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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 되기 전에 죽을거라 생각했다.
게시물ID : gomin_15971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Z2dnb
추천 : 10
조회수 : 442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2/27 20:26:25

나는 아홉살때 처음 죽고싶다는 말을 했었다. 비밀일기장에 썼던것같다.
내가 아홉살 때 엄마는 내 일기장을 손에 쥐고, 나를 가리키며 아빠에게 "아직 아홉살밖에 안된 애가 죽고싶다잖아!" 라며 소리를 질렀다.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울었고,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몇년을 건너 뛰어서, 열 세살의 나는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학교 가기 싫고 같은 반 아이들이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그게 내탓이라고 했다. 내가 살갑지 않아서라고 했다.
밤이 오면 아침이 다가오고,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고
조별 수행평가를 위해 조에 들어가야할때는 자존심이 상해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내가 고개를 숙인 그 다음날 영어선생님이 다른반에 조를 짜기 어려워하는 친구가 쪽지를 보냈다며
모든 반의 조를 번호 순으로 짜겠다며 이야기 하던 때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것 같았다.
친구들과 조를 짤 수 없게 된 다른 아이들은 불만을 제기했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불만이었다.
왜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해서 스스로 머리를 숙였느냐와, 내가 그렇게 비굴하게 머리를 숙였는데 그게 헛된 일로 돌아가서 였다.
그때 조에 들어가기 위해 내가 했던 말은
"아무것도 안할께. 내 의견 하나도 안내세우고 너네가 하자는 노래 할게. 너네한테 피해 안가게 혼자 알아서 연습해올게. 조에만 끼워줘"였다.
영어 수행평가는 조별로 나와서 팝송을 부르는 거였다.
번호순으로 조가 갈린 후 우리조에서는 나만 A+를 받았다. 그래서 또 욕을 먹어야 했다.

열 네살의 나에게 엄마는 "그러고 사느니 나같으면 차라리 혀깨물고 죽겠다"라는 말을 했었다.
엄마는 아마 기억도 안날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안난다. 내가 잘못해서 엄마에게 혼나는 상황이었겠지만.
상황은 흐릿해도 저 말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중학생때의 나는 내 스무살과 그 이후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스트레스와 압박에 죽어버릴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열 여섯살의 나는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린 창 너머로, 베란다를 통해 엄마가 할머니에게 내 이야기를, 거의 내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베란다 문이 열려있어서 부엌에서의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는걸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열 여덟살 여름, 나는 모의고사로 전교에서 2등을 했고 반에서는 1등을 했다.
국영수탐 합계 백분위가 99 가까이 나왔었다.
엄마 아빠는 당연하다는듯 별일 아니라는듯 받아넘겼다.
나는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고했다, 잘했다. 이런 말이 그렇게 아깝냐며 울며 소리질렀다.

열 아홉살, 오랜 시간 가져왔던 꿈을 포기한 나는 퓨즈가 끊어진 상태와도 같았다.
나는 학교에서 잠만 잤고, 고삼이지만 성실히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해온게 있어서인지 모의고사 만큼은 매번 전교권에 들었다.
우리 학교가 공부를 잘하는 학교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겠다.
내가 학교에서 잠만 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두달이 넘도록 나와 대화를 하지 않았고
엄마는 어처구니 없다는듯 헛웃음만 지었다.
수능을 두달 앞두고 부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해를 해봤다.
처음엔 무서웠다. 그래서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그었다.
한번 힘조절에 실패해 피를 본 이후부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수능 성적은 학교에서 7등이었다. 그렇지만 서울 소재 명문 대학에 가기엔 택도 없는 점수였다.
재수를 할 마음이 딱히 있던건 아니었지만 아빠의 시선에 결국 나는 재수를 택했다.
내가 원해서 한 재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무살의 첫 날을, 1월 1일은 나는 재수학원에서 맞았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자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울었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죽어버릴줄만 알았는데, 그 전에 스스로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을 꺾어버릴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무사히 스무살이 되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울어서 빨개진 눈과 코를 집에 오는 길에 찬바람을 맞아서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야했다.

스무살 늦여름, 나느 다시 커터칼을 들어야 했다.
사고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내 엄지손가락을 무딘 칼날로 그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칼날이 무뎌져서 아무리 세게 그어도 손에 상처가 나지 않았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다시 자해를 했다.
칼로 손을 긋는 때도 있었고, 밤에는 나도 모르게 피멍이 들 때까지 윗팔과 허벅지를 미친듯이 긁었다.
늦여름, 에어컨이 춥다는 핑계를 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팔에 남은 피멍을 항상 집업으로 가릴 수 있었다.
학원에 심리상담사가 매주 오기 시작한 후로, 아마 내가 가장 많이 상담쌤을 만나지 않았나 싶다.
상담쌤은 나에게 우울증 증세가 있다고 그랬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재수를 버티지 못했을거다.
9월 모의고사가 끝난 후 답답한 마음에 홀로 맥주 한캔을 들고 한강을 찾았을때, 그 날이 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을거다.
수능만 끝나면 답답함도, 자해도 더 하지 않겠지. 더이상 스트레스도 받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매일을 버텼다.
매일매일 도망가고싶다며 책 한구석에 노트 한구석에 적었다.

두번째 수능이 끝난 후, 수시 발표에서 나는 내가 원서를 넣은 학교 중 가장 낮은 학교 하나에만 합격을 했다.
사실 정시로도 갈 수 있는 대학이었다.
나는 5%에 든다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아빠는 더 상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점을 티나게 아쉬워했다.
문자로 합격 소식을 전했을때 아빠가 한 말은 '응 축하. 다른학교는 아직 발표 안났어? 더 기다려야해?' 였다.
6개 학교가 모두 발표를 마친 날 밤에 나는 미친듯이 팔을 긁으며 자해를 했다.
수능이 끝났다고 해서 답답함도, 자해도 사라지는건 아니었다.
삼수할까 라며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렇지만 아빠는 내가 서울대에 가도 만족하지 못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절대 만족시킬수 없는 기대감의 벽을 느껴야했다.

나는 지금 스물한살이 되어있다.
한때는 절대 도달할 수 없을거라 생각한 나이에 와있다.
과거의 일기장을 열면 "나는 스무살이, 아가씨가 될 수 없을것같다."라는 말이 써 있는데
지금 나는 스무살을 넘어 스물 한살이 되어있다. 심지어 며칠있으면 대학생으로써 첫 개강날을 맞이한다.
아직 내 팔엔 피멍 자국이 있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내 사소한 행동을 트집잡는다.
내 말투가 퉁명스럽다며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엄마 말이 더하다며, 왜 나한테 늘 하대하듯 이야기하냐며 따져도 소용이 없다. 엄마는 내 말에서 듣고싶은것만 듣는다.
엄마는 쇼파에 누워 하루를 보내도 되지만 나는 안되나보다. 내가 하루종일 쇼파에 드러누워 있으면 나는 혼이 난다.
저번에는 심지어 내 말이 짜증이 가득하다며 장식장 위에 어떤 물건을 가리켜 확 그냥 내 머리에 집어 던지고싶다고 까지 이야기했다.
아빠가 조용히 내게 엄마한테 조금만 더 살살 말하라며 이야기 하자 나는 그럼 딸 머리에 뭘 집어던지고 싶다고 얘기하는건 잘한거냐고 따졌다.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샤워하며 또 정신없이 팔을 긁으며 울었다.
집에 있으면 답답하다. 내 방조차 이제는 불편하다.
내 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그에 맞춰서 심장도 쿵쿵 뛴다. 또 무슨 말을 들을까 무서워서 긴장한다.

엄마에게 묻고싶다.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선택권이 생긴다면
또 나를 낳을건지, 아니면 다른 아이를 낳을건지.
반대로, 만약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있다.
나는 그냥 태어나지 않는 쪽을 택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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