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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하루
게시물ID : gomin_17641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ZmRmZ
추천 : 7
조회수 : 7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1/13 23: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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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서는 시간이 평소 출근시간보다 늦자 혈육이 묻는다.
늦은거 아니야?
택시타고 가면 괜찮다고 나는 말한다.

택시비 같은게 내게 있을리 없다.
대충 예전 일터가 있던 동네를 가는 버스를 타고,
정거장에 내려 근처에 있는 아무 카페나 들어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키며,
일단 한잔만 먼저 주세요, 라고 점원에게 말을 건넨다.

혈육의 신용카드를 원조받으며 사는 지금의 나로썬,
그마저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신세다.
사용하는 족족 혈육에게 결제내역 문자가 날라가기에.
오늘은 출근이 살짝 늦었으니, 미안한 맘에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커피를 쐈다 하면 대충 속을 일이다.

두 잔을 연달아 시키면 한잔은 얼음이 녹아 결국 맹탕이 되기 일수니
한잔만 우선 시켜 조용히 마신다.
아직은 한산한 카페 안. 나는 가만히 알바ㅇㅇ 앱을 실행한다.
여러 업체들의 공고들을 쭈욱 내려 보다가 최근까지 일했던
업장의 새로이 업데이트된 공고가 눈에 띈다.

'가족같은 분위기, 함께 성장하실 근면 성실한 분.'

지랄하네... 라고 난 속으로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카페안이 조금 소란스러워 졌다.
그 사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는 나머지 한잔을 다시 받아 내곤 조심스레 마시며,
카페안의 손님들을 조심스레 관찰한다.
나 처럼 혼자인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커플 둘이 방문하여 바로 내 옆 둘이 앉기엔 퍽없이 좁으나
업장 입장에선 테이블 수를 늘려야 하니 누가봐도 어거지로 
쑤셔박은듯한 2인석에 자리한다.
제기랄, 하필이면 겨울이라 옷도 두껍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나는 자리를 뜬다.
어차피 번잡해진 분위기가 싫었으니.
기다렸다는듯 내가 앉아있던 두개의 테이블 중 하나를 떼어
자신들의 쪽으로 붙히는 커플들을 뒤로한채 나는 황급히
그곳을 나섰다.

다행히,
혼자 시간 보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대충 대형 몰 안에 들어가 층마다 돌며 아이쇼핑을 하면,
적어도 반나절은 보낼 수 있다.
그러다 문득, 사용하던 통신사의 맴버십 혜택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고맙게도 한달에 한번 공짜 영화를 볼 수 있더라.
나는 그나마 가까운 시간대에 상영하는,
딱히 궁금치도 보고싶지도 않던 영화를 예매한다.
물론 내 돈주고는 절대 보지 않았을 영화였지만,
공짠데 이게 어디야 싶었다.

영화는 그럭저럭 시간죽이기엔 충분했지만,
러닝타임은 충분히 길지 못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담배도 필겸.
담배 한대를 물고나서,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이내 관뒀다. 일요일 오후, 다들 피곤하고 지친 심신을 좁은 공간에서
그나마 쉬고있는 이들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 친구들 중 사정이 딱히 나은애들도 없었다.
개운하게 술 한잔 얻어먹을 수 있는 새끼들이 없구나, 깨달은 나는
그냥 전화하기를 관두곤 대형 몰 지하에 있는 서점에 들른다.

마감시간은 열시, 대충 시간을 떼울 순 있겠다 싶었다.
치열한 자리 경쟁끝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하루키의 소설 하나를
집어든다.

사실 1Q84를 읽고 싶었지만 1권은 온데 간데 없고 2권만 자리하길래
그옆에 있던 세상끝의 뭐였더라.. 하드보드? 아무튼 그걸 집어들곤,
차분하게 읽어내려 가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화자가 섹스를
언급한 그 구절을 처음 읽은 순간 속으로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내 그럴줄 알았다. 하여튼 색정광 노인네 같으니라고.
하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차다가 문득,

나는 왜 내가 지나온 날들을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차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럼 그렇지, 라고 여길 수 있다면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거 아니야? 왜 막연히 막상 살아놓고, 보내놓고,
미리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들을 이미 저질러 놓곤 마치
남일인냥 그럼 그렇지, 하고 있는거야? 그 누구도 아닌 너의 일이고,
너의 사건인데??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나는,
그만 책을 덮어버리곤 천천히 귀갓길을 나선다.
귀갓길 도중에 있는 먹자골목을 지나칠때의 맛있는 냄새에
배가 꼬르륵 거렸다. 오늘 하루종일 커피 두잔이 전부였구나.
배고프다.

대충 걸어가다가 혈육이 알고있는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
순대국에 소주 한병이나 먹어야겠다.
설마 밥먹은 걸로는 잔소리같은거 안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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