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선택의 끝
게시물ID : freeboard_18598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운말지킴이
추천 : 2
조회수 : 1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0/10 15:35:25

늘 그래왔듯, 그것은 갑작스레 날 찾아왔다.

그 어떤 자비도 없이, 출발점도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듯한 모습으로. 이미 정점에 도달한 상태로 날 찾아왔다.

이 게임은 언제나 해왔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또한 지금은 내 홈코트가 아닌 만큼 더욱 침착하고 신중하게 이 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무실 두루마리 휴지를 차분하게 손에 쥐어본다.

통째로 가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시간을 할애하여 필요한 양을 가지고 갈 것인가.

아직 시간은 있다. 결국 필요한 만큼의 양을 두루마리에서 뜯어낸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이다. 그 선택의 끝은 보통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쪽의 대가를 요구한다. 난 시간을 버리고 편리함을 택했다.

 

화장실 앞에 도착했을 때, 난 깨달았다.

이 화장실에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님을.

반푼어치 절망적인 희망으로 좌변기 문고리를 확인해 본다.

“사용중”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것은 매순간 누구에게나 요구된다.

그 끝의 희비는 아무도 모른다.

난 지금 그 기로에 서있다. 기다릴 것인가. 바로 이마트 화장실로 출발 할 것인가.

 

기다린다면... 안에 있는 이 사람이 언제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만약 변비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30분 이상이 지나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와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공감대도 약속도 없지 않은가.

출발한다면... 약속의 땅에 다다르기 전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 그 약속에 땅에 도달했어도 자리가 이미 포화상태일 수 있다. 거기까지의 길은 매우 길기 때문에 돌아올 수도 없다. 또 만약 내가 출발한 직후 안에 있는 이사람이 바로 나온다면... 그건 엄청난 동선의 낭비가 된다.

기다리자.

마음을 먹고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난 깨달았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원장님이라는 사실을.

특유의 기침소리. 특유의 기 흐름.

그리고 무엇보다 틈새로 언뜻 비춰지는 파란색 수술복.

 

사람이 있어야 할 곳과 있어서는 안 될 곳을 구분하는 것은 경험이다.

내 경험이 미천했다면 아마 거기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경험을 먹고 지배해온 사람이다.

난 출발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 그리고 신호를 무시하며 전진하는 단 한사람의 나.

각자의 인생의 무게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내 어깨가 무거우리라.

만약 나폴레옹이 지금의 내 사태에 대한 해결과 세계정복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 놓여 있다면 세계정복을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선택에 대하여, 선택하지 않았던 반대편의 대가가 시작되었다.

난 시간과 거리의 이점을 버렸다.

그 대가는 마치 천 년 전부터 이 순간만을 이를 악물고 기다려온, 나를 향한 뿌리 깊은 복수와 증오처럼 날카롭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 때. 그녀가 떠올랐다. 나의 모든 아픔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그녀.

그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나도, 그 어떤 고난이 나에게 온다 해도, 언제나 나에겐 후시딘 같은 존재.

“이마트야?”

“어.”

“또 식당코너 공짜 탄산수 먹으러 가는거야?”

“아니 똥싸러가.”

나를 향한 모든 세상의 증오는 심도 깊은 대화 속 와이프의 저 두 마디에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안정과 용기를 되찾았다.

그래. 함께라면 그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 심지어 조금 싼다한들 우리가 함께 있는 한 두려울 것은 없었다. 아니 비록 많이 싼다해도 우리가 함께인데 그 무엇이 문제될 것인가.

싸고 난 뒤 퇴근시간이 멀어도 상관없다. 우린 어디서든 함께 있으니까...

출처 오늘 오전의 나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