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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아... 왜 사는 건지 모르겠다. 썰이나 풀자.
게시물ID : gomin_11243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진찬
추천 : 2
조회수 : 204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6/17 02:00:00
그냥 신세 한탄이니....
빛이 수억이나 있는 거도 아니고, 자살 할 이유도 없으므로 오해마시길...

제가 고교 때부터 모든 게 시작이였을 겁니다. 당시 케로로중사에 빠져있던 나에게 쵸비츠라는 애니를 추천해 줘서, 그 이후 일본이란 나라를 생각하게 됬건가? 뭐... 입덕하게 해줘서 좋은 취미를 갖게되었으니 그 것에 대한 원망은 없음.
당시 공부를 하는 거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핵교다니다가 어디서 본 거였는지... 
내용인 즉 "일본은 아르바이트 1시간하면 울 나라 돈 만원을 준다" 라는 것. 

당시 나는 '아니, 씌1X 똑같은 설거지를 해도 일본에서 일하면 만원, 울나라에서 하면 4천원이라니?'라는 문화충격을 느꼈습니다. 그 후 였을까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다짐한 건. 
그 당시 제 논리로는 "그럼 당연히 일본에서 일하는게 좋은 거 아님?" 이란 생각이였을 겁니다.

원래는 서든초딩의 밀덕기질도 있어서, 물리나 화학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 때 장래희망이 총이나 미사일, 탱크 만드는 사람이 되자였으니까요.

그 후 질산나트륨? (지금은 문과계열이라서 까먹었네요.), 외 이것 저것 넣으면 화약이 된다거나, 글리세린에 XX을 촉매로 XX과 반응시켜 니트로화하면 좋은 것이 만들어 진다거나 TNT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친구가 과학 부원이라서 도움이 많이 됬네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입니다만....

여튼 한국에 있어봤자 공부도 잘 하는 거도 아니고, 미래가 너무 뻔히 보여서,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유학갈망이 깊어졌습니다.
고3때 부모님께 나는 수능 안보고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물론 반대... 이 때 제가 컨테이너 박스에 타서라도 가겠다, 일본에서 졸라 공부해서 동경공업대학 무기공학과 들어갈꺼임 하고 패기부려서 결국 설득하고 그리 원하던 일본 동경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머리통에 "헤헤 일본에서 아키바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있고, 알바하면 돈도 많이 주고 ㅎㅎㅎ 공부만 잘 해서 대학 들가면 낙승~!"이란 생각을.... 지금 생각하면 매우 안이했네요.)

하지만 일본이 좋아서 갔으니 환경은 그렇다 쳐도 도둑놈 룸메 새X와 같은 한국인을 등쳐먹으려는 호로새X들.... 고교 졸업 후 바로 온 일본은 일본인과의 만남은 커녕, 같은 외국인 친구들과 즐거운 히라가나 가타카나 공부.... 끝나면 같은 한국인 등쳐먹을려고 대기타는 브로커 새X들... 역시 사회는 가혹합니다. 초심자에게도 자비를 전혀 베풀지 않네요. 
알바 찾는 거도 우린 외쿸인 안 뽑음, 일본어나 더 공부하고 와라, 군대도 안 갔다온 아 뽑기는 영(한국인가게)...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경우가 유학하는 아이들은 부자아이들이라 하는데, 물론 부자 아이들은 알바 안하고 학교다니고 놀고 먹고 합니다. 저와 동남아아이들은 달랐지만요. 아침, 점심 굶고 학교. 컴퓨터도 없었기에 남아서 교과서 보다가, 저녁 때 200엔 라멘가게에서 후루룩...이 일상이였네요. 엄마에게 돈 좀 보내달라고 하기도 그래서 라면 삼등분해서 씹어 먹거나.... (이 기억 때문에 제가 라면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쏟아날 구멍은 있다고, 일본을 선교하러 왔다는 교회분들 (친절하긴 했으나 저는 기독교를 회의적인 입장이라서)의 홈스테이와 모교회 덕분에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 : 일본에서 종교 진짜 조심하세요. 저는 운이 좋은 케이스) 감사하긴 했으나, 그 놈의 세례, 교회 강제로 끌고가기... 
 일본에 온지 3개월?은 고난의 행군 9개월은 친절하신 분들 (종교쪽에 갈등이 있었지만.... 전 절대 세례같은 거 하지 않고, 교회도 내킬 때나 가겠다는 주의였기에...*하숙하는 주제에 라고 묻게 된다면 할 말 없네요.) 그 후에 종교적 갈등으로 충돌 후 마침 신문장학생(이라 쓰고 노예계약이라 읽는다.)
로 완전히 자취생활로 바꿔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학교 1년만 하고 대학 갈거라는 계획이였지만, 현실은 쉅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학교에서 썩느니 전문학교에서 기술이라도 배우면서 하는게 이득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으나, 결국 어학교 지속.

---1년차
 결국 생활고에 못 이겨, 브로커(이 자도 개X끼)에게 신문장학생을 신청하게 됩니다. 내용은 아사히신문장학회에서 학비를 내주는 댓가와 약간의 월급과 방 제공. 대신에 계약으로 노동. 일본은 신문이 조간(새벽), 유간(오후) 배달로 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새벽에 일어나게 되서 3일간은 불면증에 시달렸네요. 한국사람도 있고 좋았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 좋은 가게에 일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힘들긴 합니다만.) 
들어온 지 일주일 됬나? 신문배달 배우는데 (연수기간 2주일) 토호쿠 대지진................
아스팔트 다 갈라지고, 갈라진 틈 사이로 물(매립지역이라서 아마 해수가 뿜어져 나오는 듯)이 뿜어져 나오고, 건물은 서로 부딫칠거 같이 좌우로 흔들리고... 완전 대공황이였네요. 신문작업하는데 갑자기 점장이 "다들 조용!"해서 뭐지 했는데? 점점 땅이 흔들리는거 같더니, 점점 강도가 쎄지면서, 옆에 가게의 셔터가 내려가서 셔터의 철끼리 부딫치는 소리, H빔하고 시멘트가 서로 긁는 소리, 벽에선 삐걱ㅃ;걱.... 저는 공황사태여서 아무것도 못하고 점장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점장이 "이건 위험하구만, 앞에 공원으로 도망가자" 해서 다들 ㅌㅌ
사람들이 다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고, 여성분들의 비명소리가 재난영화를 방불케 했습니다. 근데 빠징코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큰 지진이 났는데도 안 도망 가더라고요. 도박이란 무섭습니다. 제 친구는 당시 다른 데에서 놀고 있다가 지진나서 모든 교통편이 올 스톱되서 35Km를 걸어갔다라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진짜 무서웠네요. 일본인들의 미친 듯한 사재기로 대형 슈퍼는 물론, 편의점, 심지어 자판기까지 모든 물건이 사라졌습니다. 있는 건 소금, 후추, 잡지책.... 신문 호외 돌리고 해서 고생은 했지만, 급여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 후 후쿠시마사태라던지 있습니다만, 아직도 거주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쪽 애기는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저도 후쿠시마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봅니다. 엄청 많이 유학생들이 나갔고, 지금도 한국인 유학생의 숫자가 매우 적어졌습니다. 

대지진 후 여진이 계속 됨에 따라 지진멀미에 계속 땅이 흘들리는 거 같았던 건 꽤나 오래 갔네요.

여튼 생활은 여유가 생겼습니다만, 그 만큼 공부할 시간이나 피곤함에 어학교 성적은 전교급에서 점점 떨어졌습니다. (사실 성적보단 출석률이 큰 문제...) 그래도 수험준비는 나름대로 했습니다만, 갑자기 한국의 어머니에서 부터 아버지가 암이라는 애기를 듣었습니다. 저는 암정도야 그 나이면 발견 되는거니 금방낫겠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굉장히 낙천적인 병신이네요.) 겨울 쯤에 한번 한국 들어가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예전의 장난기에 주말이 되면 놀러가자라고 하던 분인데... 지금은 쵀장?이 소화기 계통이라서 그런지 삐적말라보였습니다. 이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습니다. 왜냐면 아프리카의 기아난민처럼 뼈만 남았으니까요. 겉으로는 "아빠 나 쫌있으면 수험하면 대학 붙을 껀데 입학식 와야지?", "잘 먹고, 약 꾸준히 먹으면 분명 괜찬을 꺼야!" 하고 아버지를 주물러 드렸습니다. 간까지 전이 됬는지 황달에 수족이 퉁퉁 부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온 저에게 약한 모습 안 보이실려는지 "티비 좀 고쳐놔라! 영화나 보게" 하고 항상 집에 있던 거 처럼 말하셨지만, 저는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픽카드가 문제인지, TV카드가 문제인지 수신이 원활하지 못했거든요. 엄마는 죽이라도 먹어보라고 하지만 한스푼 삼키자마가 바로 개워냅니다. 겉으로는 괜찬을 거야 했지만, 속으로는 얼마 안 남은 것을 사시미 칼로 쑤시듯이 느낄 수 있었거든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제 보물1호의 기타에 싸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이였을까요.... 
 그리고 일본유학시험결과는 나쁘진 않으나, 국립대를 가기에는 아슬아슬한 성적이였습니다. 그래도 수험 계획에 국립대 수험도 일정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본고사 하기 몇일 전인 알바끝나고 아침의 전화, 아버지가 임종이라고 어머니는 우는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저는 쓰레기였을 지도 모르네요. 전에 겨울에 왔을 때의 컴퓨터의 테레비도 못 고치고, 장남 주제에 임종을 곁에 있어주지도 못 했습니다. 겨울에 왔을 때 계속 한국에서 옆을 지키는게 옳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후회하면 뭐합니까... 이미 끝난거, 그래도 동생 녀석과 옴마, 친지 분들도 같이였으니 용서해주세요. *어짜피 내일되면 일상생활에 치여 까먹을 것,.) 엄마 말로는 지금 무의식에 간신이 숨만 붙이고 있으니 짤리 전할 말 있으면 전하랍니다.
'예전에 아빠가 술 마시고 오면서 오바마랑 나랑 동갑인데,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고, 나는 뭐꼬...라고 한 적 있지.... 나는 아빠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울 형제 키워주고... 테레비에나 나오는 놈보다 아빠가 더 대단해.. 그러니까 내가 지금 바로 한국 갈거니까. 쫌만 버티면 안되...? 아, 엄마 더 이상 붙잡지 말라고...? 응... 어빠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하지만 수화기 건너편은 조용했습니다. 제가 한 말은 다 듣었을 까요? 엄마 말로는 마지막은 미소를 짓으면서 가셨다고 하네요. 보통 사람이 죽으면 힘이 풀려서 미소를 짓는 거 처럼 보인다라는 애기를 듣은 적은 있으나, 진짜 미소였겠지요....?

그리고 저의 본고사 수험은 끝이 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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