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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때 이미 대운하 계획이?
게시물ID : freeboard_2852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향숙이ㆀ
추천 : 0
조회수 : 14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8/02/09 21:45:11
한강에서 남대문까지 배 타고 다닐 뻔했다 

서울 특별시의 상징 로고에는 산과 강이 그려져 있다. 바로 북한산과 한강을 나타낸다. 세계의 대도시 가운데 이처럼 도심에서 가까운 거리에, 이처럼 크고 웅장한 산이 있는 곳은 별로 없다. 그리고 한강은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강 가운데서도 아주 큰 편에 속한다. 비록 공해에 찌들어 있지만 서울 주변의 산들과 한강은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자 자연의 축복이다. 
반면 서울에 한강밖에 없는 것은 자연 환경의 탓이 아니다.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서울을 운영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져야 한다. 한강처럼 큰 강이 흐르는데 그 지류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정말 드문 경우다. 운하의 도시라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까지 가지 않더라도 파리·베를린·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는 큰 강의 지류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 크고 작은 운하로 연결되어 생활의 편리함은 말할 것도 없고 운치 있는 환경까지 제공해 주고 있다. 왜 안양천은 말라 붙고 탄천은 썩어 가고 청계천은 아스팔트로 감춰져야 하는가? 한강이란 보물은 왜 가지 없는 나무처럼 앙상한 본류만으로 서울을 관통하고 있는가? 
서울의 도심에 배가 다닐 뻔한 일이 있었다. 태종 13년(1413) 7월 20일의 「태종 실록」을 보자. 
의정부 좌정승 하윤이 운하를 팔 것을 요청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경기의 군인 1만 명, 서울 안의 대장·부대장 4백 명, 군기감의 특별군 6백 명, 모두 1만 1천 명을 징발해 저수지를 파고 숭례문 밖에 운하를 파서 작은 배를 오가게 하소서.” 
임금이 말했다. 
“우리 나라의 땅은 모두 모래와 돌이기 때문에 물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때문에 중국의 운하를 본받을 수는 없다. 내가 내일 사람들 앞에서 의논하겠다.”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서 의정부에 일렀다. 
“숭례문에서 용산강에 이르기까지 운하를 파서 작은 배를 오가게 한다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모래땅이므로 물이 늘 차지 못할까 의심스럽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옳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의정부 찬성사 유양만이 반대했다. 
“용산강은 도성에 가까운데 어찌 백성들을 괴롭히겠습니까?” 
지의정부사 박자청이 말했다. 
“땅은 모두 무논이니 반드시 새지는 않을 것입니다. 산을 뚫고 땅을 파는 데 들어가는 일은 1만 명의 한 달 일을 넘지 않으니, 시험해 보소서.” 
임금이 인력을 쓰는 깊은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일을 정지하고 시행하지는 않았다. 
찬성론자들은 남대문 밖이 모두 논이므로 물이 바닥으로 새는 것은 문제가 아니며,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할 때 운하를 파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몇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서울의 개천을 파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동원에 따른 부담이 컸다. 남대문까지 운하가 만들어진다면 자연히 청계천과 연결되고, 이 하천을 더욱 넓게 파면 서울 도심에 배가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들인 노력을 서울의 운하 파는 데 썼다면, 그 후손들은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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