가, B씨가 불과 몇 주 전 우리 팀으로 들어왔다. 둘은 팀이 갈린 이후에 함께 주문 시스템을 하나 사적으로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자의 팀장들에게 보고 없이 시스템을 개발했고, B씨가 A씨에게 베타버전을 건네고 휴가를 갔다. A씨는 이것을 실험 운용해보다가 시스템이 뻑나서 사고가 난 것이다.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느라 실제 사고가 발생한 시점 한참 후에 사고를 알아챘다고 한다. 손실은 A씨의 계좌에서 발생했으니 두말할 것 없이 A씨가 책임질 일이었다. 팀장한테 보고를 안 했으니 팀장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관리자의 책임을 져볼 기회마저 놓친 것이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없진 않을 것이다. B씨가 시스템을 잘 짰건 못 짰건 간에, 최소한의 절차 두 가지를 어긴 것이 나는 심각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팀장한테 보고할 의무를 어긴 점, 둘째는 회사의 서버상에서의 리스크관리 시스템의 프로토콜을 마음대로 넘나 들은 자신감. 나는 특히 이 ‘자신감’에 의한 사고가 정말 무서운 점이고, 수없이 반복될 수 있는 유형의 사고라고 생각한다.

이 B씨는 서버 개발 및 관리자로 잘 나가시던 분이셨는데, 스캘핑 시스템을 여럿이 함께 개발하여 트레이더로 전직하게 되셨다. 소위 반자동 시스템이라는 것이었는데, 진입은 기계가 하고 청산은 손으로 하는 그런 스캘핑이었다고 한다. 초기엔 돈이 되다가, 시스템을 고안한 트레이더가 떠나는 등 시간이 흐르고 장이 바뀌자 시장에서 안 먹히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팀에서 양매도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한 번 더 자리를 마련한 셈이었는데, 다른 팀과 개인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계셨던 것 같다. 문제는 회사 내에서 거래소랑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는 증권 FEP 라는 서버가 있는데 이를 딜러들에게 공개해놓으면서 대신 주문 한도 등을 철저히 정해서 보고하라고 했던 것을 다소 악용한 점이다. 주문 한도를 제대로 설정을 안 해놓은 상황에서 잘했다고 대충 보고를 한 것이라 전해 들었다. 서버 개발자로서의 자신감 때문에 남들한테 해당하는 규정이 본인에겐 필요 없다고 독자적인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소스가 트레이더들한테 있다 보니 회사에서 그냥 믿는 수밖에 없었고, 정확한 감시를 하기 힘들었다. 트레이더의 자기 감시 능력과 윤리의식, 철저한 리스크 관리 능력이 그때까진 그만큼 뛰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그런 틈을 타 트레이더의 정신세계를 갖지 않은 사람의 가벼운 실수에 시스템이 붕괴한 면이기도 하다.

이 사고에 연루된 분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고 한때 한솥밥을 먹었으니 이 글을 읽게 되면 속이 상하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을 마냥 쉬쉬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은 아닐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잘나가시던 윗분들도 인생에 큰 굴곡을 겪었다. 위에 밝힌 A씨는 내가 만나본 트레이더 중에 가장 온화하고 양반인 분 중에 한 분이셨다. 나중에 회사에서 처벌은 물론,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구상권까지 청구 당하시고도 이 사고로 피해를 입으신 윗분들에게 손편지를 써서 사과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사건을 굳이 다루는 이유는, 앞서 말한 듯이 반복될 수 있는 유형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출신이 만든 로보어드바이저가 거의 없는 이 시대에, 금융권 출신인 내가 이런 얘기를 하긴 조금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 트레이딩 룸의 경험이 있는 모든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리스크 관리와 사고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연히 잘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신감’을 가지고 개발한 자동 주문 시스템들이 과연 사고가 없을 수 있을까? ‘이쯤은 괜찮겠지’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규정을 넘나들 권한이 있으면 어떻게 관리가 가능할 것인가. 그들이 트레이더들이나 관련 부서에서 가지고 있는 극한의 조심성과 자기 감시 능력을 별도의 훈련 없이 되새기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을까? 금융위에서 위와 같은 사고를 일으킨 개발자들의 코드를 다 뜯어보면 이런 사고들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분명히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이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고 규제 당국이 나타나서 이런 사고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막아질 사고도 아니다. 이런 글들을 통해 아주 많은 사고의 위험성이 부각되어야 하고 고객 및 개발자들이 인지를 해야 한다. 금융은 정말이지 제약조건이 많은 산업이다. 규제의 제약 말고도, 일상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사고의 위험을 줄여나가기 급급한 재미 없는 산업이다. 트레이더의 머릿속에는 시장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갖가지 사고들의 지형이 입체모델처럼 펼쳐져 있다. 어디서 어떤 사고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그 사고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트레이더는 항상 리스크 관리팀의 눈을 피하고 싶다. 시장에 대한 이해가 더 높지 않은 리스크 관리팀 입장에선 항상 트레이더의 자유도를 줄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투명한 전략, 불투명한 시스템을 자꾸 만들고 싶은 충동이 있다. 뚜렷한 윤리 문화가 아니면 이를 막기는 힘들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아마 더할 것이다. 로보어드바이저에게 필요한 것은 명명백백히 투명한 투자 철학과 논리이다. 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것을 만들면 사고의 여지가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덜 복잡하되, 자동화를 통해 효율을 늘릴 수 있는 전략들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 체결된 종목들이 어떤 이유로 체결되었는지 ‘블랙박스 인공지능 기술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안알랴줌’이라는 얘기는 같은 로보어드바이저인 우리 입장에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얘기이다. 사고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일까. ‘우리는 좋은 대학 나왔기 때문에 그럴 리 없음’이라고 반론을 제시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로보어드바이저들은 헤지펀드의 뒤켠에서 트레이더를 잡아먹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행여나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그 오류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책임질 영역에서 말이다. 대중의 투자에 필요한 것은 첫째도 안정성이고 둘째도 안정성이다. 워런 버핏 마저도 ‘돈을 잃지 말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잡았다. 버핏도 사용하지 않을 시스템을 대중에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여하간에 많은 금융권 출신들이 우리가 만드는 로보어드바이저의 투명성과 안정성,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주는 것은 이런 편집증에 가까운 조심성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주어서일 것이다. 트레이더라고 신비롭고 폐쇄적으로 포장할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누구나 프로가 되기 위해 바치는 오랜 세월의 고된 경험과 자기절제를 통해 더욱 투명하고 간단명료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꼼수를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 불투명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몇 마디 그럴싸한 얘기를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재미 없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한 느낌이지만, 이렇게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시리즈를 8편에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http://www.juliusch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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