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부끄럽지만...습작을 올려 봅니다.
고개 숙여 의견을 청합니다. 쓴소리도 물론 환영입니다.
지하철에서 읽기 좋은 짧은 소설 - 1. 지하철 소설
대학시절, 이데올로기와 근대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한국 문학계의 역작으로 남을만한 소설쓰기를 꿈꾸었던 전나라 씨는 졸업 후에 대기업에 취직했다. 이렇게 써버리면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취업의 실체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백 개 정도의 자기소개서를 썼고, 그 중에 세 군데로부터 면접의 기회를 얻었으며 그 중 하나에 겨우 합격했다. 그것도, 우선순위였던 지원자가 다른 회사로 가버리면서 생긴 기회였다.
대기업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엄마 탓이었다, 라고 전나라 씨는 후에 진술한다. 전나라 씨의 어머니가 “대기업에 행복이 있다”고 주구장창 주장해왔기 때문이었다. ‘엄마 덕분’이 아니라 ‘엄마 탓’이라고 한데서 영민한 독자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전나라 씨는 결코 대기업의 일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곳은 뭔가 좋은 일을 해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뭔가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적어도 전나라 씨가 보기에는 그랬다. 생존의 목적이 생존 그 자체인 듯한 모호함. 재미난 일들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듯한 자세. 전나라 씨는 그것들이 의미가 무엇인가 궁금했지만 물을 데가 없어 술을 마셨다. 술은 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질문을 멈추게는 해주었다.
어느날은 고주망태가 되어 택시에 올랐다. 운전사는 안타깝게도, 말이 많은 쪽이었다. 전나라 씨는 유튜브 시청하기를 포기하고 운전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운전사는 과거 IT업계에 종사하던 인물로, 그의 말을 대강 들어봐도 학식의 깊이가 꽤 되는 것 같았다. 다만 블레이크와 액섹을 밟는 솜씨로 보아, 택시 운전이 썩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닐 것이었다. 차에서 내릴 적에 전나라 씨는 “조심히 가세요”라고 운전사에게 인사했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부여잡고 지하철에 오르던 중 전나라 씨는 문득 불길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9시까지 사무실에 가기 위해 지옥철에 몸을 내던지는 이 가련한 청춘들은 이 생을 어찌할 셈인 것인가. 운이 좋으면55세까지 지옥철에 타고 오르는 일을 반복하겠지. 그 다음은 무엇인가. 적성에도 맞지 않는 택시 운전을 하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공유차 플랫폼 인허가 반대시위에나 몇 번 참가했다가, ‘세상이 너무 변했어’ 라든가 ‘망할 공무원 놈들’이라는 탄식을 안주 삼아 술이나 마시다, 그렇게 노인이 되어 갈 것인가. 그는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근대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한국 문학계의 역작으로 남을만한 소설쓰기를 꿈꾸었던 과거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 회사에 도착하자 업무 따위는 내팽개친 채 인생을 다시 구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생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 끝에 그는 소설을 쓰기로 했다. 어렸을 적부터 정말로 그가 관심을 가진 일은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펜으로 머리를 긁어대던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지하철 소설’이었다. 지하철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누구나 지하철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분량의 가벼운 소설을 쓰자, 비록 한국문학계의 역작이 될 수는 없을지언정, 웃음이 사라진 이 시대에 웃음을 줄 수 있는 해학적이고 풍자 가득한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위로하자, 그리고 이 지옥철 인생에서 탈출하자. 결심을 한 그의 눈에서는 모처럼 맑은 빛이 났다.
결심은 단호했으나 소설이란 게 어느날 뚝딱 지어지는 것은 아닐터. 전나라 씨는 소설이란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고민을 하다가 요새 나온 소설을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퇴근 후에 서점에 갔고, 두께가 얇은 소설책을 세 권 샀다. 계산을 마치고 나자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책을 산 것만으로도 이미 뭔가가 시작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변화를 자신이 능동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견딜 수 없는 흥분을 느꼈고 그 흥분을 조금 더 만끽하기 위해 (또한 저녁식사도 해결하기 위해)가까운 해장국집으로 가서 국밥과 소주를 한 병 시킨 뒤, 내일부터는 정말 소설을 쓰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맛있게 술을 마셨다. 마지막 잔을 따를 때 쯤에 그는 벌써 뭔가를 이루기라도 한 것 같은 황홀한 기분에 젖어 있었는데 그때 마침 그의 게이 친구인 이홍진이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의 목적은 술이었으며 전나라 씨는 자신이 이제 소설을 쓰기로 했다는 사실을 빨리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둘은 강남역의 포차에서 만났으니 그 다음은 구구절절 설명 않더라도 그 대강이 쉬이 헤아려지실 것이리라 믿는다.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부여잡고 지하철에 오르던 중 전나라 씨는 문득 가방 속에 들어있는 책 생각이 났다. 그는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세 권의 책 중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으나 출근길에 웹툰을 보는 대신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또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제법 우쭐한 마음으로 그는 독서에 열중했다. 그래, 이렇게 몇 주 정도 참고할만한 책들을 독파한 다음 내 작품을 쓰자. 그의 마음은 또 한번,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지하철이 정자역에 도착하고 쓰나미 같이 승객들이 밀려 들어오자 그는 황망한 중에 손에서 책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던 그는 어느새 열차의 한가운데로 밀려 오고 말았는데, 손에서 놓친 책이 어느 승객의 발 밑에 깔려 있는지는 통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제 울상이 되어, 땀으로 등이 푹 젖은 승객의 셔츠에 얼굴을 파 묻은 채 강남역까지 가게 되었는데, 내릴 때 보니 어제 샀던 그 새 책은 수많은 구둣발에 밟히고 채여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시발.
전나라 씨는 누더기가 된 책을 집어 들고 회사로 가서 오전 내내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점심 때 겨우 짬뽕으로 해장을 한 뒤, 남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의자를 젖히고 한숨 깊은 잠을 취했다. 오후에 그는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이제서야 숙취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노트를 꺼냈다.
-지하철에서 책 읽기 X
그는 메모해두었던 ‘할 일’에 엑스표를 쳤다. 누가 지하철에서 책 같은 걸 읽는단 말인가. 그저 남의 발 밟지 않기 위해, 혹은 발을 밟히지 않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는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휘젓고, 미루어두었던 업무메일 읽기를 한 다음, 몇 개 적당한 답장을 보냈다. 퇴근 무렵, 전나라 씨는 게이 친구인 이홍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목적은 술이었고, 전나라 씨는 마침 허기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던지라 흔쾌히 친구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는데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서점에 좀 갔다 갈게.” 그러자 기억력이 제법 좋은 게이 친구 이홍진은 “어제도 갔다며, 또 가?”라고 묻는 일을 잊지 않았는데 그러자 전나라 씨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환불하려고”라며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두 권의 책을 매만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