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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게시물ID : freeboard_16992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주시자
추천 : 0
조회수 : 25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1/06 17: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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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라운의 한 장면에서 처칠의 80세 생일 기념으로 의원들이 초상화를 선물하는 장면이 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당시의 명망 있는 화가가 직접 처칠을 만나서 그리게 됐는데 처칠은 화가에게 몇 번이고 작업 중인 그림을 보여달라고 애원한다. 때로는 화가를 비난하고 때로는 그의 능력을 칭찬하며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기념일 당일, 처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그림에 드리운 막이 걷힌다. 처음으로 초상화를 본 처칠의 얼굴에는 순간 당혹과 분노의 감정이 지나가지만 노련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며 유머러스하게 넘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처칠은 그림을 불에 태워버린다. 그림 속의 그는 늙고 배가 나오고 굽은 등을 가졌으며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병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화가가 처칠에게 그것이 당신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처칠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제외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위대한 명제를 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나’라는 주체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라는 ‘타인’에 의해 규정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자아는 타인들에 의해 규정된 범위 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실체일지도 모른다.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 구조 중에서.


처칠의 실제의 모습은 분명 하나이다. 하지만 처칠 자신이 보고자 했던 부분과 ‘타인’인 화가가 보고 그린 ‘처칠’은 서로 달랐다. 우리 역시 때로는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드라마 속 처칠처럼 격한 감정에 휩싸여 좌절하거나 화를 낸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외부에서 탄생한 자아를 용납할 수 없을 때이다. 용납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모습이 실제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부정하고 없애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 대부분을 소비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과 도플갱어가 만나면 반드시 한쪽이 죽어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 후기 대문장가 중 한 사람인 박지원은 그가 쓴 열하일기가 여러 신하에게 ‘난잡한 문장’을 지적받자 정조의 명을 받고 자신의 문장을 반성하기 위해 ‘절제되고 격조 높은’ 문장을 써서 받쳐야 했다. 비록 명을 따랐지만, 그는 죽을 때 까지 ‘나의 문장은 난잡하지 않다’라며 ‘통한의 비추’를 날리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실제의 ‘나’를 찾기 위해 힘든 정신적 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가능하다면 타인이 만들어낸 외부의 ‘나’를 무시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외부에서 만들어진 내 모습이 내가 바라보는 ‘나’를 무섭게 짓누른다면 그때가 실제의 ‘나’를 찾기 위해 떠나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 여행은 내 안의 ‘나’든 외부의 ‘나’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다 조용히 다음 길로 가면 될 정도로 단순하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고 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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