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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신의 패기에 대한 반론 입니다. (수정)
게시물ID : history_122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33
조회수 : 6962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3/10/22 10:35:17
일단 대강 찾아보니 인터넷에 뽐뿌라던가 픞래쉬24? 엠엘비파크와 같은 다른 사이트에도 많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러나 이 글은 검증이 안된것이 확실해 보여 고려사, 송사 등의 사료나 RISS의 자료들를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실제와는 내용이 좀 많이 달랐습니다.

뭐 이런 이유도 있고 역사 게시판에 다른 분들이 좋은 글을 올려주시면 좋을텐데 게시판이 좀 정체되있는것 같아 떡밥?을 풀어봅니다.


1.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도착함. 송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림.


근데 송나라 연호를 안 씀. 갑자 씀.
소동파가 ㅈㄹ함. 명목상 조공국인데
고려사신도 짜증내다가 걍 당나라 연호(윙? 다..당나라 연호?)로 합의보고 대충 마무리..;;
고려의 공식 반응 -> "ㅅㅂ 존나 쪼잔하게 떽떽거리네"

반론입니다, (이하로는 생략할텐데 회색이 원글이고 검정이 반론입니다.)

고려가 갑자를 쓴 경우는 오로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정세가 혼란스러워 어느 연호를 쓸지 정하지 못했을때 뿐이지요.

그 외에는 중국을 따르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고려가 연호를 쓴 시기도 존재는 합니다, 대강 적어보자면

태조 원년 ~ 태조 15년 까지 천수를, 관종 원년 부터 광종 3년까지는 광덕을, 광종 11년부터 광종 13년까지는 준풍을 썼는데 이 3년간은 개경을 황도라 하였고 스스로를 일컫기를 황제라 칭했던 시기입니다, 사족이지만 건원칭제를 한 시기는 광종때뿐입니다, 그나마도 뒤에 송의 연호를 내걸었으며 그 다음 왕인 경종때 황제라는 호칭를 폐기했으니 말입니다.

그 뒤 광종 14년 부터 현종 2년 즉 거란과의 1차 전쟁을 마무리 짓고 강동 6주를 받는대신 칭신을 하기로 하는 조건을 걸고 거란군을 물러나게 만든 시기까지 주욱 송나라의 연호를 씁니다, 요 다음은 거란 즉 요나라의 연호를 중간에 송나라의 연호를 쓴 현종 7년부터 현종 12년까지의 기간만 빼고 주욱 씁니다.

그럼 갑자는 언제 썼나 하면 예종 11년 부터 인종 9년까지 입니다, 이때가 요나라와 금나라의 교체기였지요, 그 다음은 고종 11년 부터 고종 46년까지, 금나라와 원나라의 교체기입니다,  그리고 공민왕 6년 부터 공민왕 17년 까지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 이 세번만 갑자를 쓸뿐입니다.

자 그럼 위의 내용이 원래 무엇인가 보자면 원래는 동란섭필에 기재된 글입니다. 

고려 사신이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이런 글에는 늘 그래왔듯 날짜를 갑자만을 써보냅니다,

그러자 소동파는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라며 편지를 물립니다, 이에 고려의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즉 당唐나라의 연호이라 써서 다시 보냈고 그제야 예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는게 원래 내용입니다.



2. 송나라 사신이 개경에 도착함

사신이 가져온 금은 중 가짜가 있다는 첩보가 들어옴
송나라 사신 면전에서 금은으로 된 알을 모조리 깨봄.
송나라 사신 항의도 못하고 되돌아감.

그런데 다 진짜였음 


아무튼 송나라에 있어 고려가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한 시기는 요나라를 비릇한 강국들이 부상했을때 입니다, 그러니까 고려 문종 이후의 시기이지요, 사실상 사면초가나 다름없던 송나라는 고려와의 관계가 매우 각별하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일은 무리인게, 반대로 고려 역시 송나라와의 관계도 중요했습니다, 

이 역시 동란섭필에 기재된 내용입니다만 음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1090년)원우(元祐) 5년, 2월 17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 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하였다. -


송나라를 면박주는게 아니라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고 보아야 겠지요, 어찌보면 시쳇말로 패기있는 행동은 맞습니다만 첩보에 따라 한 행동도 아니고 그 들이 아무말도 못하는게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려에게는 송나라가 고려를 중히 여기듯, 고려 역시 송나라를 중히 여길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친송정책이라는게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지요.


3. 고려 사신이 개봉에 도착함

조공품을 가져왔는데, 영 허접함.
근데 준비된 하사품은 10배 이상. 대규모 사절단이 다 들고 가지 못할 정도로 많았음.
그래서 고려 사신은 황제의 하사품(그 중에서는 황실에서만 쓴다는 물건도 포함)을 
바로 개봉과 항주에서 팔아버리고 금과 은으로 바꾸어 가져감. ㅡㅡ;;

오늘날로 치자면 우리나라 사절단한테
백악관에서 뭐 선물 줬는데, 이베이에서 팔아치우고, 달러로 바꿔서 가져가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상기의 내용은 잘못된 것으로 일의 진상이 무엇인가 보자면 이렇습니다.

희령(煕寧) 3년 군(郡),현(縣)에서 고려의 사신을 접대했었던 사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 사신이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물과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접근해 올까 염려해 고려사신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왕래를 금지시켰다. 휘(徽)가 이부(二府)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을 내려 시장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값이 비싼) 겸백(縑帛)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했다. 휘(徽)가 또 표(表)를 올려 의약(醫藥)[15] 및 고려 사람을 가르칠 화공(畵工), 소공(塑工) 등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니 아중(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네 송나라에서 고려를 배려한 정책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상당히 잘못된 내용으로 변질된 것이지요.



4. 고려 사신이 뭔가를 요구함

송나라 봉역도. 송나라의 최신 서적 모조리 ㅡㅡ;
심지어 황실 도서관에 있는 몇 개 안 되는 희귀 서적도 달라고 징징댐


근데 줬음

역시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신들이 조공을 하러와서 책도 사가겠다고 한것을 사지 말라고 명이 아니라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 대상도 황실 도서관의 희귀서적이나 송나라 봉역도 같은게 아니라 시장에서 파는 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고려 사신들은 이 말을 무시하고 책을 사갔는데 그 책이 책부원귀 하나입니다, 1천권으로 이루어진 송나라 역대 정치 사적을 모아 기록한 책인데, 왕의 명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희귀 서적은 아니었고 딱히 반출이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곡해한 내용이지요.


5. 그러던 중 고려가 요나라의 연호를 쓰는 일이 생김

고려에서 거란의 연호를 썼다는 소식.
송나라 사신이 따져물음.
근데 욕 얻어먹음
"아 우리 덕에 전쟁 안 하고 살면 됐지...또 뭔 개소리야...
그리고 우리가 요나라 연호 쓰면 그쪽에서 물건 갑절로 사준다고 했엉 그래서 먹고살려고 한거야. 
그리고 우리도 요나라 봉역도랑 몇개 가져왔는데, 니들 그거 봤자나?"
라고 떽떽거림 


송나라에서는 고려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일단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외교적으로 풀어나갈뿐인데 물론 이러한 일은 없었지요.

지도가 고려의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나 그 것이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요나라와 송나라, 고려간의 관계에 있어 요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진것도 아니었고, 고려가 송나라와 요나라의 전쟁을 중재해주지도 않았습니다.



6. 고려 사신이 항주에 도착

대놓고 항주의 관청 창고를 둘러봄(원칙적으로는 중앙에 올라가는 물건이라 송나라 중앙 관리만 검열권이 있음). 
웃긴건 항주의 송나라 관료들이 기어다니면서 고려 사신들을 접대함. 
항주는 이슬람 등 무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각 국의 주요 물품을 둘러볼 수 있었음. 
그거 다 헤집어놓고 나중에 되돌아갈 때 가져갈거니 찜해놓는다고 말해놓고 개봉으로 떠남. 
이걸 소동파가 보고...'저거 대체 어느나라 관리냐? ㅅㅂ 무슨 오랑캐한테 기어다녀?' 라고 한탄해함. 
그리고 황제에게 이걸 상소할꺼라 협박함. 
고려 사신의 답 "그러던가...."
근데 상소는 안 올림 ㅡㅡ; 


이런 일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내용입니다.

소동파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고려 사신의 힘을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동란섭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멋대로 구는 고려의 사신과 그 기세를 믿고 날뛰는 관리들을 엄히 문책한 내용입니다.


7. 그리고 이 일의 가장 시초

귀주 대첩 이후 고려 사신이 송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이상하게도 일본국 사절단, 그외의 남만 여러 국가의 사신들과 함께 들어옴. 그때 요나라 사신도 옴.
(판관 포청천에서 묘사된 것처럼 요나라 사신들은 거만했음)
그 요나라 사신을 계속 능욕한게 고려 사신. 술을 주고 받으면서 요나라 예절에서는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계속 함.
요나라 사신은 벙쪄서 꿀먹은 벙어리...

그리고 일본, 여진, 서하, 안남 사신멤버들이랑 개봉 시내에서 승전 자축 파티 염.
송나라 반응 "이거 뭥미!! 승전 자축 파티를 왜 남의 집 안방에서..."

분명 송나라 수도 개봉부인데...
고려 사신이 묵는 여곽에 다른 나라 사신들이 몰려서 먼저 거하게 파티하고 황제를 보러 감.
물론 진상품의 질도 차이가 남.


단언컨데 잘못된 내용입니다, 아 물론 바른 내용도 있기는 합니다, 고려는 요나라와 송나라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동북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국가를 꼽자면 요나라와 송나라 등과 더불어 고려가 빠질수는 없는 노릇이라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요나라와 고려간의 전쟁은 세 차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화친론을 비릇하여 할양론까지 온갖 주제로 갈피도 못잡던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통일시키고 그 들을 대신하여 서희가 담판을 지었습니다, 요나라가 내줄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 가며 물론 요나라의 강역은 아니지만 강동 6주를 얻어내는 대신 칭신을 조건으로 요나라 군을 물리지요.

물론 이 당시 요나라의 주적은 송나라입니다, 고려와의 전쟁은 단지 후방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 뿐이었습니다, 즉 요나라의 주력이 온것은 아니었습니다.

2차 전쟁에서는 명목상이나마 친정을 감행하며 대군을 끌고 내려오는데, 고려의 주력 부대는 여기서 전멸당합니다, 이후로는 민병들을 규합하고 지방의 군졸들을 끌어모아야만 했습니다, 질적으로 급격하게 하락한 셈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개경이 함락당하고 왕은 몽진을 해야했는데 이때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몽진하던 현종을 동네 아전이 모욕하고, 역전의 무졸들이 왕을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답이 안나오는 일들이지요.

만일 양규 등의 장수들이 깊숙히 진격해온 요나라 군의 퇴로와 병참선을 끊고 죽음을 불사한채 적 후방에서 결사 항전을 펼치지 않았다면 고려는 지워졌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3차 전쟁때는 앞서 2차 전쟁때 소모한 물자와 병력을 보충하지 못하여 철저한 견벽청야를 고집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원인은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무리한 군제 개편에 따라 영업전을 빼앗긴 즉 공로를 무시당한 무신들이 상장군 최질과 김현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으킵니다, 간신히 진압을 하였으나 전력을 복구하기는 커녕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악화시켜버린 상황이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송나라에 손을 벌렸으나 무시당했지요.

만일 이때 요나라가 개경을 목표로 무리하게 남진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후의 결과는 너무나 잘 아실테니 넘어가고 그렇다면 고려가 요나라에 대하여 상기의 글 처럼 대하였을까를 보면 아닙니다, 비록 전쟁에서 참패를 했지만 요나라는 아직 전쟁을 벌일 여력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주적도 아니고 고려가 사대를 일단은 사대를 해오니 달리 트집잡을 구석도 없지요.

반대로 고려는 일단은 요나라에게 사대의 예를 갖추며 평온한 외교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닌말로 4차 전쟁이 터지면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요나라가 실패한 전술을 담습할리도 없고 그 들의 군대와 일전을 펼치기에는 고려의 군사력은 아직 미흡한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승 축하 파티를 연다?... 그냥 나라에 불을 지르는 행위이지요, 가령 고려의 외교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註211]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高麗)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高麗)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려(高麗)의 사행(使行)을]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宋)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高麗)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註212] [고려(契丹)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契丹)에서는] 항상, “고려(高麗)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高麗)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고려(高麗)의] 사신이 거란(契丹)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高麗)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契丹)이] 한번은 고려(高麗)가 서쪽으로 [송(宋)나라에]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高麗)는 표(表)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契丹)이 깨달아 [고려(高麗)가]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高麗)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 송서 외국열전 고려전


이 것을 보면 고려가 송나라를 삥뜯는다 볼수도 있을지 모르나 실상은 조공 무역이라는게 이런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신하의 나라가 주는 만큼 주면 체면이 서질 않는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당연히 이득이 많은 것도 아니니 재정에 무리가 갈수 밖에요, 그렇다고 그 들을 박대할수도 없는게 국제 정세상 고려는 꼭 필요한 파트너입니다. 이런 저런 잡음이 있다해도 어쨌거나 안고 갈수 밖에 없습니다. 

리고 요나라를 막대했다 하는게 그 들 관리를 막대한것인지, 아랫사람을 막대했는지는 알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뒤의 내용을 보면 고려가 요나라에 함부로 하지 못하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 문제 없는 것을 봐서는 요나라에 있어서도 고려가 매우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라는 것은 알수 있는 대목이지요.

송나라의 사신들의 물건을 가져갔다는 대목도 그러합니다, 외교라는게 비단 면전에서 주고 받는 것 이상으로 뒤에서 주고 받는게 많을수 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겠지요, 이는 좀 넒게 보자면 당시 고려가 가지고 있던 가치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수 있는 부분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물론 고려가 약소국이라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외교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살려나가며 실리를 취하여 나라를 강성하게끔 한것과 이러한 좀 심한 말일지 모르지만 고려는 짱쎄요, 같은 것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8. 송나라와 거란이 국지전을 벌이던 중에 송나라 교섭단이 거란 군막에 도착함.

근데 거기에 고려 사신이 뙇!
으앙?? 니들이 왜 여기 있어?
"구경 왔뜸.."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요나라 사령관이 보는 앞에서 

"걱정마 우리 임금은 너네 황제를 더 좋아해!" 라고 답함.

우리가 여기 온건 무역 때문이니 오해하지 말고 ^^

위에 언급된 2번의 내용을 분할한 것으로 거란 군막에 있었던 것은 고려 사신이 아니라 고려 출신의 거란인입니다, 그리고 그 거란인을 만난것은 송나라 교섭단이 아니라 고려의 관리이지요.

즉 잘못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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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의 위엄..!
귀주대첩이 우리에게 알려진것보다 당시 동북에 정세에 있어서 대단한 사건이죠

귀주대첩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결합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귀주에서의 분전도 훌륭했지만 2차 전쟁때의 경험을 살려 개경 일대의 방비를 집중적으로 강화하였고, 개경만을 노리고 내려오는 적들을 지형적인 유리함을 살려 끊임없이 비 정규전을 걸어 전력을 소모시켜 나갔으며 적의 예상 진로에 병력을 집중 배치 시킨 점은 대단합니다,

다만 동북아 정세에 있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 보자면 네, 3차전쟁을 종결시킨것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귀주 대첩은 대첩이지만 엄밀히 보자면 3차 전쟁의 일부일뿐입니다.

물론 3차 전쟁이 종결되며 요나라는 고려를 목적한바에 따라 병합하거나 강동 6주를 가져오는 것이 가성비가 안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려는 외교관계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후방을 평탄게 하는데 실패하고 많은 국력을 소모했고, 고려는 북진정책을 포기할수 밖에 없던 것을 떠나 역시나 국토의 인프라가 서북면 일대를 중심으로 상당수 갈려나가버린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귀주대첩만이 아니라 고려와 요나라의 전쟁 자체를 봐야 하는 일로서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요나라 송나라 고려의 삼국 간의 균형이 미묘하게 맞춰집니다,

굳이 적어보자면 1.5: 1.5 : 1의 상황이라고 해야할까요? 물론 실제의 비율은 더욱 아니 상당히 고려가 낮겠습니다만 뒤에서 얼쩡거리는 상대를 두고 정면의 상대와 대적할수는 없는 노릇이고, 반대로 정면의 상대와 대적하기에 앞서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러한 관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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