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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 3
게시물ID : emigration_29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호호아가씨
추천 : 22
조회수 : 1038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7/07/10 10:57:38
인터뷰를 보러가는 길 내 코를 저미던 양냄새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업체 측에서는 인터뷰에서 탈락하면 한 달 뒤에나 재기회가 있고 그마저도 떨어지면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떨어진 사람은 거의 없으며 여자는 주로 일이 수월한 패킹쪽으로 배정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며 안심을 줬었다. 사실 한인업체의 역활은 단순 이 인터뷰를 잡아주는 것 까지였고 호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전혀 책임지지 않는 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인터뷰를 들어가니 푸짐한 인상의 오지 아주머니가 나를 맞이했다.
영어는 할 줄 몰랐지만 힘든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정도는 알아들을만 했고 나는 인터뷰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예스걸이 되어있었다. 긴장했지만 인터뷰는 의외로 싱겁게 끝이났고 내일 새벽에 다시 공장으로 오면 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한무리의 한국여자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척 봐도 하얀색 유니폼이 깔끔하니 패킹룸으로 보였고 마주친 우리에게 웃으며 패킹룸에서 보면좋겠다고 말하고 흩어졌다. 한국에서 듣기로 별 문제가 없으면 보닝이나 패킹으로 포지션이 가게된다고 하였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난 별 걱정없이 그들과 같이 일하게 되겠군 이라고 생각하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또 집에 어떻게갈까 막막하였다.
고기공장에서 일하려면 모두 큐피버라는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한인업체 측에서 문자로 주소와 택시전화번호를 보내며 그 쪽에 당장 두시간 뒤에 큐피버 예약이 잡혀있으니 가서 스킨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 막무가내 식이라고 느껴졌으나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콜택시를 불러 다운시티까지 나갔고 (공장에서 다운시티까지는 차로 삼십여분이 걸렸다.) 택시비는 n분의 1하여 지불하였다. 분명 한국에서는 일자리 알선과 큐피버 접종 은행계좌나 텍스파일넘버오픈까지 자잘한 시작을 세심하게 도와주는 비용으로 내 돈을 받아갔지만 실상으로는 예약정도만 도와줄 뿐 어플라이 폼 작성이나 픽업등은 모두 내 스스로 했어야 했었다. 숙소와 양냄새의 멘붕으로 그때는 그런게 생각나지 않았고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주어진 것을 퀘스트 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호주는 참 느긋한 나라라는 것을 그 때 느꼈는데 분명 예약시간에 맞춰갔음에도 한참을 기다렸다. 기초적인 손검사나 큐피버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약의 알러지 여부를 검사하는 스킨테스트정도를 마치고 은행에 가서 계좌를 오픈하고 어제 못봤던 장을 다시 보았다. 최소한의 조리도구와 당장 살아가야 할 식량 그리고 침대커버와 이불 청소도구 목욕용구등 꽤나 많은 지출을 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어제의 카라반으로 돌아갔다.
  
파티준비를 하며 들떠있었던 어제와 달리 암울한 침묵이 택시내를 감돌았다. 십오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카라반에서 우린 장본 것을 내려놓고 열심히 쓸고닦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닦아도 닦아도 먼지는 계속나왔고 이 곳의 것들은 모두 자이언트 크기였는데 엄청난 크기의 나방 거미 등이 속출했고 우린 비명을 지르며 그 것들을 모두 치워냈다. 일단 이번에 커플들을 제외하고 여자로만 이루어진 카라반은 우리뿐이였기에 우리들의 청소는 다른 카라반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다들 어차피 지저분해 질 거 뭐하러 청소하냐는 식이었는데 나는 딱히 엄청난 결벽증은 가지고 있는 편이 아니였으나 살기위해 청소했다. 마침내 우리 카라반은 맨발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청소가 되었는데 다른 숙소에 사람들이 자꾸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 예민보스가 자주 출동했던 것 같다. 

청소를 하고 저녁은 대충 일불짜리 식빵과 식빵보다 훨씬 비싼 누텔라로 대충 때우고 공용샤워장에 가서 샤워를 했는데 앞에 사람들이 이미 뜨거운 물을 다 써서 격하게 소리지르며 찬물로 샤워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고 나는 평탄하게 살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경험이지만 그때는 이런 선택을 한 나와 감언이설로 꼬셨던 한국업체를 원망하며 같은 숙소에 있던 언니와 동생과 함께 분노의 맥주를 마셔댔다.

그러던 와중 우리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다른 숙소 여기저기 우리가 오일쉐어를(일정 금액의 돈을 내고 차로 출퇴근이나 장을 같이 하는 것) 구한다고 말을 뿌려논 상태였는데 아침에 우리를 태워줬던 오빠가 오일쉐어를 해준다고 했다. 출퇴근 걱정이 바로 해결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주일에 한사람당 십불정도로 출퇴근과 장까지 모두 해결했었는데 다른 사람은 모두 이삼십불 정도로 출퇴근만 하고 있었고 장을 보러나갈 때 마다 오불씩 따로 받는다고 했다. 그 오빠에겐 나중에 밥도 자주 사고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사람 같다. 우리가 나중에 올려준다고 했음에도 한사코 거절했었다. 엄청난 인복의 운이였다.

아무튼 청소로 인해 많이 노곤해진 우리는 깊이 잠이 들었고 얼마되지 않아 알람이 울렸다. 세수와 양치를 급히하고 어제 얘기해두었던 오빠차에 탑승했고 오빠는 보닝룸에서 일했는데 그 곳에서 보자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사무실로 가서 입사서류 및 텍스파일넘버 신청을 했고(네이버에서 하나하나 검색하며 채워나갔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는 런치룸에서 모두 모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우리가 쓸 유니폼과 장화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명을 제외한 우리에겐 파란헬멧과 파란색 티셔츠가 지급되었다. 분명 어제 봤던 패킹룸이나 보닝룸의 유니폼이 아니였던 것이다. 난 생각없이 그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파란눈의 매니저가 우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파트는 킬플로어야." 
출처 그때의 심정은 공게에 더 어울릴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공포가 잊혀지지 않네요 나머지 글도 생각나면 이어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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