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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테러조직 백의사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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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현추
추천 : 5/6
조회수 : 5860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10/20 12:28:00
 
백의사는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파업, 암살, 테러활동에 맞서 좌익들을 테러하던 극우 테러조직이었다. 백의사는 김구, 신익희, 유진산의 후원을 받아 활동했지만 백의사의 실제 리더는 염동진(본명 : 염응택)이었다.
 
염동진은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에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은 김구와 장제스 회담의 결과로 설치된 학급으로 임정의 지도하에 있었다. 염동진은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만 1936년 일본 관동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관동군에 협력했다고 한다.
 
염동진은 1943년에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점조직 형태의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한다. 하지만 이 단체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해방 후였다.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소분자들의 매국적 행위에 분괴한 염동진은 현준혁 암살 등 북한 지역에서 반공테러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점차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서울로 월남하였고 이후 대동단을 중국 국민당 계열의 테러조직인 남의사를 본떠 백의사로 개칭했다.
 
이들은 임정의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공산분자에 대한 테러를 전개하였는데, 박헌영 납치 시도에 이어 김일성 등 북한의 주요 요인에 대한 테러를 수차 감행하였다. 강준만에 의하면 백의사에 의해 김일성에 대한 테러가 3차례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가 관여되었다고 한다. 단원들은 경찰, 국방경비대, 노동계 등에 들어가 좌익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으로 각종 좌익 활동에 테러 등으로 대응하였다. 백의사는 미군 방첩대 CIC와 정보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남한 정치지도자들도 암살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인데 당시 미군정은 세 사건 모두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다. 최근 연구들에서도 김구가 김일성 등의 암살, 테러와 함께 국내 요인 암살에 관여한 것으로 규명되고 있다.
 
염동진은 1947년에 주한미군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영문 서신을 보냈는데
" ...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실리 보고서에 의하면 “염동진은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라고 하였다. 즉, 염동진은 영미식 민주주의자인 이승만보다는 국가사회주의 성향의 김구를 지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 수립 후 백의사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백의사의 테러 활동을 강력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는 백의사 소속이었으며 또한 미군 방첩대 CIC 요원으로 밝혀졌다. 안두희의 백범 저격에 백의사가 개입하였음은 명확해 보인다. 백범이 우익 지도자로부터 정치적으로 변신하여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공산당들과 연대한데 대해 백의사로서는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염동진은 백범 암살 이후 완전히 폐인이 되었고 정신분열을 앓다가 6.25때 피난조차 가지 못하고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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