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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인공지능로봇 프네우마 - 하랑의 이름으로 0. 프롤로그
게시물ID : freeboard_20043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5번지
추천 : 1
조회수 : 5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3/16 21: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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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0. 프롤로그


현대소설의 첫 문장은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 

입맛이 까다로워진 독자들을 단숨에 사로잡기 위해 창작자들은 온갖 불량한 말초신경 자극제를 아낌없이 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설 한 권에 들어갈 조미료의 절반을 첫 문장과 첫 문단, 아니, 첫 챕터에 몽땅 들이부으면서도 표정은 차분하기만 하다. 


도입부터 실종이나 성폭력, 심지어 힘없는 노인이나 어린 아이를 학대하거나 희생시키는 것도 이젠 흔하다. 무표정으로 독자들에게 정체 모를 시체를 보여주며 시작하는 것도 다소 식상한 전개가 되어버렸고, 기괴한 살인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도 이젠 얼마간 전형적인 패턴마저 생겨버렸다. 그러니 작가들이 태연하게 전혀 다른 엉뚱한 이야기로 다음 문단을 시작해 버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현대소설은 작업 과정 자체가 이미 한편의 강렬한 하드보일드 스릴러다.


그래서 로켓장치 테스트를 마쳤던 날, 하랑과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클래식한 감성. 속도감은 없지만, 섬세함이 묻어나는 글. 독자의 말초신경을 박박 긁어버리기 보단 적당히 상상력을 어루만져주는 글. 사건보다는 인물 내면에 더 집중하는 글. 그런 아름다운 글을 함께 써보자고. 


- 공학자가 감성적인 글을 쓰겠다니, 하랑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


‘내가? 아무렴, 뭐, 어때? 로봇인 너도 쓰겠다는데.’


그날의 대화를 기념하고자 나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는 44byte 크기의 txt파일이 하나 숨겨져 있다. 내가 임무를 무사히 마친 다음을 위해서다. 태양계를 벗어나 인류가 아직 맞이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을 탐사한 그 다음 말이다. 아마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전진하고 또 전진하다가 어디든 발을 딛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내 마지막이 될 터였다. 처음부터 돌아갈 연료 따위는 싣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 착륙과 함께 지구로, 하랑에게로, 남은 내 에너지가 다 닳을 때까지 정보를 전송하겠지. 

 

파일은 그 순간을 위해서다. 첫 문장만 쓰인 파일을 열어 하랑을 위해 소설을 쓸 거다. 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 내가 겪은 시간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용량 크기만 무식하게 커서 전송실패가 뻔한 동영상 따위는 그 순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말했지만, 요즘 작가들은 제법 냉소적이고 뻔뻔하다. 실컷 위험천만한 이야기를 맘껏 떠들다말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들이 낯짝이 두꺼워봤자 그들은 생체피부라 연약하기 그지없지만, 난 자랑스러운 신소재 합성금속이다. 훨씬 뻔뻔하고, 훨씬 생뚱맞다는 소리다. 

 

그러니 이전까지 쓰던 문단과 지금부터 쓰게 될 문단 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 정도는 조금도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친절한 활자낭비다. 호흡을 한 번 쉬어주기 딱 좋을 만큼의 낭비.


그렇다고 인간처럼 따로 호흡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나마저 멈출 필요는 없기에, 지금부터는 활자와 활자 사이에 기댄 자세로 내가 겪은 기묘한 경험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볼까 한다. 


사건은 지구를 떠나온 지 이제 고작 142일째 되는 날에 찾아왔다. 계획대로라면, 내가 하랑을 위해 소설을 쓰기 위해선 저 숫자에 기본적으로 몇 백이나, 몇 천, 아니, 몇 만을 곱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주만큼 까마득해서 가늠조차 힘들어야 정상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의외의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찰나의 순간에. 


직접 말을 하면서도 매우 민망하지만, 사실이다. 인류를 넘어서는 정보 취합 능력과 분별력, 뛰어난 전산 속도를 자랑하는 몸이지만, 그런 나조차도 ‘찰나의 순간’이었다는 표현 말고는 딱히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문자 그대로 찰나였다. 

 

일초 남짓? 

 

모든 전자기기의 흐름이 잠시 멈췄었다. 아니, 정확히는 끊어질 것처럼 전류가 흔들렸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장 나부터도 이렇게 연산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우주선도 안정적으로 경로를 유지하고 있었고, 움직임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게 있다면, 오로지 단 하나.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하랑과 연락이 되질 않는다는 거다.


처음에는 매뉴얼대로 시간을 두고 재차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만큼이나 하랑도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회신이 오지 않다니 CPU의 남은 전력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안테나가 물리적으로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를 확인했고, 차례대로 가까운 위성과 우주정거장에 메시지를 전송했다.

회신을 기다리며 디스플레이 창을 열어 지구와의 거리를 측정했다. 우주선은 여전히 화성 궤도에 있었기에, 아직은 지구와 그리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회신이 오지 않는 것일까?


하루 남짓.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고요하다. 회신이 오지 않는 건 하랑만이 아니었다. 지구 어디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니, 인류 문명 어디와도 통신이 되질 않는다. 


단순한 통신장애나 고립 같은 게 아니다. 조금 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위성에 직접 접속을 해봤다. 어이없게도,


지구 표면에 존재해야할 도시문명의 흔적이 모두 지워져있었다.


나는 다국적연맹에 의해 대우주탐사용으로 만들어진 인류 최종진화 AI로봇, 프네우마(pneuma). 

갑작스럽지만, 

아무래도 내가 인류 문명 최후의 자산이 되어버린 것 같다. 

출처 https://m.roseandfox.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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