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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전상서
게시물ID : gomin_17685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cm9mY
추천 : 10
조회수 : 50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9/04/21 0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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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유눈팅을 종종 즐기는 여징어입니다.
고민상담을 위한 글은 아니고, 
어딘가에 뱉어버리고 싶은 속내가 있는데
쏟아낼 곳이 없어서 이곳이 대나무숲이려니 하고 몇자 적어봅니다.



chapter 1.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참 많은 문제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술 여자 도박 폭력 범죄 사기 돈문제 등..
사연을 전부 나열하자면 밤을 새고도 모자랐지요.
드라마에 나오는 웬만한 나쁜놈은 감흥이 없을정도였습니다.

어릴때부터 집에는 거의 들어오는 일이 없었고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별거가 시작됐습니다.
여자가 많았기에 여기저기서 지내셨거든요.
저는 차라리 별거가 반가웠어요. 엄마가 맞는게 싫었거든요.
저희 자매를 엄마가 갖은 고생을 하며 키우셨습니다.
엄마의 곧은 인성 덕분에 풍족하진 않지만 저희는 올곧게 자랄 수 있었구요.

그렇게 20대가 되었고 저는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에 돈벌이에 집착했고
20대 중후반즈음 모은돈으로 학교도 졸업하고 동생 학비도 종종 보태줄 수 있고
시집갈 돈도 어느정도 모아놨고
나름 열심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chapter 2.

아버지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안부차였는데 그 뒤로 종종 통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당시에 아버지가 시작한 사업이 있었는데 
제 전공분야 관련해서 자문을 구하려하셨어요.
비지니스적인 통화였지만 저는 그마저도 반가웠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어릴적부터 비어있던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결핍이 항상 있었거든요.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제게 일을 같이 할 생각 없냐고 하시더라구요.
솔직히 기존 매출보다는 올릴 자신이 있었습니다. (잘 아는 분야였고)
다만 아버지 사업방식을 알기때문에 같이하는게 조금 꺼려졌지요.
(매입매출 이런거 생각안하시고 들어오는 돈 족족 다 쓰고,
사업을 점진적으로 키우는게 아니라 뻥튀기식으로 늘리려는 스타일)

당시에 저는 일을 잠시 쉬고 휴식을 가지려는 시기였습니다.
마침 집 계약도 끝나서 이사도 해야하는 상황이였구요.
아버지 옆에서 돈벌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포기했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어머니께 상담했더니 네가 아빠랑 못누려본거 지금이라도 누려보라고 하시더라구요.



chapter 3.

그렇게 저는 아버지 곁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순탄했습니다.
어느정도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예전 습관이 다시 나왔고
말도안되는 이상한 사업을 자꾸 벌이거나, 사고를 치기시작했습니다.
폭행문제로 합의금을 물어주기도 하고
이상한곳에 투자하느라 돈날리기도 하고
주변 사람에게 투자권유를 해서 사기로 소송당하기도 하고..


결국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하고,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나 빚이 눈덩이처럼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인건비나 거래처 대금결제도 문제가 생기면서
제 개인돈이 들어가기 시작했구요.
와중에 아버지는 대출도 어마어마하게 받고
저 몰래 중간거래처들한테 받은 수수료나 대금을 빼돌렸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악의를 가지고 저에게 사기를 친건 아니였습니다.
본인이 욕심을 부리다가 상황을 악화시킨거지요.

자세한 상황을 모두 기재할 순 없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도 아버지도 빚더미에 올라가있더라구요.
사태를 막지 못한 저도 잘못이겠지요. 수습하려 했는데 역부족이였습니다.
수년간 모아온 돈은 전부 날라갔구요. 
아버지가 제 명의로 사채까지 받아썼습니다.

공과금 한번 밀려본 적 없던 제게는 너무 힘든상황이였습니다.
매일밤 악몽에 시달리고 잠을 2시간 이상 연이어 잘수가 없더라구요.
머리숱 많은게 컴플렉스였던 제게 스트레스성 탈모가 와서 머리숱이 반이 날아가더라구요.



chapter 4.

매일 잠들면 깨고싶지 않은 고통속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건 남자친구였습니다.
이해심도 많고 쿵짝이 참 잘맞는 사이였습니다.
만나면 즐거웠기에 잠시라도 힘든일을 잊을 수 있었죠.
아버지 때문에 결혼을 두려워하던 제게 결혼할 마음을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했죠.

그런데 제 상황이 너무나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파산신청 상태고 집과 사무실에는 딱지가 붙고
저도 신용불량자에 채권추심에 소송도 들어오는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결국 아버지 곁을 도망치듯 떠났고,
하루에 2~4시간씩 자며 평일주말없이 돈을벌고 빚만 갚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연애같은게 제대로 될리가 없지요.
데이트는 커녕 통화조차도 힘들었고 통화도중에 잠든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지요.

남자친구가 아무말 없이 이해해주는게 오히려 더 미안했습니다.
메뉴판을 보며 우물쭈물 하고 이핑계저핑계 만남을 회피하는 절 위해
공원에서 데이트를 한다던지 계산을 미리 해버린다던지
제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안보이는 배려를 많이 했습니다.
움직이는거 싫어하는 놈이 손잡고 걷는 데이트가 로망이라고 말해주더라구요.

그렇게 예쁘게 잘 만났나구요?
아니요.. 헤어졌습니다.
연애해보신 분들은 알거에요. 좋아하는만큼 줄 수 있는게 없을때 참 힘든거.
만나면 좋은감정보다 미안한 감정만 자꾸 드는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남친도 당시 이직을 위한 취준생이라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또 내 상황이 몇년안에 해결될지도 모르고 평생 따라다닐지도 모르는데
결혼으로 이사람에게 피해를 주는것도 두려웠고,
잠도 거의 못자는 상황에서 스스로가 몸도마음도 난장판이였습니다.
일상이 망가진 상태에서 연애도 힘겨웠던 저는 그사람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앞에선 마음이 식은척 하며 매정하게 말하고 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chapter 5.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를 스스로에게 세뇌하며
인간관계를 일절 끊고 돈을 벌어 빚만 갚아나갔습니다.
저와 아버지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종종 오는 연락도 도움요청이나 돈빌려달라 소리 뿐이여서
저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오는 연락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가 연락을 받지않자 아버지가 문자를 남기셨더라구요.
제 앞으로 온 청구서가 아버지 주소로 날아갔고 그걸 알려주시더라구요.
그것도 물론 아버지의 빚이였지요. 제 이름으로 되있었을뿐.

삶에 지치고 이별의 아픔으로 벼랑끝에 서있는 기분이였던 저는 아버지에게 퍼부었습니다.
해준 게 없으면 뺏지나 말지 얼마나 더 내가 바닥을 쳐야 멈출거냐고 했죠.
이럴 줄 알았으면 아둥바둥 살지나 말걸,
나도 먹고싶은거 다먹고, 입고싶은거 다사고, 여행다니고 데이트하고
가끔은 사치부리면서 그렇게 살고싶었다고.
내가 아빠한테 뭐 바란적 있냐고.. 그냥 다른 부녀처럼 지내고 싶었다고.
남들처럼 사는게 그렇게 어렵냐고 말이죠.

아버지는 침묵으로 답하셨습니다.
둘다 오랜 침묵끝에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셨고 통화를 끝냈습니다.
막상 뱉고나니까 후회스럽더라구요.



chapter 6.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요.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군요.
병원까지 가면서 불길한 예감이 틀렸기를 되뇌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아버지는 예상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참... 야속하더군요.
어쩜 이리 가는길까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가는날까지도 이렇게 못나게 가야했는지..
장례식장에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했던 나날은 생각이 안나고
제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했던 말들만 계속 떠오르더군요.
아무리 미워도.. 그러지말걸 그러지말걸..

그때의 기억이 2년이 지난 지금도 저를 가끔씩 괴롭히네요.
엄마에게도 동생에게도 친구에게도 할 수 없는 얘기가 되버렸어요.


덧.

아빠, 나 아빠 참 많이 미워했어. 그런데 또 많이 사랑했어. 진짜로
그곳이 더 편하고 행복해서 간거라고 생각할게. 생일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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